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라는 단어는 논란이 많은 단어다. 이 용어를 중국어로는 代祷(대도)라고 하는데, 기독교계에서는 카톨릭적인 냄새가 나는 단어라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그 용어의 사용이 어떻든, 우리에게 대도는 중보기도라는 단어로 인식되어 있음으로 이곳에서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쓰도록 한다.
중보기도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 인용하고, 그 인용에 내 나름대로의 묵상과 해석을 더해보고자 한다.
(챔버스의 매일묵상 11월7일)
"중보기도에서 우리가 할 역할은 어떻게 중보기도를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 갖다 놓으신 일상적인 환경들과 사람들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려 드리고서, 우리 안에서 계신 성령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할 기회를 갖게 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온 세상을 그의 성도들과 더불어서 다스려 가고자 하신다."
이 묵상은 로마서 8장을 배경으로 한다.
로마서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중보기는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보기는 하나님이 일상에 만나게 하시는 사람, 일과 그 호흡을 같이 한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지금 바로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사람과 일들, 그리고 그전의 삶의 과정가운데 주어졌던 사람들과 일들이 내 중보기도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보좌위에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그것들을 품고 기도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실 수 있도록, 내 삶에 허락된 사람들, 일상들을 기도의 자리에 내놓는 것이다. 우리 안의 성령님이 우리를 품고 덮고 이끌고 기도하심으로 세상을 섬기신다.
그럼으로, 내가 내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먼저 내 마음에 품고, 기도 가운데 내 놓을때, 놀라운 성령님의 터치가 기도 가운데 주어진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중보하시는 것이다. 전에 알지 못했는 생각, 방법, 방향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무거웠던 것이 가벼워진다. 누리지 못했던 평안과 기쁨이 솟아난다. 그리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확신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땅가운데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그분을 보게 됨으로 나는 더욱 잠잠하고 작아진다. 그분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며, 더 벅찬 경외감으로 그분을 보게 된다.그래서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향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그분의 일의 동역자가 되어 이 세상을 섬길 수 있는 영광스러운 중보기도의 특권을 주신 것이다.
나는 이만열목사님의 중보기도를 잊을 수 없다. 이 분에 관해서는 "사람 그리고 만남"에 이미 기도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으니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그분의 기도는 여전히 내게 큰 자극이요 도전이다. 매일 1500여명 이상을 품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그의 기도는 그분을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는 복된 자리였다.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임재함으로부터 오는 신령함이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이 기도였으리라 믿는다.
오늘도 그 복된 기도의 자리에 나를 부르셨다. 감사!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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