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다.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이외에 인간 존재 근본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격려를 격발시키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롬5:5) 사랑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21:15-17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부활이 증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것, 그들을 목양하는 것이다.
왜 목양일까? 왜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섬겨야하는가?
거기에 삶의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인생의 진미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을 더욱 더 사랑하고, 더욱 더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목양를 하다보면, 가족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에 눈이 떠간다. 타인에게 관심 갖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애쓰게 되고, 결국에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 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그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부지부식간에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랑으로 범벅되어 살다가 사랑에 물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목양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절대 전임 사역자들에게만 떠 넘길 수 없는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특권인 것이다.
목양이란 무엇일까?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잠언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잠언27:23에 의한 목양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첫째: 내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내가 알게 되고, 관계 맺게 되고, 마음을 주신 그 양무리의 형편을 살펴야 한다. 양떼는 형편을 살펴 주어야만 잘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다. 목자의 도움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동물이다. 목자가 어떤 사람이냐? 가 양떼의 생명, 복지를 좌우한다. 그래서 선한목자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나는 선한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예수님은 목숨을 희생한 선한 목자였다. 양떼된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예수님은 목숨을 우리에게 주기로 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것 외에는 정말 방법이 없는 그런 양무리이기 때문이다. 중국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 구절을 번역했다. "你要详细知道你羊群的景况,留心料理你的牛群"。详细知道 상세하게, 자세하게 자기 양무리들의 처한 상황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상세히 알아야한다고 해서, 스토커처럼 의심, 불신, 강요로 알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기초한 긍휼이 넘치는 관심을 말한다. 그야말로 사랑으로 그 양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가 필요한 것, 힘들어하는 것, 기뻐하는 것, 살아가는 것...... 이런 것들을 알아 가는 것이다.
양떼의 형편을 잘 살피려면, 관심이 그들에게 있어야 한다. 무관심이라는 장벽을 뚫어야 한다. 관심을 갖는 것이 버겨운 시대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관심하도록 교육 받았고, 자라났고, 훈련되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심을 갖지 않는 시대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무관심으로 일어나는 수 많은 사건과 사고를 볼 수 있다. 조금만 관심이 있었어도, 애정과 긍휼로 귀를 조금만 기울였어도 죽지 않을 생명들이 사라져 간다.
나에게 무관심 타파는 참으로 쉽지 않다. 타고난 무관심(?)의 본성을 가진 나로서는 남에게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버겹다. 관심을 가질 때, 오는 정신적 부담감, 심적 무게감, 긴장감이 너무 크다. 이 점은 아내와 매우 대조적이다. 아내는 타고난 관심의 본성을 가졌다. 사람들의 형편, 그들의 고통, 아픔에 자신을 자주 오버랩 시키기까지 한다. 반면,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삶을 나누는 것이 참 쉽지 않다. 그것이 내가 잘 해야할 목회자의 일임에도 그렇다. 심할때는 모임을 하려고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한 동안은 내가 목회가 아닌 다른 사역을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심각하게 고려했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주님을 알아가면서 이런 어려운 점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관심을 가지려면, 두가지를 해야하는 것 같다.
첫째는 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다. 한 식탁에서 밥을 먹으면서, 천천히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듣는 것이다. 그의 지금과 부딪친 일들과 사건, 사고, 문제들을 듣는 것이다. 삶의 희,노,애,락을 귀로 듣는 것이다. 얼굴을 보고 밥을 먹으며, 얘기를 들으면 관심이 생긴다. 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얘기하다보면, 그와 나의 개인적인 관계가 생긴다. 그가 내 밥을 같이 먹는 식구(食口)가 되는 것이다. 가족으로서의 관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두번째는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나눈 사람을 마음에 품고, 그의 삶의 얘기들을 떠 올리며 기도하면 그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전에 안보이던 것이 보인다. 그 전에 안 생기던 감정이 생긴다. 긍휼, 사랑, 연민 그런 것 말이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계신 영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그리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무관심"이라는 내 본성이 조금씩 변화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내게 절대 책임이 있는 가족이 생기고 나서 부터는 더욱 그렇다. 아내와 아이들, 늘 나의 무관심을 돌파해 주는 지원군들이다. 목회와 가정이 나를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모임에 대한 스트레스는 급속히 줄었다. 왜냐하면, 두 세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형제 자매들 안에 계신 영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대감과 신뢰감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목회와 가정의 두 날개를 가진 나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둘째, 네 소떼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목자는 양무리(소떼)에게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게 목자의 본분이다. 그 무엇보다, 그 어떤 일보다 거기에 마음의 우선순위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 마음을 두고 그들을 바라보고, 마음을 두고 그들과 대화하고, 마음을 두고 섬겨야 한다. 그것이 선한 목자의 자세다.
요즘 나는 "장기려 그 사람"이라는 책을 읽는다. 장기려 박사의 전기다. 그 어떤 환자든 예수님이 보내주신 양으로 보는 그의 삶이 은혜롭다. 예수님이 보내주신 양무리, 그들에게 내 마음을 두는 것이다. 마음을 뺏기는 것이다. 그것이 목양이다. 나는 어디에 마음을 잘 두는가? 참 한심하고, 가련하고, 부끄럽다. 마음 있는 곳에 보물이 있는데 말이다. 양무리로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는 오늘을 살기를 기도한다.
아래그림: 선한목자를 그린 카타쿰의 벽화, 그리고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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