2010년 12월 30일 목요일

请为我们的特别聚会(名叫 东亚洲基督青年大会)祷告

期间: 2011 12-3日,东京

对象: 东亚洲三个国家(日本、中国、韩国)的基督徒年轻人


<<祷告事项>>

1.   求神叫我们以神的爱来彼此沟通、认识、理解、接纳、相爱。
2.   求神怜悯这三个国家有的很常时间的不和睦、相恨、不顺从神的‘彼此相爱’命令的罪恶,好叫我们有圣灵感动的苏醒,叫我们有真诚的悔改。
3.   求神我们奉耶稣的名集合的时候,叫我们看得到‘上帝赐给我们东亚洲三个国家成为邻居的祝福和他的旨意’

谢谢你的祷告,你的祷告是我们的力量、粮食、生命



2010년 12월 26일 일요일

성탄절 전도집회

성탄절 전도모임(圣诞午餐会)이 지난 12월23일에 오후1시부터 우리 집(닛포리화인교회)에서 있었다.

모임을 하면서 참 행복하고, 기쁘고, 보람있고, 즐거웠다. 이 모임을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분들의 기도가 느껴졌다.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모임이 따뜻하고 기쁨이 가득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의 향기가 났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좋았냐 하면은, 우선은 우리 형제, 자매들이 모임을 준비하고, 참여하면서 많이 주인이 된 것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어떤 자매는 요리를 세가지나 해오고, 어떤 형제는 난생 처음으로 요리를 해서 섬겼다. 그 큰 등치에 집에서도 안해 본 요리를 한다고 가지를 썰고, 굽고 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요리뿐아니라, 친구들을 초청해 오고, 조그만 성탄선물을 준비해 와서 새로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자매는 간증을 준비해서 자기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눴다. 특히, 이번 성탄전도집회의 핵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여한 성탄극이었다. 좀 엉성한 점이 있긴 했지만, 그 점이 오히려 매력이었고 마구간을 그려내기에는 가장 적합한 연극이었다. 직접 대본도 쓰고, 진지하게 연출하고, 필요한 도구와 옷도 마련하면서 형제, 자매들이 서로 가까워지고, 연극을 하고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모임내내 너무 좋아서 몇 몇 사람들은 저녁 늦도록 남아서 성탄의 기쁨을 누렸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큰 기쁨이었다.

특히 감사한 점이 있는데 처음 교회가 시작될때 왔다가, 6개월 정도 모임이 나오지 않던 두 명의 자매가 오랜만에 모임에 나와서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중 한 자매는 어제 주일 예배에도 나왔다. 이들과 함께 얘기하고 식사하고 하면서 얼마나 좋은지,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뭐든 다시 해주고 싶고 베풀고 싶었던 아버지 마음 같았다. 감사합니다. 돌아오게 해주셔서!

늦게 온 사람까지 합치면 19명이 모여서 들썩들썩했다. 개인적으로는 영혼을 섬기고 돌보는 일의 보람과 행복을 다시 한번 깊이 맛보는 시간이었다. 부족한 우리의 잔치에도 이토록 기쁨이 있는데, 완전하신 그분이 준비하시는 천국의 잔치는 얼마나 더 기쁘고 감격적이고 행복할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010년 12월 25일 토요일

블로그를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블로그를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사유는 전에 있던 textcube.com 서비스가 인기가 없는지, 서비스 종료가 되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회사인 Blogger.com으로 자동이전되었습니다. 전에 쓰던 곳을 계속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서 아쉽고 이곳이 새로운 환경이라 적응에 시간이 필요할것 같습니다.

여하튼, 계속해서 이곳에서 Chinese Diaspora에 대한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킹이 잘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이전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전 주소 : diachinese.textcube.com
새 주소 :    diachinese.blogspot.com 입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2010년 12월의 기도제목입니다.

안녕하세요?

성탄의 기쁨과 새해의 벅찬 감격이 여러분둘께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몇 가지 중요한 기도제목이 있어서, 메일을 드립니다. 함께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성탄절 전도집회(12월23일, 1시)를 위한 기도제목
    •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 보내주소서
    • 참석한 이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도록 
    • 참석한 이들이 예배, 모임, 말씀공부로 연결되도록
       2.  동아시아(일,중,한) 기독청년 캠프(1월2일,3일)을 위한 기도제목
    • 적합한 그리고 예비된, 일본 기독청년들이 참석토록
    • 한국,중국,일본 청년들 가운데 가족과 같은 친밀하고, 사랑 넘치는 교제가 일어나도록 
    • 집회 가운데 성령님의 깊은 관여로, 참석자들이 삼국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사랑, 비전을 깨달아 알도록
함께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안에서
박수민, 송수아 올림

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지진, 그 일상의 삶

오늘 지진이 있었다.
진도 3의 지진이 동경지역에 발생했다.
진원은 남일본쪽의 바다 깊은 곳인데, 그 영향이 동경에까지 미친 것이다. 오늘 지진은 평소에 경험했던 지진보다 좀 더 길었다. 보통 지진이 오면, "지진이다!" 느끼는 순간 지진이 끝이 나는데, 오늘의 경우는 그 후에도 지진이 조금 더 지속되었다. 아내와 집에 같이 있었는데, 지진이 좀 더 지속되어서 일단 현관문을 열고 밖을 살펴보았다. 특이 상황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지진이 발생한 또 하루의 일상이 지나간 것이다.

TV를 켜보니, 자세한 소식이 나왔다. 그렇게 심한 지진이 아닌경우, 일반방송을 하면서, 그 위에막으로 지진정보를 내보내는데, 오늘이 그런 경우에 해당되었다. 지진이 심하면 정기방송이 중단되고 비상방송이 나온다. 그럴 경우에는 심각한 상황이다.

동경에 온후 한달 반에 한번 정도 지진을 경험하는 것 같다. 삿포로는 비교적 지진이 적어서, 4년3개월 있으면서 총 3,4번 정도 지진을 경험한 것 같은데, 확실히 동경은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진지역이다.

지진이 오면, 우선 소리가 들린다. 아주 기분 나쁜 "그그그...그그...웅웅웅..."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건물이 흔들리는 소리다. 지진으로 건물의 이음새부분이 삐걱거리면서 나는 소리다. 그런 다음 몸이 흔들리는 진동이 느껴지고, 천장에 달린 조명등이 흔들리면서 먼지를 뿌린다. 진도 3,4도의 경우에는 이정도에서 끝이 난다. 일본의 대부분의 건물이 진도 6,7정도는 견디도록 설계가 되어 있어서, 이 정도 지진에는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처음 이사올 때 옆집 동장 아저씨가 지진시에 대피할 장소를 알려주시고, 가스 설치하러 온 직원이 지진시 가스관리 요령을 알려준다. 각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한 학기에 두번 정도 지진대피 훈련을 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배워서 알고 있다.

동경에 살다보면, 지진도 몇 가지 익숙해져야 하는 일상 중의 한가지가 되어간다.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하지만, 큰 지진이 아닌 경우에는 잠시 경각심을 갖다고 또 잊어버리고 일상을 살아간다. 또 그래야하면 살아갈 수 있기도 하다.

오히려 지진이 일상이 되어버린 일본에서는 북한의 위협이 일상이 되어버린 한국이 신기한가 보다. 사실 한국가서 살아보면 그것도 일상인데 말이다. 오히려 한국사람들에게는 지진이 많은 땅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일본인이 신기한데 말이다. 또 일본인 중에는 중국에서 사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짜 음식들, 이런 저런 정부의 간섭, 그리고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일본방송들의 중국에 대한 잘못된 보도들을 보면서 도저히 중국에서 가서는 못살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실 가서 살아보면, 일본보다 훨씬 살아가기 재미있고 좋은데 말이다.

저마다 주어진 환경이 다르고 겪는 위험이 다르지만, 사람사는 것이 다 일상을 사는 것이고, 그 일상이 익숙해지면 다 살만한 것이다. 재작년 연말과 작년초에 안식년과 두번째 텀의 시작으로 말미암아, 북경 -> 서울 -> 동경을 연속해서 살게 되었다. 다 살만하고 적응하고 익숙해지면 불편은 줄어들고 위험요소는 잘 안보이게 된다.

사람들은 일단 자신이 있는 곳에 익숙해지면 자신이 사는 곳의 위험요소나 불편들이 작아져 보이고, 익숙하지 않은 곳의 위험요소나 불편들이 커져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새로운 생활에 도전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나의 설교 - 추구와 스타일 전환중

나는 지난 8월부터 설교, 그 추구와 스타일을 갱신하고 있다.

우선은 적은 본문에서, 좀 더 긴 본문으로 바꾸었다.
예를들면, 출애굽기의 경우, 전체 출애굽기를 다섯번의 설교로 마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렇게 할 경우, 깊이 쪼개고 살피고 살을 붙이고 하는 작업을 들하게 된다. 지난 몇 달간 긴 본문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으로 설교를 해보니, 본문에 살을 붙이지 않고 오히려 본문에서 살을 빼는 작업을 더 많이 해야 했다. 심지어 십계명 전체도 한 설교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전체 흐름에 분문을 맡기게 되고,  본문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말씀하게 하는데 더욱 적절한 심플한 설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심플한 설교는 너무 단조롭고, 가볍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심플함으로 포인트가 잘 드러났고, 본문 자체가 말씀이기에 가볍지 않았다. 내가 설명을 더 하고, 예화를 붙이고, 목소리를 높여서 길게 얘기해야 무게가 실리는게 아니었다. 지난주 한 형제의 설교후 sharing은 그 점을 증명해 주었다. 나는 설교중 출애굽기 20장 뒷부분을 지나면서, 하나님을 경외함을 본문 그래로 거의 읽는 수준으로 전달했는데, 그 형제는 굉장히 진지하고 무게 있게 받아들였다. 그야말로, 내가 말하지 않고, 말씀이 말씀하셨음이 보여진 것이다.  

긴 본문을 다루다 보니, 성경자체가  강조하는 부분, 특히 중복해서 다루는 부분이 잘 드러났다. 너무 짧은 본문을 다룰때는 긴 시간이 지나야 성경의 66권중에서, 겨우 한 권을 다룰 수 있는데, 그럴때 성경전체의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 너무 깊이 좁게 들어가 버려, 나무만 보이고 숲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긴 본문을 다룰 때는 그 그림, 숲이 더 잘 보이게 된다. 설교자뿐 아니라 회중도 그렇다.

또한, 전체 성경을 통전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나와 회중에게 성경을 한 구절, 한 구절의 나열로 보지 않고, 한권 한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분의 말씀이라는 통전적 시야를 준다. 보이지 않게 그런 관점이 생겨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나 개인적으로는 내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구약의 많이 다루지 않는 부분들 (예를들면, 레위기, 민수기...등)을 잘 전달할 수 있늘까? 하는 우려도 있었는데,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은 자신감이 생겼다. 몇달을 이렇게 설교하면서, 구약본문의  중국어 단어들이 어렵고 익숙하지 않다 보니, 내말로 표현하기 보다는 성경본문을 그대로 읽는 일이 많아 졌는데, 오히려 이 점이 나의 중국어를 더 진보시키고 있다. 준비하면서 읽고, 하면서 읽고, 나누면서 읽고, 계속 반복하면서 어려운 고유명사들을 읽다보니 조금씩 익숙해졌다. 지금까지 구약의 여러 이름, 지명, 단어들은 중국어로 익숙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좀 더 좋아질 것 같다. 자꾸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니, 구약의 이름, 지명, 단어들이 중국어로 더 익숙해지고, 조금씩 입에 붙게 되는 것을 느낀다.

얼마전 한 후배(설교를 전공한)의 facebook에서 이런 글을 봤는데, 많이 와 닿았다.

"하나님은 우리 설교의 창의력에 점수를 주지 않는다.
 설교가 얼마나 신실하고 분명한가에 점수를 준다.-해든 로빈슨"

많이 공감하는 말이다. 창의적으로 설교하려기 보다, 조금 더 신실하고, 분명하게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전달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설교의 길이다.  



2010년 11월 18일 목요일

"To serve is to suffer ,섬김은 곧 고난입니다."

얼마전 어느 선배선교사님의 기도편지를 받았다.
국제단체에서 나름대로 전문영역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신데, 매우 유익한 내용의 글을 알려주셨다. "섬김은 곧 고난이다(To serve is to suffer)"라는 페르난도의 글이다. 그의 글에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우리 한국교회에, 그리고 우리 개개인에게 유익한 메세지를 담고있었다. 그리고 내가 선교사로서 어떻게 섬겨야하는가 말해주고 있다.

우선, 영문으로 된 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행히, 최근 멋지게 번역된 그의 글이 한국어판에 번역되어 있어서 연결해둔다.

<선배님의 편지>

 " 최근 스리랑카 교회의 지도자 아지스 페르난도(Ajith Fernando) Christianity Today 지에기고  , “섬김은  고난이다(To serve is to suffer: http://www.christianitytoday.com/globalconversation/august2010/index.html)” 

지구촌 곳곳에서  반향을 일으키면서 수많은 응답 글이 쏟아졌는데, 특히 지난 34년간 아프가니스탄에서 남편  자녀와 더불어 희생적으로 사역해온 어느 부인선교사(Libby Little) 감동적인 응답 (http://www.christianitytoday.com/globalconversation/august2010/response2.html?start=1) 발표된 직후에 남편선교사(Tom Little)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원문 주소>

<한국어판 주소>

페르난도의 글은 참 좋다. 성경적이다. 그리고 핵심을 잘 알려준다. 우리 믿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맞는지 알려준다.

이번 "섬김은 곧 고난"라는 글도 참 좋다.

왜냐하면,

# 1
우리가 처한 위기를 알려준다. 우리는 성공적이 일상이 되는 교회의 신앙적 배경에서 자랐다. 기적같은 한국경제의 성장처럼, 한국교회는 그렇게 커왔다. 그래서 숫자가 늘고, 사이즈가 커지고, 보이는 영향력이 확대되는 그런 비대한 몸집에 익숙해져 있다. 작고, 더디고, 막힌 듯한 것을 그리고 그로인한 좌절을 맛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배우는 것에 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한국교회의 성공적 신화라는 배경은 약이면서 동시에 독이 된다. 부흥과 성장에 대한 긍정적인 도전, 열정, 헌신은 좋은 면이지만, 반면에 조급하고, 보이는 것에 급급하고, 시대적 조류에 쉽게 영합한다.

우리는 효율성과 측정가능한 결과로 판단한다. 영미에서 통계학은 진리다(우치무라 간조의 말). 그래서 더욱 '섬김은 고난'이라는 말을 배우기가 어려운 것이다. '고난'을 성공을 위한 잠깐의 땀흘림과 고생, 혹은 돌파해야할 장애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고난도 승리자의 (혹은 성공자의) 승리를 더욱 빛내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성공'으로 귀결되지 않는 고난이란 존재할 수조차 없다. 죄악된 세상에서 일생을 지고가야할 고난의 미학에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다. 이게 우리의 아픔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약점이다.

# 2
고난을 통한 영광을 드러내는 십자가의 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몸에서 나타나려면, 우리는 고난이라는 불을 통과하는 질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고난을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매일 져야하는 일상의 고난을 모두 포함한다. 나를 쇠퇴하게 하고 늙어가게 하는 그런 일상의 고난들 말이다.

질그릇이 깨어지지 않고, 어떻게 그 안의 보배를 드러날 수 있는가? 그럴수 없다. 질그릇은 깨어져야, 아주 잘 깨어져야, 그 안에 보배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고후4:7) 우리의 유일한 보배되신 예수님이 드러나려면, 능력의 심히 큼이 그분께 있음이 드러나려면, 질그릇은 깨어져야하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진 질그릇 조각을 붙들어 영웅 만들기 좋아한다. 고난 받은 조각이라고 말이다. 그로 말미암아 드러난 보배는 간곳 없고, 깨진 조각들이 깨어진 조각답지 않게 보배처럼 빛난다. 깨진 질그릇은 그냥 밖에 던져져 있어야 마땅한데 말이다. 주객전도가 심하다.

# 3
섬김의 고난중 제일 가는 고통은 아마도 '자아의 죽음'을 인식하는 것일 것이다. 자아의 죽음을 가족으로 불리는 형제, 자매들, 동역자들을 대하면서 오게 된다. 그들을 섬기는 비효과적이고 측정 불가능한, 그리고 통계낼 수 없는 수고와 애씀이 섬김이다. 우리는 그 섬김 가운데 자아의 죽음을 철저하게 인식하게 된다. 얼마 전에도 이 고통을 겪었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사실 죽어서 아픈게 아니라, 죽기 싫어서, 죽은 것이 내 더 뜨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우쭐되고 싶고, 화려하고 싶은 자아에 비수를 가하기에 싫은 것이다. 내 이기심이 반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다. 비뜰어진 자아가 살아남은 것처럼 몸 부림침으로 오는 고통인 것이다.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사망선고를 받았는데, 그런데 그 놈 끈질기기도 나를 붙든다. 그런데 섬김은 이런 자아의 잔영을 소멸을 촉진시킨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섬김은 나를 하나님의 영광을 투영할 수 있는 통로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2010년 11월 13일 토요일

PC에서 중국어 사용 하시는 분들을 위한, TIP 몇 가지

기술의 발달로 컴퓨터에서의 중국어 사용이 날로 편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제가 사용하고 있는 몇 가지 프로그램이 중국어 사용하시는 분들에께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알립니다.

저의 경우는 상당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 1 중국어 입력기

보통 중국어 입력을 윈도우에서 제공하는 입력기에 중국어를 선택해서 입력하게 되는데, 이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입력기가 있습니다. 중국어로 설교 준비를 할 때, 많은 경우 해당하는 단어를 입력기가 인식하지 못해서 한 글자 한 글자 입력했었는데, sogou의 경우에는 왠만한 단어는 다 인식합니다. 그리고 한번 사용한 단어에 대한 메모리가 뛰어납니다. 정말 만족스럽습니다. 어떤 언어의 윈도우에서도 깨지지 않고 설치되며, 매우 속도가 뛰어나 sogou 경우는 보통 MS윈도우 제공하는 문자입력 시스템보다 두배 정도의 속도가 빠른 것 같습니다. 한번 써 보세요!

그리고, sogou 외에 google에서 제공하는 입력기도 있습니다. 이또한 기존의 입력기도다 입력이 훨씬 빠릅니다. 그렇지만, 저의 경우에는 sogou보다 느린 것 같아서 많이 사용하지는 않지만 일단 설치는 해두었습니다.

무료입니다. 사이트는 여기입니다.
  1) sogou 입력기 : http://pinyin.sogou.com/
  2) google 입력기 : http://www.google.com/ime/pinyin/

# 2  PC용 중영사전입니다.

사전은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사기도하고, 알아보기도 하고, 실제 사서 PC에 깔아서 써보기도 했는데, 쓸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좋은 사전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전은 한글윈도에서도 전혀 깨지지 않고 설치됩니다. 그리고, 한국어도 인식하고, 일본어도 조금 나옵니다. 무엇보다, 영어 중국어는 매우 정확하고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알려줍니다. 영어발음도 읽어줍니다. 더 좋은 점은 무료입니다. 또 이 사전은 웹상에서만 글씨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문서, PDF파일의 단어까지도 인식합니다. 물론 너무 잘 인식해서, 어떤 때에는 인식기능을 꺼 두어야 할 경우도 있긴 합니다.
   주소는 여기입니다.      http://cidian.youdao.com/

# 3 중국어성경 프로그램입니다.

원래 이 프로그램은 "信仰宝库 Chinese Treasures"라는 이름으로 무료 시디가 많인 유통된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웹상에서도  접속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좋은 점이 몇 가지 있는데, 먼저는, 중국어 본문을 카피해서 인용할 수 있는 점입니다. 그리고,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성경전체(창세기-계시록)의 주석이 있습니다. 이외에 여러 번역본 중국어 성경을 볼 수 있고, 인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엄청난 양의 책들이 들어 있습니다. 한번 접속해 사용해 보십시오!
         http://dbsbible.org/english/ct_content.htm   

   --》 http://xybk.fuyin.tv/dbs/b5/index.htm
이 세가지 프로그램을 써 보면서 다시 한번 중국의 저력에 놀랬습니다. 발전속도가 무섭습니다. 그리고, 무료로 제공할 정도로 지지 기반도 튼튼합니다.

제 생각에 앞으로 성경에 관련된 프로그램은 중국 기독교가 엄청난 저력을 발휘할 것 같습니다. 구입할 경제력이 있는 기독교인 층이 형성만 되면, 봇물 터지듯이 유용한 프로그램들이 등장할 것 같습니다.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선교 십계명


선교는...

1.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2. 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한다.

3. 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으로 한다.

4.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릎으로 한다.

5.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6. 조직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으로 한다.

7.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우가 함께 한다.

8. 현재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한다.

9.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한다.

10. 떠들며 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한다.  

                                             <넓은 뜻> 높은 뜻 정의 교회 선교소식지. 첫번째 이야기에서

많이 공감이 가는 선교의 십계명이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는 그렇게 선교하고 있는가? 자문해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다.

         "사람, 믿음, 몸, 무릎, 하나님, 생명력, 온 교우, 미래, 지속적, 조용히.....".










2010년 11월 9일 화요일

로잔대회와 중국교회

로잔대회가 폐막했다.
이시대에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회중 하나가 마무리된 것이다.
로잔대회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 다루는 주제와 내용은 상당히 유익하고, 우리가 시대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는 터라, 시간을 두고, 로잔 홈피를 통해서, 남겨진 비디오를 보며 도움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번 로잔대회에서 가장 논란을 제기한 문제는 개인적으로 중국교회의 불참이 아니었나 싶다. 듣기로는 200명의 대표가(복음주의권을 가정교회가 대표했다. 삼자교회는 신학적 노선, 정부와의 관계로 참석 자체를 시도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단 한명도 참석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주 원인은 중국정부의 참가방해였다. 대부분이 집에서, 혹은 공항에서 출국을 저지 당했다. 그리고 결국은 단 한명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중국인사역을 위한 국제회의에 첨석했다가, 이 200명의 대표중 한명인 가정교회 장로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 첨석하지 못하게 된 전후사정과 로잔대회가 중국교회에 미치는 영향들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번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중국교회의 변화와 축복을 볼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번 로잔대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교회는, 놀랍게도 단 한명의 참석자도 보내지 못한 중국교회가 될 것 같다.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알아야할 보편적인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그들을 향한 복음의 필요성에 대해서 더욱 깊이 인식하고, 세계선교에 대해서 그 만큼 더 많은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왜 중국교회가 한 명의 사람도 참석시키지 못하고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첫째, 이번에 첨석하려다 정부로부터 출국을 저지당한 사람들은 지금 로잔대회에 대해서, 가장 '가난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났던 가정교회의 장로님의 말에 의하면, 삼자교회든 가정교회든 이번에 대회에 참석하려다 저지 당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교회,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한가지 중요한 의문이 생겼다고 한다. 그 의문은 '도대체 우리가 왜 참석할 수 없는가? 참석을 저지 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로잔대회가 무엇이기에 그런 저지를 당했는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의문으로 말미암아 지금, 저마다 로잔대회에 대해서 연구하고 배우고, 나누고 있다고 한다. 가려다 못 갔으니, 참으로 가난하고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라도 더 듣고,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할 것이다.

둘째, 초청받은 중국의 대표자들중에는 30,40대의 젊은 지도자들이 많았다. 내가 만났던 그 장로님도 40대 중반의 젊은 장로님이었다. 그들은 정부의 각종 압력을 받으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각종 압력이 이들을 더욱 정직하게 더욱 성경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정부의 간섭아래서 순수하게 보편적인 세계교회와 연대하려고 노력하는 일환이 로잔대회의 참석이었다. 30,40대에 이미 고난의 터널을 지나며, 세계적 교회의 보편성에 연결점을 놓으려는 사람들, 그들이 이끌어갈 앞으로의 20, 30년간의 중국교회의 모습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셋째, 중국교회의 대표성과 고민이 달랐다. 무엇이 대표성일까? 아마 많은 나라의 경우, 후원을 많이 한 대형교회 지도자들, 선교단체의 대표들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교회는 좀 달랐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많이 대회를 후원할 여력이 없다. 그리고 선교단체도 없다. 대부분이 조심스럽게 가정교회를 세우고, 수 많은 어려움, 특히 핍박과 손해가운데 믿음을 지켜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대표들이었다. 그들은 기득권이라고는 한번도 가져본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고민은 국가와의 관계였다. 치열한 그 고민은 로마시대의 초기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닮았다. 이에 비해서 우리는 후기로마시대(기독교 공인이후)의 성도들의 고민과 닮았다. 고민이 다르니 기도가 다르고, 얻고 배우는 것도 다르다.

물론 중국의 복음적 가정교회들이 전부 괜찮은 것은 아니다. 아주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특히, 급속하게 진행되는 세속화는 우리의 중국교회에 대한 희망을 송두리째 짓밟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지난  2010년10월 발행한, 한 대도시의 대표적인 가정교회의 정기 간행물에 실린 로잔대회에 대한 글은 우리의 희망에 힘을 실어준다.

이 글에서 저자는, 로잔대회에 대한 역사, 영향, 의의, 그리고 중국교회와의 관계를 정리해서 알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参加2010 年洛桑会议对中国教会具有以下重要意义。
        第一,中国教会走出去,促进了与普世教会的合一与团契。1、我们作为中国教会的一部分,融入普世教会大团契。通过洛桑这个全球性的教会平台,加强了中国教会与普世教会间的相互了解和交流。2、恢复中国教会与普世教会在基督身体里的连接,并与大公教会的历史传承接轨。
        第二,中国教会走出去,有利于中国教会迈向普世宣教。1、了解并宣传普世教会宣教的现状和动向。2、成为中国教会走向普世宣教的一个平台,推动中国教会参与普世宣教的实际行动——共同寻求使命,共同承担责任。
        第三,中国教会走出去,展现出中国教会自身的成长与成熟。1、使中国教会具有更广阔的国度胸怀,促进中国教会内部的合一、交往和配搭。2、有助于加强中国教会在社会中的见证,推动中国教会以基督的爱和真理服侍这个世代并走向普世宣教。

위를 간략 번약하면,

 중국교회의 2010년 로잔대회 참석의 의의
 첫째, 중국교회의 참석은, 세계교회와의 일치와 단결을 촉진한다.
 둘째, 중국교회의 참석은, 중국교회의 세계선교에 도움을 준다.
 셋째, 중국교회의 참석은, 중국교회 자신의 성장과 성숙을 드러낸다.

이 글에서 강하게 드러난 그들의 고민과 분투는 세계교회와의 연계, 그리고 세계선교 등으로 표현되는 시대적 사명감이다. 중국교회는 그 시대적 소명감을 느끼고 있다.

















2010년 11월 7일 일요일

중보기도에 관하여.....

중보기도라는 단어는 논란이 많은 단어다. 이 용어를 중국어로는 代祷(대도)라고 하는데, 기독교계에서는 카톨릭적인 냄새가 나는 단어라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그 용어의 사용이 어떻든, 우리에게 대도는 중보기도라는 단어로 인식되어 있음으로 이곳에서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쓰도록 한다.

중보기도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 인용하고, 그 인용에 내 나름대로의 묵상과 해석을 더해보고자 한다.

"Your part in intercessory prayer is not to enter into the agony of intercession, but to utilize the commonsense circumstances God puts you in, and the commonsense people He puts you amongst by His providence, to bring them before God’s throne and give the Spirit in you a chance to intercede for them: In this way God is going to sweep the whole world with His saints"
(챔버스의 매일묵상 11월7일)

"중보기도에서 우리가 할 역할은 어떻게 중보기도를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 갖다 놓으신 일상적인 환경들과 사람들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려 드리고서, 우리 안에서 계신 성령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할 기회를 갖게 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온 세상을 그의 성도들과 더불어서 다스려 가고자 하신다."

이 묵상은 로마서 8장을 배경으로 한다.
로마서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중보기는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보기는 하나님이 일상에 만나게 하시는  사람, 일과 그 호흡을 같이 한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지금 바로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사람과 일들, 그리고 그전의 삶의 과정가운데 주어졌던 사람들과 일들이 내 중보기도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보좌위에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그것들을 품고 기도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실 수 있도록, 내 삶에 허락된 사람들, 일상들을 기도의 자리에 내놓는 것이다. 우리 안의 성령님이 우리를 품고 덮고 이끌고 기도하심으로 세상을 섬기신다.

그럼으로, 내가 내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먼저 내 마음에 품고, 기도 가운데 내 놓을때, 놀라운 성령님의 터치가 기도 가운데 주어진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중보하시는 것이다. 전에 알지 못했는 생각, 방법, 방향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무거웠던 것이 가벼워진다. 누리지 못했던 평안과 기쁨이 솟아난다. 그리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확신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땅가운데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그분을 보게 됨으로 나는 더욱 잠잠하고 작아진다. 그분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며, 더 벅찬 경외감으로 그분을 보게 된다.그래서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향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그분의 일의 동역자가 되어 이 세상을 섬길 수 있는 영광스러운 중보기도의 특권을 주신 것이다.

나는 이만열목사님의 중보기도를 잊을 수 없다. 이 분에 관해서는  "사람 그리고 만남"에 이미 기도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으니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그분의 기도는 여전히 내게 큰 자극이요 도전이다. 매일 1500여명 이상을 품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그의 기도는 그분을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는 복된 자리였다.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임재함으로부터 오는 신령함이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이 기도였으리라 믿는다.

오늘도 그 복된 기도의 자리에 나를 부르셨다. 감사! 감사! 감사!



2010년 11월 3일 수요일

중국인사역 국제회의를 참석하고 나서

지난주 한주간 중국인 사역을 위한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주로 해외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사람들이, 디아스포라 중국인들이 귀국후에 중국교회에 잘 정착하도록 돕기 위해서 모인 모임이다. 이번 모임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누렸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만남의 축복을 누렸다.  세계 이곳 저곳에서 중국인 사역을 하는 사역자, 중국내에서 유학하고 귀국해서 모임을 이루고 섬기는 사람들, 디아스포라 중국인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섬기는 이런 저런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그들을 통해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중  몇 몇 사람들과는 아주 가까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15여년만에 만난 과거 중국유학시절 동료도 있었다. 그는 당시 중국어를 배우러온 영국인 크리스천이었는데, 지금은 런던의 한 중국어 예배를 섬기는 목사가 되어 있었다. 참 인연이 놀랍다. 이외에 인상깊게 만난 홍콩의 팽장로님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건강하고 활기차게 주님을 섬기고 사는 70세 노인의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모임을 통해서 알게 된 중국 출신의 한 홍콩사역자는 주 안에서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는 내게 많은 질문을 했고, 그 답변을 소중하게 들어주었다.

둘째, 사역에 대한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는 배움의 축복을 누렸다.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사역들을 들으면서, 또 토론에 참석하면서, 하나님이 지금 전 세계 중국인들 가운데 어떻게 일을 이루어가고 계신지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대륙의 변화와 가정교회의 모습은 내가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지 더욱 생각하게 해주었다. 중국 가정교회 중에서 가장 앞서가는 일부 교회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해나가고 있었고, 매우 균형잡히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가정교회의 젊은 장로님의 강의는, 그들이 세계교회의 흐름을 잘 알고 있고, 그 흐름에 자기들의 모습에 끊임없이 투영하고 전진하고 있었다. 또한 본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서, 성경적이고 성령적으로 문제에 도전하고 있었다. 참으로 인상적이고 감사했다.

셋째, 내가 하고 있는 사역과 전략에 대해서 다시한번 돌아보고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지금 동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역이 대체적으로 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얻었다. 문제는 방향성을 가지고 지금 힘있게 추진하여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열매로 그 나무가 어떠한지 경험해야 한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숙제다.






 

2010년 10월 19일 화요일

최근 글을 올리지 못한 이유

최근 한달여간 글을 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070전화도 사용하지 못했다.
주 원인은 인테넷 접속이 안되서 였다.
지금까지는 공중 나는 인터넷 무선 전파를 사용했는데,
어느 날 그 공중 나는 전파를 보내 주시던 분이 우리에게 귀뜸도 안주시고(?) 이사를 가 버렸다.
그후로는 인터넷을 쓸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gmail만은 fon free를 통해서 무료 접속이 가능해 이메일만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인터넷 접속이 제대로 안되니, 좋은 점도 꽤 있었다.
인터넷 사용시간의 현격한 줄고, 컴퓨터 사용시간의 단축되었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데 민감하지 않아서 약간은 좀 더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 정식으로 우리 이름으로 인테넷이 설치되었다.
이곳에 온지 1년 한달을 버티다가 설치했다. 정말, 070전화, 인터넷 이제 잘 터진다.
앞으로 좀 더 잘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을 것 같다.

QuanHe형제의 세례와 감사했던 하루

QuanHe형제의 세례와 감사했던 하루

 

오늘은 특별했던 날이었다. 주일이요, 한 형제가 세례 받은 날이요(닛포리 화인교회의 첫 세례자), 닛포리 교회 첫 성찬식이 있었던 날이었다. 하루 종일 잔칫집과 같았다. 요리를 준비하고, 손님들도 오고, 세례식을 축하하려고 세례 받는 형제의 친구들이 와서 예배에 참석했다. 어른 17, 아이들 3명 총 20명이 어우러진 잔치의 하루였다.

 

참 감사했다. 한 생명이 태어나고, 예수님의 제자로 결심하고 그렇게 첫 발을 내딛는 것은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큰 보람과 힘을 주었다. Quan형제의 간증을 들으면서,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함, 그분의 사랑에 더욱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되었다.

 

Quan 형제는 아내의(송수아 선교사) 일본어 학교, 같은 반 학생이었는데, 전도해서 1월부터 꾸준히 예배에 참석했다. 중국 동북지역 출신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1년여 직장생활을 하다가 일본에 1년 반전에 일본에 유학을 왔다. 일본어 학교에서 같은 반이었던 아내의 전도로 우리 집 모임에 왔다. 그리고 예배와 모임들을 통해서 지속적을 성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삶을 출발했다. 세례를 앞두고 그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생활 가운데 도우시는 하나님, 이런 저런 일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선한 간증을 우리에게 쏟아내었다.

 

세례식, 성찬식을 준비하면서 이런 저런 고민이 많았다. 어떤 형식으로 우리에게 맞게 그렇게 하면서도 성경적 의미를 잘 살리는 세례식과 성찬을 할 수 있을까? 먼저, 세례는 침례로 진행했다. 삿포로 국제국제교회에 있을 때, 그 곳 교회의 전통을 따라 침례를 했었는데, 할 수 있으면 침례를 하는 것이 더욱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소가 문제인데, 장소는 우리 교회 자체가 우리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 형태임으로, 우리 집의 욕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그곳 욕조를 이용했다. 성찬식은 일부러 성찬기를 구입하지 않고, 깨끗하고 심플한 컵을 두 개 구입해서, , 녀 나누어 분잔 시에 사용하도록 했다. 성찬용 빵은 형제 중 한 명이 중국 삥(구운 빵)을 굽도록 해서 사용했다. 이 모든 것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고, 그들에게 적합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다르게 한 것은 없었고, 다만 노력하고 생각한 부분이 있다면, 형제, 자매들과 성찬, 세례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그 좁아진 간격 사이에서 선교사로서의 내 역할을 최소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성례는 평안과 기쁨, 은혜가운데 진행되었고 마쳐졌다. 감사하다.

 

손님들, 형제 자매들, 세례자과 함께 늦은 점심 겸 애찬을 나누면서 교제의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손님들이 먼저 돌아가고, 형제, 자매들 9명이 남았다. 한 테이블에 앉아서, 오늘을 인도하신 하나님,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이 시간을 통해서, 나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심을 깊이 경험했다. 지난 9개월간의 나눔 가운데 최고의 나눔이었다. 다들 새롭게 예수의 생명의 거듭나 세례 받은 Quan형제의 간증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마음이 더욱 부드러워지고 감동이 깊어졌다. 나눔에 깊이가 있었다. 솔직하고 부끄러워하는,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연대감이 느껴지는 고백이 쏟아졌다. 참 행복한 나눔의 시간이었다.

 

지난 1년간의 동경생활이, 9개월간의 교회개척이 헛되지 않았구나! 저녁에 아내와 함께 하루의 일을 나누면서 많은 감사를 드렸다. 오늘은 우리 닛포리 화인교회의 형제, 자매들에게 중요한 매듭 한 개를 맨 하루였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곳에 보내사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들에 더욱 매진할 용기를 얻은 하루였다.



2010년 9월 2일 목요일

제1기(2004년5월-2008년9월) 사역지 삿포로를 다녀오다

지난 8월13일에서 19일까지, 우리 가족 모두가 삿포로에서 사역했던 국제교회를 다녀왔다. 2년만에 삿포로에 돌아가본 것이다. 지난 2008년 9월 안식년을 떠나, 2009년 9월 동경으로 들어와 개척을 시작하면서, 오랜만에 다시 가본 옛 사역지였다. 이번 삿포로 방문은 내게 하나님에 관해서,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선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다지는 좋은 시간이었다. 삿포로에서의 6日은 우리에게 이러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확신하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느껴지는 형태로 전달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통해서 더욱 확인된다. 이번에 삿포로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거의 매일 매끼를 누군가 같이 했고, 밤 늦도록 누군가가 우리 옆에서 함께 있어 주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다. 중국인 형제, 자매들이 제일 많았지만, 국제교회 사역에 동참하면서 교제하게된 일본인, 한국인 형제, 자매들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고향에 돌아온 가족을 맞이하듯이 우리를 대해 주었다. 서울에(아마도, 동경)서 내려온 가족 챙기듯이 우리를 챙겨 주었다. 그들과 만나 얼굴을 보면서 얘기를 하면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만난 존재라는 생각을 더욱하게 되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육일간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우리에게 새 힘을 주었다. 그리고 용기를 주었다. 신뢰를 주었다. 우리와 아무 혈연적 관계가 없는 그들의 이런 사랑 한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곳에서 사역했었고, 그들도 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기억해 주고, 2년이 지난 지금에도, 분에 넘치는 사랑으로 환대해 주었던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더욱 신뢰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삿포로 중국인 사역을 떠나, 북경, 서울, 동경으로 이주하던 2년간 이런저런 소식이 가끔씩 들려오곤 했다. 항상 멀리까지 살아남어서 들려오는 소식은 무거운 소식이 많은 편이다. 우리에게도 그랬다. 그렇지만 직접 그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전후사정을 입체적으로 들어 보면서,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심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2년전과 비교해서 눈에 띄게 성장하고 변화한 형제, 자매들을 보면서 그들 가운데 계신 주님을 보았다. 이제 스스로 일어나 열심으로 주님과 사람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과연 그들 옆에서 붙어서 권면(잔소리?)했다면 저 정도 자력갱생이 되었을까?' 싶었다. 그렇다. 사람은 의지할 사람을 찾지 못할 때,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한다. 그들 가운데 그런 역사가 두드러지게 보였다.  

나는 그런 몇 몇 사람들으 보면서, 그들 속에 임재하시고 주재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신뢰하게 되었다. 그렇다. 선교사로서 내가 해야할 가장 큰 일은 그들 가운데 내가 큰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큰 일을 행하셨고, 또 행하실 그분을 깊이 신뢰하는 것이다. 그 신뢰를 깊고 견고히 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믿음의 싸움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신뢰만큼 양도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선택과 결정을 맡기는 것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전진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고통스러운 순간을 넘어서야 근육이 만들어지듯이 스스로 그것을 넘어서야 자립의 근육이 만들어진다.  

좋은 예가 있다. 나는 사역으로 주일을 껴서 출장가게 되면, 이곳 닛포리 중국인교회의 예배전체를 우리 형제, 자매들이 스스로 준비하고, 진행하도록 맡겼다. 이제 겨우 6개월된 교회인데 말이다. 우선 중국어로 예배를 섬길 사역자를 찾을 길이 없어서 그랬다. 그리고 이들 스스로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큰 물의가 생기지 않토록 기본적인 부분을 미리 알려주고, 준비해주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평소 예배 때는 오후 1시30분 예배시간에 겨우겨우 오던 사람들이, 내가 없을 때는 오전 10시부터 와서 음식을 준비한다. 오전 10시에 왔다. 내가 아무리 잔소리 한들 그들을 그 시간에 오게 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자신에게 책임감이라는 무게가 주어지면, 그 무게를 감당하려고 스스로 결정하여 부지런을 떨게 되고, 그 부지런을 떰은 단순히 행동면에서만은 아니다. 전인적인 부지럼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섬김, 리더쉽이라는 근육이 생겨난다. 나는 그런 자발적 변화를 통해, 섬김, 리더쉽이라는 근육으로 잘 다듬어진 형제, 자매들을 삿포로에서도 만났다. 그런데 그런 변화의 핵심은, 영향력 있는(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향력을 갖게 된) 내가, 그 자리에 없는 순간 일어났다는 것이다.  

셋째, 사랑하는 이들에 관한 더욱 정확한 기도제목을 얻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참 행복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더욱 그들을 알게 되었다. 이제 알게 된 만큼, 관심과 기도가 깊어질 것이다. 만나서 그들 가운데 계신 성령님,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이 한 성령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함께 함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인생을 둘러싼 생노병사의 문제로 여전히 신음하고, 견디고, 그리고 그런 상황들을 돌파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나눔은 나의 기도를 더욱 힘 있게 한다. 좀더 마음을 담아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중 한 일본 자매님 가정과 만남은 더욱 의미가 있었다. 일년 전 장성한 아들을 잃고 고통 가운데 쇄약해져 가는 부부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같이 기도했다.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아직도 그 고통과 슬픔은 이들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이 그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를 사랑하고 있으며, 여전히 신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 신뢰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원하시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자신의 아들을 잃으신 하나님 이들을 꼭 안아주십시오!".

넷째, 우리가 영육간에 새 힘을 얻는 시간이었다. 삿포로에서 누렸던 짧지만 귀한 시간은 우리 가족에게 큰 힘과 위로, 격려를 주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그러했고, 오랜만에 맛보는 북해도의 공기, 자연이 그랬다. 한 마디로 우리가 새 힘을 얻었다.  

우리는 삿포로에서 귀한 손님으로 여김을 받았다. 동경에서는 우리를 그렇게 맞아주는 사람들이 없다. 삿포로에서 형제, 자매들은 우리와 만나고 싶어하고, 얘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동경의 형제, 자매들은 우리가 먼저 얘기하고, 만나고 싶어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 그로 인해서 동경에서는 우리가 사랑 받기 보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사람들이 더욱 많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더 복된 기회가 많다. 이는 감사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고 부르심 받았기 때문이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적절한 때에 고향 같은 첫 사역지 다녀왔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전한 우리 삶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을 안고 기도할 때, 더욱 마음을 담아 기도하게 합소서! 그들의 따뜻한 섬김과 사랑을 기억하사 더욱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큰 하나님 나라 안에서 귀한 동역자들로 같이 서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앎과 사랑함이 그의 나라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촉진하는 촉매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010년 8월 21일 토요일

단기 선교팀의 방문과 사역

8/13-19까지 한국에서 온 단기 선교팀의 방문과 사역이 있었다. 이번 단기팀은 GP선교회(내가 속해 있는 선교회)의 이사님이신 김대영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서울우림교회 성도님들과 담임 목사님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이번 팀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단기 팀에 담임목사님이 함께 오셨다는 점, 둘째, 단기 팀 구성이 가족 단위이며, 연령대가 7세에서 60대까지 있는 다양한 연령대의 구성된 팀이라는 점, 셋째, 호스팅 교회가 하나가 아니라, GP Japan의 네개의 교회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준비단계에서부터 몇 가지 우려를 갖게 했다. 예를 들어, 호스팅 교회간의 연합이 과연 잘 될 것인가? 스타일, 사역방식,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른 교회와 그 지도자들간의 연합은 큰 과제였다. 또한, 다양한 연령의 멤버들이 이번 단기 팀 사역을 잘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우려가 있긴 했지만, 이번 서울 우림교회 단기 팀의 사역은 성공적이었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유익을 주었다.

어떤 점에서 성공적이었는가?
다른 무엇보다, 호스팅 교회간의 동역이 잘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물론 약간의 삐걱거림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잘 넘어가고, 그런 가운데 함께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던 일들이 이루어졌고, 그 가운데 함께 하는 은혜를 누렸다. 또 그런 가운데서 서로의 모습을 알게 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된 가족단위의 단기 팀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사역에 유익했다. 가족 단위이기에 선교사들도 남성 선교사님들만 단기팀에 동참하지 않고, 선교사님들 아이들까지도 함께 하면서 동참할 수 있었다. 청년중심의 사역 팀이 오면, 부인 선교사와 아이들은 집에서 늦게 들어올 남편 선교사를 기다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같이 다니니 그런 점이 없어졌다. 또한 아이들이 5명이나 되는 팀이라, 선교사들 자녀들도 그들과 함께 하면서 교제의 유익을 누렸다. 그래서 "가족 단위 팀의 매력이 적지 않구나!" 하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어떤 중요한 유익이 있었나?
첫째, 사역을 했던 세 곳의 교회 모두 자신들에게 맞는 유익을 누렸다. 예를들면, 시부야 교회의 경우, 45년만의 첫 외국 단기선교팀을 맞아들여서, 교회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전도와 말씀의 유익을 얻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담당하고 계신 선교사님이 큰 힘을 얻으셨다.

둘째, 단기팀에 동참해서 오신 김대영목사님의 강의는 선교사들의 영성을 새롭게 해 주었다. 목사님은 중국 선교사 6년, 성경 통독 1000번 이라는 이력이 말씀해주듯 말씀에 큰 도전을 주었다. 나 개인적으로도 말씀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 또한 중국인 사역에 적용할 수 있는 "통독"이라는 중요한 도구를 얻게 되었다.

셋째, 새로운 도전을 해보면서 지역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단기팀을 데리고, 처음으로 후지산 중턱까지 가복, 이런 저런 기도가 필요한 지역들을 방문했다. 그러면서 그 동안 동경에 1년을 살았지만, 잘 몰랐던 동경을 더 알게 되었다. 특히, 후지산 순복음 교회에서 숙박을 하면서 했던 집회와 후지산 기도회를 통해서, 앞으로 형제, 자매들을 데리고 가서 수양회를 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를 알게 되었다. 영적인 토대도 쌓여있고, 저렴하고, 편안한 장소를 알게 된 것이다.  

동경으로 사역지를 옮긴 뒤, 처음 받아서 동역했던 단기 팀 사역이 잘 마무리되어서 감사할 뿐이다. 그야말로 "감사! 감사! 감사"다.










 

2010년 8월 4일 수요일

사람을 사랑함-목양(1) 잠27:23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다.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이외에 인간 존재 근본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격려를 격발시키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롬5:5) 사랑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21:15-17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부활이 증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것, 그들을 목양하는 것이다.

왜 목양일까? 왜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섬겨야하는가?
거기에 삶의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인생의 진미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을 더욱 더 사랑하고, 더욱 더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목양를 하다보면, 가족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에 눈이 떠간다. 타인에게 관심 갖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애쓰게 되고, 결국에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 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그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부지부식간에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랑으로 범벅되어 살다가 사랑에 물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목양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절대 전임 사역자들에게만 떠 넘길 수 없는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특권인 것이다.

목양이란 무엇일까?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잠언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잠언27:23에 의한 목양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첫째: 내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내가 알게 되고, 관계 맺게 되고, 마음을 주신 그 양무리의 형편을 살펴야 한다. 양떼는 형편을 살펴 주어야만 잘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다. 목자의 도움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동물이다. 목자가 어떤 사람이냐? 가 양떼의 생명, 복지를 좌우한다. 그래서 선한목자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나는 선한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예수님은 목숨을 희생한 선한 목자였다. 양떼된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예수님은 목숨을 우리에게 주기로 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것 외에는 정말 방법이 없는 그런 양무리이기 때문이다. 중국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 구절을 번역했다. "你要详细知道你羊群的景况,留心料理你的牛群"。详细知道 상세하게, 자세하게 자기 양무리들의 처한 상황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상세히 알아야한다고 해서, 스토커처럼 의심, 불신, 강요로 알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기초한 긍휼이 넘치는 관심을 말한다. 그야말로 사랑으로 그 양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가 필요한 것, 힘들어하는 것, 기뻐하는 것, 살아가는 것...... 이런 것들을 알아 가는 것이다.  

양떼의 형편을 잘 살피려면, 관심이 그들에게 있어야 한다. 무관심이라는 장벽을 뚫어야 한다. 관심을 갖는 것이 버겨운 시대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관심하도록 교육 받았고, 자라났고, 훈련되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심을 갖지 않는 시대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무관심으로 일어나는 수 많은 사건과 사고를 볼 수 있다. 조금만 관심이 있었어도, 애정과 긍휼로 귀를 조금만 기울였어도 죽지 않을 생명들이 사라져 간다.

나에게 무관심 타파는 참으로 쉽지 않다. 타고난 무관심(?)의 본성을 가진 나로서는 남에게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버겹다. 관심을 가질 때, 오는 정신적 부담감, 심적 무게감, 긴장감이 너무 크다. 이 점은 아내와 매우 대조적이다. 아내는 타고난 관심의 본성을 가졌다. 사람들의 형편, 그들의 고통, 아픔에 자신을 자주 오버랩 시키기까지 한다. 반면,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삶을 나누는 것이 참 쉽지 않다. 그것이 내가 잘 해야할 목회자의 일임에도 그렇다. 심할때는 모임을 하려고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한 동안은 내가 목회가 아닌 다른 사역을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심각하게 고려했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주님을 알아가면서 이런 어려운 점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관심을 가지려면, 두가지를 해야하는 것 같다.

첫째는 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다. 한 식탁에서 밥을 먹으면서, 천천히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듣는 것이다. 그의 지금과 부딪친 일들과 사건, 사고, 문제들을 듣는 것이다. 삶의 희,노,애,락을 귀로 듣는 것이다. 얼굴을 보고 밥을 먹으며, 얘기를 들으면 관심이 생긴다. 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얘기하다보면, 그와 나의 개인적인 관계가 생긴다. 그가 내 밥을 같이 먹는 식구(食口)가 되는 것이다. 가족으로서의 관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두번째는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나눈 사람을 마음에 품고, 그의 삶의 얘기들을 떠 올리며 기도하면 그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전에 안보이던 것이 보인다. 그 전에 안 생기던 감정이 생긴다. 긍휼, 사랑, 연민 그런 것 말이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계신 영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그리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무관심"이라는 내 본성이 조금씩 변화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내게 절대 책임이 있는 가족이 생기고 나서 부터는 더욱 그렇다. 아내와 아이들, 늘 나의 무관심을 돌파해 주는 지원군들이다. 목회와 가정이 나를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모임에 대한 스트레스는 급속히 줄었다. 왜냐하면, 두 세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형제 자매들 안에 계신 영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대감과 신뢰감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목회와 가정의 두 날개를 가진 나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둘째, 네 소떼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목자는 양무리(소떼)에게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게 목자의 본분이다. 그 무엇보다, 그 어떤 일보다 거기에 마음의 우선순위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 마음을 두고 그들을 바라보고, 마음을 두고 그들과 대화하고, 마음을 두고 섬겨야 한다. 그것이 선한 목자의 자세다.

요즘 나는 "장기려 그 사람"이라는 책을 읽는다. 장기려 박사의 전기다. 그 어떤 환자든 예수님이 보내주신 양으로 보는 그의 삶이 은혜롭다. 예수님이 보내주신 양무리, 그들에게 내 마음을 두는 것이다. 마음을 뺏기는 것이다. 그것이 목양이다. 나는 어디에 마음을 잘 두는가? 참 한심하고, 가련하고, 부끄럽다. 마음 있는 곳에 보물이 있는데 말이다. 양무리로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는 오늘을 살기를 기도한다.

아래그림: 선한목자를 그린 카타쿰의 벽화, 그리고 그림들


2010년 8월 3일 화요일

103세 동포 할머님 심방

지난 7월20일에 올해 103세가 되신 재일동포 김00 할머님을 심방할 기회가 있었다. 우연치 않게 알게 된 한 권사님의 부탁으로 할머님이 머물고 계신 병원으로 심방을 갔다. 할머님은 오래전 길에서 넘어져 정신을 잃으신 뒤 기운을 못차리시고 병원에서 누워 지금까지 지내고 계셨다.

우리가 심방을 갔을 때, 할머님은 여전히 눈을 감고 누어계셨다. 옆에서 할머님의 손을 꼭 잡았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맞고 서 있던 나무처럼, 바짝 마른 손으로 온기가 느껴졌다. "참 거칠고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셨구나!"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시편 23편을 읽어드렸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리고 할머님의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시고 평안 가운데 있으실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리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돌아왔다. 할머님의 얼굴이 맘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때부터 매일 이 할머님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면서 권사님으로부터 김 할머님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들을 수 있었다. 한국, 중국을 거쳐 일본에 들어오셔 오래 사셨고, 그전에는 건강하셔서 교회에도 잘 오시고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호의를 베푸셨던 분이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다리에 기운이 없어지고, 혼자서 교회에 갈 수 없게 되었고, 그러면서 사람들사이에서 점점 잊혀진 존재가 되셨다는 것이다. 그런 분을 권사님이 특별한 긍휼함이 있어서 찾아가 뵙곤 했던 것이다. 그나마 길에서 쓰러지시기 전까지는 집에서 계시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조금 기운을 차리시곤 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시고는 그냥 그대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계셨던 것이다. 가족들이 있긴 하지만, 자녀들이 신앙이 없고, 일본사회의 특징이 가족 연대감이 약하니, 가족들이 가까운 이웃보다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권사님과의 얘기의 주제는 일본 땅에서 오랜 세월 살고 계신 재일동포 그리스도인 노인에 대한 얘기로 자연스럽게 확대되었다. 권사님에 의하면, 김 할머님 같은 연로하신 그리스인들이 많은데, 많은 분들이 이국 땅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노년들을 보내고 계시다는 것이다. 한번은 어떤 할머님을 찾아 뵙고 집에서 찬송가를 불러드렸는데, 그렇게 하염 없이 우셨다는 것이다. 할머님이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찬송이어서 크게 감동하셨다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 찬송도 부르고 싶고, 말씀도 듣고 싶은데, 혼자 힘으로 갈 수 없고, 데려다 줄 사람도 없고, 가까운데 교회도 없고, 그래서 그냥 집에 있게 되고, 그러다보니 사람들과의 교제도 사라지고, 성경 읽을 힘도, 찬양할 힘도 잃어가고, 결국에는 모두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어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가장 힘든 근세기의 역사를 살아오신 분들, 일제 식민지, 해방, 한국전쟁...... 그 험난한 세월을 견디어 오고, 예수님을 믿어 천국백성이 되었고, 장수의 축복도 누렸는데, 노년이 너무 외롭고 서글프다. 아무도 찾아 오는 이 없이 사라지고 잊혀지는 노년. 도대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쓸쓸한 노년의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먼저는 이분들이 살고 있는 땅이 한국이 아니어서 더욱 그런 것 같다. 한국같으면 가까운 교회에도 갈 수 있고, 교회 차량이 와서 모시고 갈 수 있고, 노인대학도 있고......그런데 일본에는 그런 것이 없다. 교회, 그것도 한인 교회를 찾아간다는 것은 도시에서도 산 넘고, 물 건너 가야하는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가난한 노인은 임대료가 싼 교회가 드문 지역으로 밀려나 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분들을 돌아보기에는 다들 너무 바쁘다. 교회든 개인이든 여유가 없다. 일본에서 다들 생존 자체를 위해서 바둥바둥 거려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다리에 힘이 없어져 교회에 못 오는 노인들을 모실 힘이 없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2세에 대한 신앙교육의 실패다. 이분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이 자녀들을 신앙으로 키우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신앙적으로 잘 키운 분들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그렇지 못했다. 자녀들이 신앙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한 교회에 갈 수 있는데, 그들이 신앙이 없으니 주일에 부모를 모시고 예배드릴 생각을 안한다. 그것이 가장 좋은 효도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노년은 온다. 장수한다는 것 자체는 축복이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오는 노년에 축복을 축복답게 누리려면, 쉽지 않은 숙제들이 놓여져 있는 것 같다.








 

2010년 7월 31일 토요일

오랜만에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

그제 세번째 목요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에서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 왔다. 대만에서 온 쪼우(周)자매가 모임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다.

목요모임이라 함은 목요일에 우리집에서 모이는 모임을 말한다. 간단하지만 정성껏 준비한 식사, 마음을 여는 게임, 찬양과 간증, 포커스 있는 말씀공부 혹은 복음 선포, 그리고 기도의 시간 등으로 이루어지는 모임이다. 새롭게 시작해서 얼마 안되었지만 모임을 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임이라는 확신을 얻어 가는 중이다.

7월29일 모임에 쪼우(周)자매(대만인)가 두번째로 참석했다. 쪼우자매가 오게된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를 파송한 한국의 예수마을교회의 한 자매(이예은 자매)가 3주전에 이곳에 유학을 왔다. 예은 자매는 중국어가 안되어서 우리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여러 면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즐거운 교제를 나누고 있다. 목요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해서, 게임도 인도하고(일본어로), 우리 아이들도 돌보아 주고, 정말 큰 도움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데,  쪼우 자매는 예은자매의 아래층에 살고 있었다. 예은자매가 평소에 가까이 교제하다가 중국인 모임이 있는데 하면서 초청했는데, 흔쾌히 모임에 참석한 것이다. 첫번째 왔을 때, 쪼우자매는 마음을 많이 열고, 교제하고, 복음을 접했다. 나는 그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간단하지만 구원에 관한 확실한 얘기를 전했다. 그리고 한 주 후에 자매는 다시 목요일 모임에 왔다. 이번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마음이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자매에게 분명하게 복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쪼우자매에게 바로 당신을 위해서 죽으신, 이 예수님을 구주요,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겠냐? 고 도전했다. 자매는 진지하게 그렇지만 아주 기꺼이 예수님을 구주요 주인으로 영접하겠다고 고백했다. 아멘!!  영접하는 기도를 함께 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영혼구원의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자매는 이렇게 고백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낄수 있다고 했다. 일본에 온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온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풀어 놓은 그의 이야기 주머니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감동과 은혜를 주었다.

쪼우자매의 구원과정을 섬기면서 몇 가지 느끼고 배운바가 있다.

첫째, 구원의 일은 역시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때가 차면 그 영혼을 하나님이 친히 추수하신다는 것이다.
쪼우자매는 교회는 안다녔지만, 중학교 때부터 미션스쿨에 다니면서 기독교에 대해서 낯설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와 있으면서, 직장을을 많은 외로움과 고독, 실패를 경험하면서 마음이 가난해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 친절한 이웃(예은자매)을 만나서 마음이 많이 열려 있고, 어느정도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긍정적인 마음이 예비되어 있었다. 우리를 만나기전 하나님이 여러사람을 통해서 씨를 뿌리시고, 햇빛을 주시고, 물을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됨에 중국인 교회에 보내사 복음을 듣고 반응하게 하신 것이었다.

둘째, 하나님의 우리가 함께 일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쪼우자매가 우리 모임에 오는 데에 쓰임받은 사람은 중국어를 전혀 못하는 갓 일본에 온 한국자매였다. 그리고 그가 두번째 모임에 온 날, 그 외에도 처음 온 한국자매가 또 한명 있었다.(그는 바로 옆 한인교회 청년인데) 그 자매는  중국어를 잘 하는데, 최근 대만에서 교환 유학생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목요모임에서 그 한국자매가 외국 유학생활의 고충과 사랑에 대해서 간증을 해주었는데, 그 간증이 쪼우자매에 깊이 와 닿았던 것 같다. 특히, 간증한 자매는 마침 쪼우자매가 졸업한 대학에서 교환학생 공부를 했었다. 그래서 쪼우자매가 더욱 반갑게 의미있게 간증을 들었던 것 같다.  우리부부도 최근, 단 한번 만나는 사람이라도, 그 한번의 만남에서라도 복음을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도록 확실히 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는데, 쪼우자매가 모임에 온 것이었다. 이번 쪼우 자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모양의 사람들을 두루두루 사용해주셨다. 한인교회 청년, 파송교회 청년, 우리...... 참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멋진 하모니를 이루는 웅장한 교황곡 같다!

셋째, 쪼우자매를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쪼우자매의 구원역사를 보면서, 나는 다음의 점들을 배웠고 마음에 새겼다.
  •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시고 예비하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추수꾼을 기다리는 익은 곡식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익은 곡식은 앉아서 기다리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고, 안테나를 높이 올리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두드리는 자에게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추의 은혜를 주신다.
  •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생명의 복음을, 필사의 각오로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신자가 단 한번 듣더라도, 스스로 인지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판단하고 받아 들일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복음이 다윗의 물맷돌 처럼 내 몸과 마음, 입술에 착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 늘 열려 있는 태도로, 함께 이루어나가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할수 있으면, 우리만을 써서 영혼을 구원하려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구원역사를 공동체적으로 하시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한 지체를 이루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공동체적으로 경험하고, 그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 하나님께 붙들려 쓰임받으려면, 우리가 바다처럼 되어야 한다. 바다는 그 이름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물고기도 받아들인다. 모든 것에 열려 있고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다. 열림과 겸손이다.  


                       왼쪽사진: 중간이 쪼우 자매, 오른쪽은 쪼우자매를 전도해온 이예은자매



2010년 7월 24일 토요일

교회 공동체 세우기- 골짜기 행진중

교회 개척을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났다. 개척이 진행중이다. 산행에 교회개척을 비유한다면 어디 쯤에 와 있는 것일까? 아마도, 골짜기를 힘겹게 지나고 있는 듯하다. 뭐 특별히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도 없고, 그렇다고 산중턱에 오른 시원함도 안보이고, 봉우리를 정하고 오르려니 갈길이 멀어 보인다.

시작하고나서 지난 반년의 시간 동안, 이벤트에 왔다 간 사람, 주일 예배에 왔던 사람들을 합하면, 한 40여명이 왔다가 간 것 같다. 그중에서 예배에 꾸준히 오는 사람이 우리 가족 빼고, 8명 정도였는데, 그중 한 명이 개인사정으로 중국으로 귀국해 버렸고, 그 중에서 최근 2명 정도가 몇 주째 예배에 결석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를 포함해 10명 정도로 3개월 정도를 지나니, 여러 우리 마음 속에 여러생각들이 드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최근 한, 두명이 새로와서 새롭게 우리 마음에 불씨를 지피고 있다.

처음부터, 그것도 복음을 처음 듣는 사람들과 교회 개척을 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이다. 선입관이 없고, 백지처럼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반면, 어려운 점은 교회에 대한 기본 개념조차 없으니, 안정적인 출석, 신실한 성장을 보장하기는 어렵다. 기복이 심하다.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  

한 반년을 지나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몇 가지가 발견되는데,

첫째는 생각보다 인원이 속도면에서는 느리게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숫자를 얘기하는 것이 내게는 꽤 세속적인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숫자가 어느 정도 정상적인 성장을 하지 않을 경우, 개척자의 힘을 매우 많이 빠지게 하고, 의욕을 감소시킨다는 것이다. 숫자로 평가하지는 않지만, 정상적인 성장이 이루어지 않을 경우, 우리로서는 심각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삼는 일을 위해서 이곳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 와 있는데, 그 일이 속도가 붙지 않으면 답답할 수밖에 없다. 선교사의 존재자체가 삶 자체가 선교라는 분들도 있는데, 특히 서양선교사님들이 자주 그런 말을 하시는데, 인정할 만한 존재로서의 선교도 있지만, 조금도 추가해야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사역자는 달란트를 받은 일꾼의 비유로 자신과 사역을 비추어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비유를 근거로 볼 때, 판단의 주체는 주님이시고, 판단의 기준은 충성이다. 내가 최근의 느린 속도를 계기로 묻고 싶은 자신에 대한 질문도 이것이다. "너는 주인되신 그 분 앞에서, 충성하고 있는가?"

우리 맘 같아서는 오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 잘 자리잡고, 안정적으로 참석해서 자라나며, 제자들이 되어주기를 바라는데, 그게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시간을 요구한다. 넘어질 것 다 넘어져야 하고, 기어야할 것 다 기어야 하고, 겪어야할 홍역 다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삿포로에서 사역을 할때는 숫자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형제, 자매들이 이미 안정되어 있었고, 생각보다도 숫자가 빨리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경에서는 전도가 거의 나와 아내 손에 달려 있다보니, 시공의 제한을 받고, 속도가 제대로 붙지 않고 있다. 어떻게 이 부분을 해결해 나갈 것인가? 최근 부딪친 숙제다. 조급해하지 않으면서도, 15만에 이루는 동경중국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듣게 할 것인가? 어떻게 그들을 접촉하고, 복음을 선포할 것인가? 더 열심을 내고 길을 낼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으로,현재로서는 '목요모임'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주일예배에 올수 없는 사람들에게 모임의 기회를 주고, 주중 초청전도의 기회를 갖고, 기존의 형제, 자매들을 더 깊이 케어하기 위해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식사하고 대화하고  게임도 하고 선물도 주고,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면서 사람들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포인트 있는 성경공부 혹은 복음선포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성경공부가 우리를 성장케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나눔과 나눔과 기도 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경험하는 것이 더 강력하게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한다. 우리 믿는 모든 이들 속에 임재해계신 성령님이, 그분의 말씀대로 두, 세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이면 반드시 우리에게 그분의 실제로 말씀하신다. 그런 경험을 하도록, 사람들을 모으고, 환경을 예비하고, 그들을 섬겨야 한다.

이렇게 시작한 '목요모임'은 현재 순항중이다. 어떤 날은 한명, 두명이 와서 힘빠진 맘도 들기도 하지만, 같이 나누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둘째는, 동경의 비싼 물가다. 안식년 이후, 동경으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몇 가지 재정 수입과 지출에 변화가 생겼다. 지출이 늘었다. 사실 우리개인과 가정을 위한 지출은 삿포로보다 훨씬 줄었다. 거의 지출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전체 지출은 늘었다. 이유는 비싼 집세 때문이다.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동경의 집세가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거기에 수입은 줄었다. 수입 감소의 결정적인 원인은 환율변동 때문이다. 삿포로 시절 한때, 1엔당 700원 했던 적도 있는데, 지금은 1엔당 1300-1400원에 육박한다. 거의 배로 뛰었다. 즉, 한국에서 보내는 송금이 절반 정도로 줄어든 셈이 된 것이다. 그래서 송금 받아 엔화로 돈을 찾으면 정말 속이 상한다. 매번 이런 상황을 겪으면 이런 겨우겨우 지탱하는 재정상태로 동경에 자리잡고 사역하는 것에 대한 일시적인 회의감도 들 때가 있었다. 또 이런 상황은 종종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그렇지만, 지나보면 다 은혜로 걸어 왔다고 고백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잘 곳을 주시고, 모든 것을 주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

이런 가운데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여러 가지로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그런 증거들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곳에 있어야할 부르심에 대해서는 흔들림이 없다. 우리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 삼는 것이다. 더욱 충성스럽게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기를 기도한다.

                                                             목요모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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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3일 금요일

내안의 "옛 자아"가 죽는 네가지 방법!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에서 언급한 우리 자아의 죽음은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결국 우리의 문제는 죄의 문제이고, 죄의 문제는 내 안에 내가 살아있는 문제라는 것을 절감한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생활에서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주 그럴싸하고 교묘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여간 분간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볼 필요도 없고, 그동안 내가 행한 생각, 이에 따른 언행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하튼, 내가 철저히 십자가에 못 박혀 완전히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실제 생활에 필요한 행동 지침이 있다. 나는 최근, 휴스톤 침례교회의 최영기 목사님의 강의를 시디로 듣다가  자아의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실제 행동 지침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초를 얻었다. 그리고 그 단초에 기초해서 몇 가지 내 나름의 생각을 추가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완벽한 과거 완성의 사건이 내 삶에 구현되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힘있게 행하시려면, 다음과 같은 원칙을 갖고 살아야 한다.

첫째, "기분 나쁘다" 라는 생각, 기분을 갖지 말고, 거기에 영향받은 언행을 하지 말자!
여하튼, 내 기분이 나쁜 것이 문제다. 기분이 나쁠 일들이 적지 않는데, 기분 나쁘다는 판단이 서면, 그로 인해 각종 악이 자라나게 된다. 억울함, 미움, 분노, 적개심, 불공정...... 각종 더러운 것이 안에서 자라고 나오게 된다. 기분 나쁜일들이 없을 수 없지만, 갈2:20절을 기초로 볼 때, 기분 나빠하는 자체가 큰 문제다. 왜냐하면,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었으면 기분이 나쁠수가 없다. 어떤 얘기를 듣던, 내가 죽어 있다면, 그렇게 민감해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죽지 않고 살아서 기분 나빠하는 나의 옛 자아다. 이제 기분 나빠하는 나는 죽었다. 이제 그 어떤 가운데서도 "기분 나쁘다"라는 기분, 생각, 감정이 나의 마음, 행동을 지배하지 않토록 힘을 다해 싸우겠다.

둘째, "무시 당했다"는 생각, 기분을 갖지 말고, 거기에 영향받은 언행을 하지 말자! 
말이나 행동으로, 혹은 절차나 도리로 나를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면, 별일이 다 일어난다. 사회에서는 각종 폭력과 살인의 주 원인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서 발원한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하는 많은 것들이 무시당했다는 기분, 생각이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또 거기서 각종 악이 자라난다. 큰 문제다. 왜냐하면, "무시 당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나의 옛 자아가 죽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다. 내 옛자아가 죽었다면 어떻게 "무시 당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의 노리개가 되어서는 안된다. 혹 무시 당할수 있는데, 나는 죽었음으로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수 많은 오해와 서로 원수됨의 죄악을 면할 수 있다.

셋째,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 자기 편리주의"를 극히 경계하자!
인간의 자기 중심적 생각, 자기 편리주의적 발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 민족, 한 개인을 묵사발 만드는 식민지배나, 폭행을 저지르고도, 피해 받은 사람들을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이 지극히 자기 중심주의적이고, 자기 편리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성, 객관성, 상대방을 고려하는 이타심이 없다. 그냥 자기 편한대로 생각하고 믿는다.

나는 이런 동일한 위험이 우리와 같은 목사, 선교사들에게 더 쉽게 더 많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예를 종종 본다. 그런 예를 살펴보면, 그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은 객관적 기준, 특히 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사랑, 구원, 성결......등이 아니고,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편리적인 발상들이다. 자기가 범죄하고 있으면서도, 그 범죄의 상황도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자기 편리주의적인 해석을 한다. 그야말로 영혼이 혼미해진 것이다. 자기가 죽었다면, 자기를 위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그 누구도 이용하려하지 말자, 도리어 이용 당하자!"
아무리 좋은 말로, 미사어구를 동원하더라도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이 아니면 행해서는 안된다. 옛 자아는 아주 영악해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속인다. 그 흔한 속임수 중에 하나는 타인을 이용하려는 파렴치한 행동이다. 물론 아주 잘 포장되어 있어서 그렇게 파렴치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두번 세번 생각해보면, 기도해보면 알 수 있다. 이 생각, 이 행동이 나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를 이용해서 더 풍성한 생명을 얻으려는 것인지 말이다. 죽지 않은 옛자아의 특징은 이기심이다. 이기심이 발동한 생각, 행동을 통해 사람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목회자인 내가 극히 경계해야할 것은 양무리를, 교인들을 이용하려는 생각이다. 그들의 덕을 보려는 작은 언행들도 경계해야 한다. 양무리가 피와 땀을 나를 위해 흘리게 해서는 안된다.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만 그들의 희생이 가치있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이용당하는 것이 낫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그야말로 바보같은 행동이다. 그렇지만 다 내주고, 내 버리신 그 분처럼 말이다.
 
갈2:20의 말씀이 내 삶속에 더욱 힘차게 구현되려면, 그리고 내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심이 확실해지려면, 나는 나를 침투해 들어오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 자기 편리주의를 극히 경계하고 극복해야 한다.










 
 
 

2010년 7월 19일 월요일

하반기 설교에 대한 구상

상반기에 설교는 
예수님에 관한 설교였다. 당연히, 복음서였지요! 복음서중에서 요한복음을 1장에서 21장까지 설교했다. 회중이 대부분 처음 교회의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그분의 놀라운 사람, 섬김, 희생, 죽음, 부활, 기적, 말씀.......을 함께 나누는 시간은 복된 시간이었다.

안식년을 지나면서, 제가 설교하는 스타일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너무 세세히 쪼개고 분석해서, 깊이 나가는 것을 지양하고, 할 수 있으면 넓게 보고, 복음서의 큰 흐름 속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살펴보는 것이었다. 좀 더 평범해지고, 심플해졌다고 자평한다.

이를 통해서 얻게된 좋은 점은 설교에서 성경을 통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너무 길지않은 시간에 요한복음 전체를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금년도 하반기 설교는 이렇게 하고자 한다.

먼저는, 성경을 통전적으로 보면서, 핵심을 다루는 통전적 접근을 유지하려 한다.

둘째는, 심플한 접근하고, 심플한 해석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성경자체가 가지고 있는 통전적 메세지가, 지협적 파헤침보다 더 크게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소망한다.

셋째는, 구약(창세기12장부터) 성경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우려고 한다. 그러면서, 매월 마지막 주에는, 요한복음에서 기록하지 않은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에 나타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우려고 한다.  

이런 접근을 시도하는 가운데, 몇 가지 극복해야할 과제도 있다.

첫째, 성령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도행전, 서신서에 나타나신 위대한 성령님의 사역들을 통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알려야 한다. 그리고 이보다 더 노력해야할 부분은, 성령님을 기도와 삶 가운데 체험하며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설교를 주로 창세기와 복음서를 다루면서 이 성령님의 부분을 놓치지 않고 잘 안고가는 것이 숙제다.

둘째, 중국어의 진보다. 하반기 설교도 계속해서 중국어로 진행된다. 현재 중국어 설교 5년차다(안식년 1년 제외하면). 목회사역의 특성상, 매주 설교를 해야 한다. 이 덕에 중국어로 설교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발음도 안식년 기간동안의 북경연수(?)를 통해서 좀 더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어 전체의 수준향상의 문제에 걸려 있다. 좀 더 높은 수준의 중국어로 표현되어지는 설교, 중국인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터치할 수 있는 언어구사력이 절실한 습득 과제다. 이를 위해서 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어를 수준 있게 구사하면서도, 회중에 터치하는 힘이 있는 중국인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 익히는 것이다. 이는 전에도 시도해 본 적이 있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별로 진전이 안보이는 투자다. 그렇지만 꾸준히 장기적으로 해 나갈 경우, 나의 중국어 설교 수준의 근본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2010년 7월 15일 목요일

잊혀지지 않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몇 가지

## 에피소드 1

선교지인 일본에서 지내다가 한국에 잠시 귀국할 일이 생겼다. 오랜만에 접하는 한국이었다. 오랜만에 가족들, 친척들을 만났다. 하루는, 누님과 조카들이 와서 즐겁게 만나고,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마침 집에 동생 차가 있어서, 오랜만이긴 하지만, 면허증도 있고, 일본에서도 계속 운전하던 터라, 차로 역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간만의 한국에서의 운전이고 해서 긴장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집을 나섰다.

도로로 잘 진입해서 사거리를 지나는데 저 앞에 경찰차가 서 있고, 교통경찰들이 도로를 점하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가서 보니, 음주운전 여부를 측정하는 음주단속이었다. 앞의 차들이 지나가고 점점 내 순서가 다가오는데, 순간 음주단속에는 어떻게 응하나? 하는 당혹스러운 문제가 생겼다. 일본에서 운전할 때, 내가 살던 곳에서는, 한번도 음주단속을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음주단속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잊어버렸다.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하더라?? 기억이 안난다. 마침내 내 차가 단속경찰 옆에 섰다. 긴장된 마음으로, 차창을 내렸다. 단속경관은 인사를 하고서는, 단속용 측정기를 내 입 가까이 들이민다. "아 이럴 때 어떻게 하더라? 생각이 안난다". 생각이 안나면, 습관대로 나간다.

일본에서 "일본에서는 뭐든지 세게하면 안된다"는 훈련을 생활에서 단단히 받고 있던 때라, 그 생각이 내 생각과 행동을 지배했다. 일본에 있으면서 형성된 내 습관은, 무엇을 하든지 할 수 있으면, 할 수 있으면 부드럽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아 --" 하고 최대한 부드럽게 불었다. 그러자 바로 짜증섞인 단속경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우 -- 하고 쎄게 부세요!" . "네" 하고 다시 "후--"하고 쎄게 불었다. 경관 말을 들으니 생각났다. "하--가 아니고, 후--였지". 뒤에서 누님과 조카들이 웃고 난리가 났다.


## 에피소드 2

사역지에 부임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세례를 베풀기회가 주어졌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장로교 목사지만, 내가 부임해서 사역하고 있는 교회는, 침례교의 영향으로 세워지고, 그 문화를 가지고 있는 국제단체의 교회였다. 그래서 세례는 꼭 침례로 행했다. 교회 일층에 침례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경험이 없는 터라, 담임목사님으로(이분은 전체 교회와 일본인 사역을 책임지고 계셨고, 나는 중국어 예배를 섬기고 있었다) 수고하고 계신 선배선교사님으로부터 단단히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사전에 무엇을 준비해야하는지? 복장은 어떠해야하는지? 실제적으로 세례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물 속에 잠기게 하고, 일어서게 해야하는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거의 맨 마지막에, 이런 조언이 있었다. "박선교사님! 그리고 내일 우리도 하얀 색 바지와 와이셔츠를 입고, 침례탕으로 들어가니, 할 수 있으면 속옷은 색깔있는 것들은 피하고, 하얀색으로 입으세요! 다 비칠수 있으니까?". "예 잘 알겠습니다". 긴장을 늦출수 없는 일본교회라(참고로, 우리는 일본교회안의 중국어 예배였다), 배운 것을 다시 생각하고 준비했다. 물론 가르침 받은대로 나는 위아래 하얀 속 옷을 입었다.  

세례일이 되었다. 주일 예배후에 세례는 세례실에에 은혜롭게 진행되었다. 하나 하나 잘 마무리 되었다. 처음 섬겨보는 세례라, 담임목사님이신 선배님이 직접 세례탕에서 인도도 하시고, 도우시고 했다. 무사히 잘 마치고, 회중들이 앉아 있는 홀과 통하는 세례실 창문을 닫고(이 창문을 통해서 회중은 침례상황을 지켜 본다), 선배님이 먼저 나가시고, 그 뒤를 이어 내가 나갔다. 세례통(작은 목욕탕의 욕조처럼 넓고 깊어 계단으로 진입하고 나가게 되어 있다)의 계단으로 밖으로 나오는데, 아! 선배님의 하얀 젖은 집례복 속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 땡땡이 무늬 속옷......"r그토록 주의를 주셨던 선배님께서 땡땡이를 입으셨다니...."하하하! 이래서 땡땡이는 안되는 구나!".  그 날의 땡땡이 잊혀지지 않는다.


## 에피소드 3

이 일은 내가 겪은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직접들은 것이다. 지금은 20여년 가까이 사역한 선임 선교사의 이야기다. 그는 미국출신으로 현재는 한 국제기관의 한 지역을 책임 지는 베테랑 선교사가 되었다. 그가 갖 일본에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처음에 일본에 와서, 모르는 것이 많으니, 선임선교사가 사역하는 교회에 임명되 이런 저런 일을 도우면서 일본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성찬주일이었다. 선배 선교사는 성찬주일을 준비하며, 이 신임 선교사가 일본어도 잘 못하고, 특별히 시킬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성찬용 빵을 사오라고 시켰다. 신임 선교사는 빵집에 가서 적절한 빵을 골라서 사왔다.

성찬주일이 되었다. 선임선교사는 성찬식을 진행했다. 엄숙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은혜롭게 말이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명하고, 선임 선교사는 예수님의 몸인 빵을 사람들 앞에서 높이 들고,  " 예수님은 이렇게 몸을
찢기셨습니다" 하고 빵을 뜯었다. 아 불싸! 빵이 맨빵이 아니라, 쨈 빵이었다. 쨈이 터지고, 흐르고..... 신임 선교사는 몸둘 바를 모르고, 선임선교사는 수습하느라 바쁘고, 그렇게 그렇게 은혜로운 성찬식은 끝났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그 주인공 신임선교사는 이제 책임자가 되어서 그때의 일을 즐거이 사람들에게 얘기한다.  

 




2010년 7월 10일 토요일

유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찾기 전쟁

일본의 경기가 벌써 십수년째 지속적으로 나빠지면서 사람들이 생활이 많이 어려워졌다. 정말 일본 경제상황이 좋지 않다. 그중에 가장 피부로 느껴지는 어려움은 학생들의 아르바이트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듣기로는 불과 5,6년전의 동경은 원하면 얼마든지 할만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홋카이도에 있었는데, 홋카이도의 중국학생들은 다들 언어학교만 졸업하면, 동경 등 대도시로 가려고 했다. 거기에 가면 일할 기회가 있으니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안그렇다. 동경에도 일자리가 없다. 더욱이, 일본말이 쉽지 않은  외국학생이 아르바이트 자리 찾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어 학교에서 유학생들을 만나보면, 일본에 온지 3달이 지나도 아르바이트를 못 얻은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심지어 반년, 9개월이 되도록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지 못해 힘들어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일본에서 외국학생에게 아르바이트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중국같이 일본과 경제 격차가 심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의 경우, 국비가 아닌 이상, 대부분 생활비, 더 나아가 학비까지도 자신의 아르바이트로 벌어야 하는데,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게 되면, 유학생활을 해나갈 수 없고, 가까이는 생계 자체를 위협 당한다.  

그래서 나도 그런 학생들을 자주 만나다보니, 아르바이트에 관련된 문의를 많이 받게 된다. 전에 상점에서 알게되 명함을 주었던 한 학생은, 내게 전화를 해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좀 찾아 줄 수 있는지 적극적으로 문의를 해오기도 했다. 어떤 학생은 아르바이트를 찾다 찾다 겨우 찾은 곳이, 하루 4시간 정도 하는 아르바이트인데, 오고가는 시간만 3시간이다. 차비도 주지 않고, 그럼에도 갔다. 현재 상황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기회가 온게 호사다. 다른 한 학생은 겨우 괜찮은 아르바이트를 찾았는데, 아는 사람에게 한달치 아르바이트 수입을 소개비로 주고 얻었단다. 그야말로 아르바이트 자리 찾기 전쟁이다.  

엊그제는 우리교회에 나온지 한달쯤 지난 한 자매가 전화가 왔다. 이미 중국에서 예수님을 믿고, 세례도 받은 신실한 자매다. 울면서 아내에게 현재 당한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일본에 온지 세달이 지났는데, 아직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해 생계자체가 위협당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아르바이트자리 찾기가 어려울지 일본에 오기전에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는 긴급한 도움이 필요했다.

현재, 우리가 섬기는 주대상은 일본에 온지 1년 미만의 일본어 학교 학생들이 주류다. 이들의 현실적인 필요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다. 이 점이 내게 주어진 새로운 기도제목이요 숙제다. 이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도와줄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그저 일자리 소개와 도움으로 끝나지 않고, 영혼을 돕는 목자로 설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0년 7월 1일 목요일

개척 6개월의 ing

닛포리 화인(중국인) 교회가 개척된지 6개월이 되었다.
지난 1월10일에 첫 예배를 드리고, 꾸준히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로. 반년 정도가 지났다.
이 시점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그동안의 일들을 간단히 정리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섬길 것인지 생각해 본다.

먼저 지난 반년의 시간을 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을,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내주셨다. 지난 기간동안 우리 닛포리 중국인 교회에 왔던 사람은 대략하면 35명에서 40여명 정도가 된다. 그중에 매주 예배드리고 말씀을 배우는 자리잡은 사람이 8명이다. 그중 한명이 지난주 개인사정으로 귀국했다. 따라서 7명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영적인 소원이 있고, 웬만하면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인데, 예수님을 알아온지 반년정도 되었다. 대부분이 일본에 온지 1년쯤 되는 일본어 학교 학생들이다. 앞으로 대학,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할 예정이다.

# 신실하게 나오는 7명중, 3명은 이미 세례받은 이들이고, 나머지 4명은 현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더욱 구체적으로 진리를 알아가는 중이다. 이들 가운데 영적인 변화가 있고, 소원도 있고, 소망도 보인다.

# 이들을 섬기는 일은, 늘 식사를 섬기면서 시작된다. 처음 초청한 것도 만두파티이었고, 주일 준비도 식사준비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모두가 처음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인데, 식사 외에는 이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별로 없다.

# 이들은 대부분 아내와 내가 다니던 일본어 학교에서 알게되고 전도해서 오게 되었다. 멀리가 아닌 바로 옆자리의 친구들을 초청하게 된 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이 있었다.

# 동경 사역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주장사 루디아 같은 분들을 붙여신다. 정말 아는 이 한 명도 없이 동경에 왔는데, 하나님께서 한 명 한명 붙여주셨다. 그 중에 우리 옆 골목에 사시는 한국인 최집사님은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울을 도왔던 것처럼 우리를 도우신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이 분은 우리 사역을 알게 되고는, 매번 김치, 빵 기타 여러가지 식품으로(식품점을 하신다) 우리 공동체에 먹을 것을 공급해 준다. 이분 덕분에 우리 공동체가 더욱 풍성해졌고, 은혜를 많이 경험했다.

#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면서, 가정교회를 많이 염두에 두었다. 어디가든 집이 있으니, 이들이 이곳을 떠나는 그 날에도 자기 집에서 교회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맘에서다. 목사가 없어도, 예배당이 없어서도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의 모임이 그들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큰 바램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역은 여기에 포커스가 있다. 지난번에 선교회의 일로 온 가족이 주일에 동경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여러가지로 고민하다가 잘 됐다 싶었다. 내가 없어도 이들 스스로 주인 의식을 가지고, 예배하고, 스스로 섬기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을 믿고, 이들의 손에 맡기고,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돕고, 맡기도 떠났다. 결과적으로는 참 좋았다. 이들 스스로 모여서 식사를 준비하고, 예배를 드리고, 좋은 교제를 나누면서 예배했다. 좋은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앞으로 잘 살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 지난 6개월간 요한복음을 설교했다. 처음 예수님을 알아가는 형제, 자매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텀부터 설교의 방향은 한 마디, 한 구절 깊이 다루는 것보다는 전체적인 스토리를 넓고 의미있게 조망하는 방향으로 잡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반년만에 비교적 빨리 요한복음을 마루리하게 된 것 같다. 이를 통해서 나 자신이 예수님을 좀 더 깊이 알게되고 만나게 된 것이 중요한 수확이다. 앞으로는 무엇을 강의할까? 고민중이다. 다시 복음서를 하기에는 부담되고, 구약의 창세기를 하면서, 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스토리들을 다루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을 더 균형있게 인식하게 될 것 같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 전도대상과 장소를 넓혀라!
우리가 전도하는 범위가 가장 가까운데에서 시작되는 것은 좋은 점이다. 그러나 이 출발점은 계속 번져나가야 한다. 현재, 우리가 다니는 일본어 학교 전도를 넘어서, 다른 일본어학교, 대학, 대학원, 기타 장기체류 가족들, 영주권을 가진 중국인들...... 왜냐하면, 그런 전도가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을때, 모임이 정체되고, 우리 자신이 섬기는 방향과 힘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데, 우리가 그물질 하는 어장은 아직 너무 좁다. 좀 더 많은 곳에, 더 많이 그물질 해야 한다. 동경은 그런 조건이 잘 되 있는 곳이다. 등록된 인원만해도15만 7천여명의 중국인이 동경에 산다. 잘 된 것은, 이번 달부터 나의 경우 일본어 학원을 그만두고 더 많은 시간을 교회 섬김에 투자하고, 여기 저기 그물질을 하려고 한다. 아내는 계속해서 학원전도, 나는 캠퍼스, 장기 체류자들을 향한 전도, 그리고 우리 형제 자매들을 통한 전도 등을 통해서 전도의 대상과 장소를 확대해나가야 한다.

# 주중 가정모임을 시작하라!
주일에 모이면, 예배드리고, 나눔과 성경공부를 주로했다. 그런 가운데, 좀더 심도있게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기도를 체험하고, 체험한 것을 간증하는 자리의 필요성을 많이 느꼈다. 그리고 우리 형제, 자매들을 리더로 자라게 할 수 있는 실제 훈련의 장도 필요함을 느꼈다. 또한, 예배를 주일이라 오지 못하는 이들과 예배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방문자들을 위한 모임이 필요했다. 주중에 자유롭게 그들을 초청해 함께 식사하며, 얘기하며, 그리스도를 알아 갈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이런 필요에 의해서, 주중의 가정모임이 시작된다. 7월 첫 주인, 금주부터 매주 목요일에 우선은 우리 집에 모여서 모임을 시작한다. 간단한 성경공부, 그리고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 서로를 잘 알고, 가까이되고, 나눌 수 있는 분위기로 모임을 섬기려고 한다. 특히, 이 모임이 장기적으로는 우리 형제, 자매들의 손에 의해 인도되고 퍼져나가면서, 이를통해서, 이들이 작은 가정교회를 섬기는 제자들로 훈련되어가기를 소망한다.

# 좀 더 폭넓게 사역하라!
나 개인적으로는, 일본어 학교를 그만두고, 사역에 더욱 뛰어들 생각이다. 그리고 그동안 뒤로 밀어두었던 동경의 여러 교회, 선교사님들, 일본교회, 중국인 네트워크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교제할 생각이다. 때가 된 것 같다. 그동안은 이런 저런 이유로 만나야할 사람, 연결해야할 사람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올 7월부터는 가까운 일본교회에 주중에 출석해서 일본교회, 사역자들과 교제를 시작하고, 일본가정교회네트워크에도 출석하고, 동경의 중국인교회 사역자들과도 만날 생각이다. 이를 통해서, 사역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제의 범위 안에서 함께 해나가는 사역의 기초를 놓기를 소망한다.  


6개월은 어떻게 보면 짧고, 어떻게 보면 긴 시간이다.

그 반년간, 우리는 하나님이 이곳에 우리를 보내셨구나! 확신했다. 여러 일들과 사람들을 통해서, 이 곳에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구나! 눈으로복, 입으로 고백했다.
그리고, 그 반년간, 우리는 동경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종종 조급해졌다. 특히, 예배에 어떤 날에는 정말 적은 수가 모이면, 본의 아니게 힘이 빠지고, 어두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반년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선적으로 일하시고 계심을 경험했다. 내 안에서, 우리 가족 안에서,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쉬지 않고 신실하게 일하시는 그분을 목도했다. 그리고 다시 그분의 행하심을 기대한다. "지으신 이도 여호와! 택하신 이도 여호와! 보내신 이도 여호와!"

우리를 통하여 행하실 "하나님의 큰일!"을 기대한다. 아멘!!!


첫 송별회(귀국 형제)예배장소(2층의 집)생일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