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생활에서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주 그럴싸하고 교묘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여간 분간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볼 필요도 없고, 그동안 내가 행한 생각, 이에 따른 언행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하튼, 내가 철저히 십자가에 못 박혀 완전히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실제 생활에 필요한 행동 지침이 있다. 나는 최근, 휴스톤 침례교회의 최영기 목사님의 강의를 시디로 듣다가 자아의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실제 행동 지침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초를 얻었다. 그리고 그 단초에 기초해서 몇 가지 내 나름의 생각을 추가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완벽한 과거 완성의 사건이 내 삶에 구현되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힘있게 행하시려면, 다음과 같은 원칙을 갖고 살아야 한다.
첫째, "기분 나쁘다" 라는 생각, 기분을 갖지 말고, 거기에 영향받은 언행을 하지 말자!
여하튼, 내 기분이 나쁜 것이 문제다. 기분이 나쁠 일들이 적지 않는데, 기분 나쁘다는 판단이 서면, 그로 인해 각종 악이 자라나게 된다. 억울함, 미움, 분노, 적개심, 불공정...... 각종 더러운 것이 안에서 자라고 나오게 된다. 기분 나쁜일들이 없을 수 없지만, 갈2:20절을 기초로 볼 때, 기분 나빠하는 자체가 큰 문제다. 왜냐하면,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었으면 기분이 나쁠수가 없다. 어떤 얘기를 듣던, 내가 죽어 있다면, 그렇게 민감해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죽지 않고 살아서 기분 나빠하는 나의 옛 자아다. 이제 기분 나빠하는 나는 죽었다. 이제 그 어떤 가운데서도 "기분 나쁘다"라는 기분, 생각, 감정이 나의 마음, 행동을 지배하지 않토록 힘을 다해 싸우겠다.
둘째, "무시 당했다"는 생각, 기분을 갖지 말고, 거기에 영향받은 언행을 하지 말자!
말이나 행동으로, 혹은 절차나 도리로 나를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면, 별일이 다 일어난다. 사회에서는 각종 폭력과 살인의 주 원인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서 발원한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하는 많은 것들이 무시당했다는 기분, 생각이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또 거기서 각종 악이 자라난다. 큰 문제다. 왜냐하면, "무시 당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나의 옛 자아가 죽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다. 내 옛자아가 죽었다면 어떻게 "무시 당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의 노리개가 되어서는 안된다. 혹 무시 당할수 있는데, 나는 죽었음으로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수 많은 오해와 서로 원수됨의 죄악을 면할 수 있다.
셋째,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 자기 편리주의"를 극히 경계하자!
인간의 자기 중심적 생각, 자기 편리주의적 발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 민족, 한 개인을 묵사발 만드는 식민지배나, 폭행을 저지르고도, 피해 받은 사람들을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이 지극히 자기 중심주의적이고, 자기 편리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성, 객관성, 상대방을 고려하는 이타심이 없다. 그냥 자기 편한대로 생각하고 믿는다.
나는 이런 동일한 위험이 우리와 같은 목사, 선교사들에게 더 쉽게 더 많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예를 종종 본다. 그런 예를 살펴보면, 그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은 객관적 기준, 특히 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사랑, 구원, 성결......등이 아니고,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편리적인 발상들이다. 자기가 범죄하고 있으면서도, 그 범죄의 상황도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자기 편리주의적인 해석을 한다. 그야말로 영혼이 혼미해진 것이다. 자기가 죽었다면, 자기를 위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그 누구도 이용하려하지 말자, 도리어 이용 당하자!"
아무리 좋은 말로, 미사어구를 동원하더라도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이 아니면 행해서는 안된다. 옛 자아는 아주 영악해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속인다. 그 흔한 속임수 중에 하나는 타인을 이용하려는 파렴치한 행동이다. 물론 아주 잘 포장되어 있어서 그렇게 파렴치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두번 세번 생각해보면, 기도해보면 알 수 있다. 이 생각, 이 행동이 나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를 이용해서 더 풍성한 생명을 얻으려는 것인지 말이다. 죽지 않은 옛자아의 특징은 이기심이다. 이기심이 발동한 생각, 행동을 통해 사람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목회자인 내가 극히 경계해야할 것은 양무리를, 교인들을 이용하려는 생각이다. 그들의 덕을 보려는 작은 언행들도 경계해야 한다. 양무리가 피와 땀을 나를 위해 흘리게 해서는 안된다.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만 그들의 희생이 가치있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이용당하는 것이 낫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그야말로 바보같은 행동이다. 그렇지만 다 내주고, 내 버리신 그 분처럼 말이다.
갈2:20의 말씀이 내 삶속에 더욱 힘차게 구현되려면, 그리고 내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심이 확실해지려면, 나는 나를 침투해 들어오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 자기 편리주의를 극히 경계하고 극복해야 한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자신에게 익숙해진 방향대로 살아가기에 그것이 진리인지 알지 못한채 살아갑니다.굳어진 마음의 땅에 말씀이 새롭게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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