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18일 목요일

"To serve is to suffer ,섬김은 곧 고난입니다."

얼마전 어느 선배선교사님의 기도편지를 받았다.
국제단체에서 나름대로 전문영역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신데, 매우 유익한 내용의 글을 알려주셨다. "섬김은 곧 고난이다(To serve is to suffer)"라는 페르난도의 글이다. 그의 글에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우리 한국교회에, 그리고 우리 개개인에게 유익한 메세지를 담고있었다. 그리고 내가 선교사로서 어떻게 섬겨야하는가 말해주고 있다.

우선, 영문으로 된 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행히, 최근 멋지게 번역된 그의 글이 한국어판에 번역되어 있어서 연결해둔다.

<선배님의 편지>

 " 최근 스리랑카 교회의 지도자 아지스 페르난도(Ajith Fernando) Christianity Today 지에기고  , “섬김은  고난이다(To serve is to suffer: http://www.christianitytoday.com/globalconversation/august2010/index.html)” 

지구촌 곳곳에서  반향을 일으키면서 수많은 응답 글이 쏟아졌는데, 특히 지난 34년간 아프가니스탄에서 남편  자녀와 더불어 희생적으로 사역해온 어느 부인선교사(Libby Little) 감동적인 응답 (http://www.christianitytoday.com/globalconversation/august2010/response2.html?start=1) 발표된 직후에 남편선교사(Tom Little)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원문 주소>

<한국어판 주소>

페르난도의 글은 참 좋다. 성경적이다. 그리고 핵심을 잘 알려준다. 우리 믿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맞는지 알려준다.

이번 "섬김은 곧 고난"라는 글도 참 좋다.

왜냐하면,

# 1
우리가 처한 위기를 알려준다. 우리는 성공적이 일상이 되는 교회의 신앙적 배경에서 자랐다. 기적같은 한국경제의 성장처럼, 한국교회는 그렇게 커왔다. 그래서 숫자가 늘고, 사이즈가 커지고, 보이는 영향력이 확대되는 그런 비대한 몸집에 익숙해져 있다. 작고, 더디고, 막힌 듯한 것을 그리고 그로인한 좌절을 맛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배우는 것에 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한국교회의 성공적 신화라는 배경은 약이면서 동시에 독이 된다. 부흥과 성장에 대한 긍정적인 도전, 열정, 헌신은 좋은 면이지만, 반면에 조급하고, 보이는 것에 급급하고, 시대적 조류에 쉽게 영합한다.

우리는 효율성과 측정가능한 결과로 판단한다. 영미에서 통계학은 진리다(우치무라 간조의 말). 그래서 더욱 '섬김은 고난'이라는 말을 배우기가 어려운 것이다. '고난'을 성공을 위한 잠깐의 땀흘림과 고생, 혹은 돌파해야할 장애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고난도 승리자의 (혹은 성공자의) 승리를 더욱 빛내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성공'으로 귀결되지 않는 고난이란 존재할 수조차 없다. 죄악된 세상에서 일생을 지고가야할 고난의 미학에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다. 이게 우리의 아픔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약점이다.

# 2
고난을 통한 영광을 드러내는 십자가의 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몸에서 나타나려면, 우리는 고난이라는 불을 통과하는 질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고난을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매일 져야하는 일상의 고난을 모두 포함한다. 나를 쇠퇴하게 하고 늙어가게 하는 그런 일상의 고난들 말이다.

질그릇이 깨어지지 않고, 어떻게 그 안의 보배를 드러날 수 있는가? 그럴수 없다. 질그릇은 깨어져야, 아주 잘 깨어져야, 그 안에 보배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고후4:7) 우리의 유일한 보배되신 예수님이 드러나려면, 능력의 심히 큼이 그분께 있음이 드러나려면, 질그릇은 깨어져야하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진 질그릇 조각을 붙들어 영웅 만들기 좋아한다. 고난 받은 조각이라고 말이다. 그로 말미암아 드러난 보배는 간곳 없고, 깨진 조각들이 깨어진 조각답지 않게 보배처럼 빛난다. 깨진 질그릇은 그냥 밖에 던져져 있어야 마땅한데 말이다. 주객전도가 심하다.

# 3
섬김의 고난중 제일 가는 고통은 아마도 '자아의 죽음'을 인식하는 것일 것이다. 자아의 죽음을 가족으로 불리는 형제, 자매들, 동역자들을 대하면서 오게 된다. 그들을 섬기는 비효과적이고 측정 불가능한, 그리고 통계낼 수 없는 수고와 애씀이 섬김이다. 우리는 그 섬김 가운데 자아의 죽음을 철저하게 인식하게 된다. 얼마 전에도 이 고통을 겪었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사실 죽어서 아픈게 아니라, 죽기 싫어서, 죽은 것이 내 더 뜨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우쭐되고 싶고, 화려하고 싶은 자아에 비수를 가하기에 싫은 것이다. 내 이기심이 반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다. 비뜰어진 자아가 살아남은 것처럼 몸 부림침으로 오는 고통인 것이다.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사망선고를 받았는데, 그런데 그 놈 끈질기기도 나를 붙든다. 그런데 섬김은 이런 자아의 잔영을 소멸을 촉진시킨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섬김은 나를 하나님의 영광을 투영할 수 있는 통로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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