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나의 설교 - 추구와 스타일 전환중

나는 지난 8월부터 설교, 그 추구와 스타일을 갱신하고 있다.

우선은 적은 본문에서, 좀 더 긴 본문으로 바꾸었다.
예를들면, 출애굽기의 경우, 전체 출애굽기를 다섯번의 설교로 마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렇게 할 경우, 깊이 쪼개고 살피고 살을 붙이고 하는 작업을 들하게 된다. 지난 몇 달간 긴 본문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으로 설교를 해보니, 본문에 살을 붙이지 않고 오히려 본문에서 살을 빼는 작업을 더 많이 해야 했다. 심지어 십계명 전체도 한 설교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전체 흐름에 분문을 맡기게 되고,  본문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말씀하게 하는데 더욱 적절한 심플한 설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심플한 설교는 너무 단조롭고, 가볍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심플함으로 포인트가 잘 드러났고, 본문 자체가 말씀이기에 가볍지 않았다. 내가 설명을 더 하고, 예화를 붙이고, 목소리를 높여서 길게 얘기해야 무게가 실리는게 아니었다. 지난주 한 형제의 설교후 sharing은 그 점을 증명해 주었다. 나는 설교중 출애굽기 20장 뒷부분을 지나면서, 하나님을 경외함을 본문 그래로 거의 읽는 수준으로 전달했는데, 그 형제는 굉장히 진지하고 무게 있게 받아들였다. 그야말로, 내가 말하지 않고, 말씀이 말씀하셨음이 보여진 것이다.  

긴 본문을 다루다 보니, 성경자체가  강조하는 부분, 특히 중복해서 다루는 부분이 잘 드러났다. 너무 짧은 본문을 다룰때는 긴 시간이 지나야 성경의 66권중에서, 겨우 한 권을 다룰 수 있는데, 그럴때 성경전체의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 너무 깊이 좁게 들어가 버려, 나무만 보이고 숲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긴 본문을 다룰 때는 그 그림, 숲이 더 잘 보이게 된다. 설교자뿐 아니라 회중도 그렇다.

또한, 전체 성경을 통전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나와 회중에게 성경을 한 구절, 한 구절의 나열로 보지 않고, 한권 한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분의 말씀이라는 통전적 시야를 준다. 보이지 않게 그런 관점이 생겨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나 개인적으로는 내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구약의 많이 다루지 않는 부분들 (예를들면, 레위기, 민수기...등)을 잘 전달할 수 있늘까? 하는 우려도 있었는데,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은 자신감이 생겼다. 몇달을 이렇게 설교하면서, 구약본문의  중국어 단어들이 어렵고 익숙하지 않다 보니, 내말로 표현하기 보다는 성경본문을 그대로 읽는 일이 많아 졌는데, 오히려 이 점이 나의 중국어를 더 진보시키고 있다. 준비하면서 읽고, 하면서 읽고, 나누면서 읽고, 계속 반복하면서 어려운 고유명사들을 읽다보니 조금씩 익숙해졌다. 지금까지 구약의 여러 이름, 지명, 단어들은 중국어로 익숙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좀 더 좋아질 것 같다. 자꾸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니, 구약의 이름, 지명, 단어들이 중국어로 더 익숙해지고, 조금씩 입에 붙게 되는 것을 느낀다.

얼마전 한 후배(설교를 전공한)의 facebook에서 이런 글을 봤는데, 많이 와 닿았다.

"하나님은 우리 설교의 창의력에 점수를 주지 않는다.
 설교가 얼마나 신실하고 분명한가에 점수를 준다.-해든 로빈슨"

많이 공감하는 말이다. 창의적으로 설교하려기 보다, 조금 더 신실하고, 분명하게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전달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설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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