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지진, 그 일상의 삶

오늘 지진이 있었다.
진도 3의 지진이 동경지역에 발생했다.
진원은 남일본쪽의 바다 깊은 곳인데, 그 영향이 동경에까지 미친 것이다. 오늘 지진은 평소에 경험했던 지진보다 좀 더 길었다. 보통 지진이 오면, "지진이다!" 느끼는 순간 지진이 끝이 나는데, 오늘의 경우는 그 후에도 지진이 조금 더 지속되었다. 아내와 집에 같이 있었는데, 지진이 좀 더 지속되어서 일단 현관문을 열고 밖을 살펴보았다. 특이 상황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지진이 발생한 또 하루의 일상이 지나간 것이다.

TV를 켜보니, 자세한 소식이 나왔다. 그렇게 심한 지진이 아닌경우, 일반방송을 하면서, 그 위에막으로 지진정보를 내보내는데, 오늘이 그런 경우에 해당되었다. 지진이 심하면 정기방송이 중단되고 비상방송이 나온다. 그럴 경우에는 심각한 상황이다.

동경에 온후 한달 반에 한번 정도 지진을 경험하는 것 같다. 삿포로는 비교적 지진이 적어서, 4년3개월 있으면서 총 3,4번 정도 지진을 경험한 것 같은데, 확실히 동경은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진지역이다.

지진이 오면, 우선 소리가 들린다. 아주 기분 나쁜 "그그그...그그...웅웅웅..."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건물이 흔들리는 소리다. 지진으로 건물의 이음새부분이 삐걱거리면서 나는 소리다. 그런 다음 몸이 흔들리는 진동이 느껴지고, 천장에 달린 조명등이 흔들리면서 먼지를 뿌린다. 진도 3,4도의 경우에는 이정도에서 끝이 난다. 일본의 대부분의 건물이 진도 6,7정도는 견디도록 설계가 되어 있어서, 이 정도 지진에는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처음 이사올 때 옆집 동장 아저씨가 지진시에 대피할 장소를 알려주시고, 가스 설치하러 온 직원이 지진시 가스관리 요령을 알려준다. 각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한 학기에 두번 정도 지진대피 훈련을 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배워서 알고 있다.

동경에 살다보면, 지진도 몇 가지 익숙해져야 하는 일상 중의 한가지가 되어간다.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하지만, 큰 지진이 아닌 경우에는 잠시 경각심을 갖다고 또 잊어버리고 일상을 살아간다. 또 그래야하면 살아갈 수 있기도 하다.

오히려 지진이 일상이 되어버린 일본에서는 북한의 위협이 일상이 되어버린 한국이 신기한가 보다. 사실 한국가서 살아보면 그것도 일상인데 말이다. 오히려 한국사람들에게는 지진이 많은 땅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일본인이 신기한데 말이다. 또 일본인 중에는 중국에서 사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짜 음식들, 이런 저런 정부의 간섭, 그리고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일본방송들의 중국에 대한 잘못된 보도들을 보면서 도저히 중국에서 가서는 못살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실 가서 살아보면, 일본보다 훨씬 살아가기 재미있고 좋은데 말이다.

저마다 주어진 환경이 다르고 겪는 위험이 다르지만, 사람사는 것이 다 일상을 사는 것이고, 그 일상이 익숙해지면 다 살만한 것이다. 재작년 연말과 작년초에 안식년과 두번째 텀의 시작으로 말미암아, 북경 -> 서울 -> 동경을 연속해서 살게 되었다. 다 살만하고 적응하고 익숙해지면 불편은 줄어들고 위험요소는 잘 안보이게 된다.

사람들은 일단 자신이 있는 곳에 익숙해지면 자신이 사는 곳의 위험요소나 불편들이 작아져 보이고, 익숙하지 않은 곳의 위험요소나 불편들이 커져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새로운 생활에 도전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나의 설교 - 추구와 스타일 전환중

나는 지난 8월부터 설교, 그 추구와 스타일을 갱신하고 있다.

우선은 적은 본문에서, 좀 더 긴 본문으로 바꾸었다.
예를들면, 출애굽기의 경우, 전체 출애굽기를 다섯번의 설교로 마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렇게 할 경우, 깊이 쪼개고 살피고 살을 붙이고 하는 작업을 들하게 된다. 지난 몇 달간 긴 본문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으로 설교를 해보니, 본문에 살을 붙이지 않고 오히려 본문에서 살을 빼는 작업을 더 많이 해야 했다. 심지어 십계명 전체도 한 설교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전체 흐름에 분문을 맡기게 되고,  본문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말씀하게 하는데 더욱 적절한 심플한 설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심플한 설교는 너무 단조롭고, 가볍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심플함으로 포인트가 잘 드러났고, 본문 자체가 말씀이기에 가볍지 않았다. 내가 설명을 더 하고, 예화를 붙이고, 목소리를 높여서 길게 얘기해야 무게가 실리는게 아니었다. 지난주 한 형제의 설교후 sharing은 그 점을 증명해 주었다. 나는 설교중 출애굽기 20장 뒷부분을 지나면서, 하나님을 경외함을 본문 그래로 거의 읽는 수준으로 전달했는데, 그 형제는 굉장히 진지하고 무게 있게 받아들였다. 그야말로, 내가 말하지 않고, 말씀이 말씀하셨음이 보여진 것이다.  

긴 본문을 다루다 보니, 성경자체가  강조하는 부분, 특히 중복해서 다루는 부분이 잘 드러났다. 너무 짧은 본문을 다룰때는 긴 시간이 지나야 성경의 66권중에서, 겨우 한 권을 다룰 수 있는데, 그럴때 성경전체의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 너무 깊이 좁게 들어가 버려, 나무만 보이고 숲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긴 본문을 다룰 때는 그 그림, 숲이 더 잘 보이게 된다. 설교자뿐 아니라 회중도 그렇다.

또한, 전체 성경을 통전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나와 회중에게 성경을 한 구절, 한 구절의 나열로 보지 않고, 한권 한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분의 말씀이라는 통전적 시야를 준다. 보이지 않게 그런 관점이 생겨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나 개인적으로는 내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구약의 많이 다루지 않는 부분들 (예를들면, 레위기, 민수기...등)을 잘 전달할 수 있늘까? 하는 우려도 있었는데,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은 자신감이 생겼다. 몇달을 이렇게 설교하면서, 구약본문의  중국어 단어들이 어렵고 익숙하지 않다 보니, 내말로 표현하기 보다는 성경본문을 그대로 읽는 일이 많아 졌는데, 오히려 이 점이 나의 중국어를 더 진보시키고 있다. 준비하면서 읽고, 하면서 읽고, 나누면서 읽고, 계속 반복하면서 어려운 고유명사들을 읽다보니 조금씩 익숙해졌다. 지금까지 구약의 여러 이름, 지명, 단어들은 중국어로 익숙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좀 더 좋아질 것 같다. 자꾸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니, 구약의 이름, 지명, 단어들이 중국어로 더 익숙해지고, 조금씩 입에 붙게 되는 것을 느낀다.

얼마전 한 후배(설교를 전공한)의 facebook에서 이런 글을 봤는데, 많이 와 닿았다.

"하나님은 우리 설교의 창의력에 점수를 주지 않는다.
 설교가 얼마나 신실하고 분명한가에 점수를 준다.-해든 로빈슨"

많이 공감하는 말이다. 창의적으로 설교하려기 보다, 조금 더 신실하고, 분명하게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전달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설교의 길이다.  



2010년 11월 18일 목요일

"To serve is to suffer ,섬김은 곧 고난입니다."

얼마전 어느 선배선교사님의 기도편지를 받았다.
국제단체에서 나름대로 전문영역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신데, 매우 유익한 내용의 글을 알려주셨다. "섬김은 곧 고난이다(To serve is to suffer)"라는 페르난도의 글이다. 그의 글에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우리 한국교회에, 그리고 우리 개개인에게 유익한 메세지를 담고있었다. 그리고 내가 선교사로서 어떻게 섬겨야하는가 말해주고 있다.

우선, 영문으로 된 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행히, 최근 멋지게 번역된 그의 글이 한국어판에 번역되어 있어서 연결해둔다.

<선배님의 편지>

 " 최근 스리랑카 교회의 지도자 아지스 페르난도(Ajith Fernando) Christianity Today 지에기고  , “섬김은  고난이다(To serve is to suffer: http://www.christianitytoday.com/globalconversation/august2010/index.html)” 

지구촌 곳곳에서  반향을 일으키면서 수많은 응답 글이 쏟아졌는데, 특히 지난 34년간 아프가니스탄에서 남편  자녀와 더불어 희생적으로 사역해온 어느 부인선교사(Libby Little) 감동적인 응답 (http://www.christianitytoday.com/globalconversation/august2010/response2.html?start=1) 발표된 직후에 남편선교사(Tom Little)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원문 주소>

<한국어판 주소>

페르난도의 글은 참 좋다. 성경적이다. 그리고 핵심을 잘 알려준다. 우리 믿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맞는지 알려준다.

이번 "섬김은 곧 고난"라는 글도 참 좋다.

왜냐하면,

# 1
우리가 처한 위기를 알려준다. 우리는 성공적이 일상이 되는 교회의 신앙적 배경에서 자랐다. 기적같은 한국경제의 성장처럼, 한국교회는 그렇게 커왔다. 그래서 숫자가 늘고, 사이즈가 커지고, 보이는 영향력이 확대되는 그런 비대한 몸집에 익숙해져 있다. 작고, 더디고, 막힌 듯한 것을 그리고 그로인한 좌절을 맛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배우는 것에 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한국교회의 성공적 신화라는 배경은 약이면서 동시에 독이 된다. 부흥과 성장에 대한 긍정적인 도전, 열정, 헌신은 좋은 면이지만, 반면에 조급하고, 보이는 것에 급급하고, 시대적 조류에 쉽게 영합한다.

우리는 효율성과 측정가능한 결과로 판단한다. 영미에서 통계학은 진리다(우치무라 간조의 말). 그래서 더욱 '섬김은 고난'이라는 말을 배우기가 어려운 것이다. '고난'을 성공을 위한 잠깐의 땀흘림과 고생, 혹은 돌파해야할 장애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고난도 승리자의 (혹은 성공자의) 승리를 더욱 빛내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성공'으로 귀결되지 않는 고난이란 존재할 수조차 없다. 죄악된 세상에서 일생을 지고가야할 고난의 미학에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다. 이게 우리의 아픔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약점이다.

# 2
고난을 통한 영광을 드러내는 십자가의 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몸에서 나타나려면, 우리는 고난이라는 불을 통과하는 질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고난을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매일 져야하는 일상의 고난을 모두 포함한다. 나를 쇠퇴하게 하고 늙어가게 하는 그런 일상의 고난들 말이다.

질그릇이 깨어지지 않고, 어떻게 그 안의 보배를 드러날 수 있는가? 그럴수 없다. 질그릇은 깨어져야, 아주 잘 깨어져야, 그 안에 보배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고후4:7) 우리의 유일한 보배되신 예수님이 드러나려면, 능력의 심히 큼이 그분께 있음이 드러나려면, 질그릇은 깨어져야하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진 질그릇 조각을 붙들어 영웅 만들기 좋아한다. 고난 받은 조각이라고 말이다. 그로 말미암아 드러난 보배는 간곳 없고, 깨진 조각들이 깨어진 조각답지 않게 보배처럼 빛난다. 깨진 질그릇은 그냥 밖에 던져져 있어야 마땅한데 말이다. 주객전도가 심하다.

# 3
섬김의 고난중 제일 가는 고통은 아마도 '자아의 죽음'을 인식하는 것일 것이다. 자아의 죽음을 가족으로 불리는 형제, 자매들, 동역자들을 대하면서 오게 된다. 그들을 섬기는 비효과적이고 측정 불가능한, 그리고 통계낼 수 없는 수고와 애씀이 섬김이다. 우리는 그 섬김 가운데 자아의 죽음을 철저하게 인식하게 된다. 얼마 전에도 이 고통을 겪었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사실 죽어서 아픈게 아니라, 죽기 싫어서, 죽은 것이 내 더 뜨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우쭐되고 싶고, 화려하고 싶은 자아에 비수를 가하기에 싫은 것이다. 내 이기심이 반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다. 비뜰어진 자아가 살아남은 것처럼 몸 부림침으로 오는 고통인 것이다.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사망선고를 받았는데, 그런데 그 놈 끈질기기도 나를 붙든다. 그런데 섬김은 이런 자아의 잔영을 소멸을 촉진시킨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섬김은 나를 하나님의 영광을 투영할 수 있는 통로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2010년 11월 13일 토요일

PC에서 중국어 사용 하시는 분들을 위한, TIP 몇 가지

기술의 발달로 컴퓨터에서의 중국어 사용이 날로 편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제가 사용하고 있는 몇 가지 프로그램이 중국어 사용하시는 분들에께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알립니다.

저의 경우는 상당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 1 중국어 입력기

보통 중국어 입력을 윈도우에서 제공하는 입력기에 중국어를 선택해서 입력하게 되는데, 이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입력기가 있습니다. 중국어로 설교 준비를 할 때, 많은 경우 해당하는 단어를 입력기가 인식하지 못해서 한 글자 한 글자 입력했었는데, sogou의 경우에는 왠만한 단어는 다 인식합니다. 그리고 한번 사용한 단어에 대한 메모리가 뛰어납니다. 정말 만족스럽습니다. 어떤 언어의 윈도우에서도 깨지지 않고 설치되며, 매우 속도가 뛰어나 sogou 경우는 보통 MS윈도우 제공하는 문자입력 시스템보다 두배 정도의 속도가 빠른 것 같습니다. 한번 써 보세요!

그리고, sogou 외에 google에서 제공하는 입력기도 있습니다. 이또한 기존의 입력기도다 입력이 훨씬 빠릅니다. 그렇지만, 저의 경우에는 sogou보다 느린 것 같아서 많이 사용하지는 않지만 일단 설치는 해두었습니다.

무료입니다. 사이트는 여기입니다.
  1) sogou 입력기 : http://pinyin.sogou.com/
  2) google 입력기 : http://www.google.com/ime/pinyin/

# 2  PC용 중영사전입니다.

사전은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사기도하고, 알아보기도 하고, 실제 사서 PC에 깔아서 써보기도 했는데, 쓸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좋은 사전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전은 한글윈도에서도 전혀 깨지지 않고 설치됩니다. 그리고, 한국어도 인식하고, 일본어도 조금 나옵니다. 무엇보다, 영어 중국어는 매우 정확하고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알려줍니다. 영어발음도 읽어줍니다. 더 좋은 점은 무료입니다. 또 이 사전은 웹상에서만 글씨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문서, PDF파일의 단어까지도 인식합니다. 물론 너무 잘 인식해서, 어떤 때에는 인식기능을 꺼 두어야 할 경우도 있긴 합니다.
   주소는 여기입니다.      http://cidian.youdao.com/

# 3 중국어성경 프로그램입니다.

원래 이 프로그램은 "信仰宝库 Chinese Treasures"라는 이름으로 무료 시디가 많인 유통된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웹상에서도  접속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좋은 점이 몇 가지 있는데, 먼저는, 중국어 본문을 카피해서 인용할 수 있는 점입니다. 그리고,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성경전체(창세기-계시록)의 주석이 있습니다. 이외에 여러 번역본 중국어 성경을 볼 수 있고, 인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엄청난 양의 책들이 들어 있습니다. 한번 접속해 사용해 보십시오!
         http://dbsbible.org/english/ct_content.htm   

   --》 http://xybk.fuyin.tv/dbs/b5/index.htm
이 세가지 프로그램을 써 보면서 다시 한번 중국의 저력에 놀랬습니다. 발전속도가 무섭습니다. 그리고, 무료로 제공할 정도로 지지 기반도 튼튼합니다.

제 생각에 앞으로 성경에 관련된 프로그램은 중국 기독교가 엄청난 저력을 발휘할 것 같습니다. 구입할 경제력이 있는 기독교인 층이 형성만 되면, 봇물 터지듯이 유용한 프로그램들이 등장할 것 같습니다.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선교 십계명


선교는...

1.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2. 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한다.

3. 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으로 한다.

4.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릎으로 한다.

5.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6. 조직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으로 한다.

7.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우가 함께 한다.

8. 현재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한다.

9.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한다.

10. 떠들며 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한다.  

                                             <넓은 뜻> 높은 뜻 정의 교회 선교소식지. 첫번째 이야기에서

많이 공감이 가는 선교의 십계명이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는 그렇게 선교하고 있는가? 자문해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다.

         "사람, 믿음, 몸, 무릎, 하나님, 생명력, 온 교우, 미래, 지속적, 조용히.....".










2010년 11월 9일 화요일

로잔대회와 중국교회

로잔대회가 폐막했다.
이시대에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회중 하나가 마무리된 것이다.
로잔대회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 다루는 주제와 내용은 상당히 유익하고, 우리가 시대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는 터라, 시간을 두고, 로잔 홈피를 통해서, 남겨진 비디오를 보며 도움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번 로잔대회에서 가장 논란을 제기한 문제는 개인적으로 중국교회의 불참이 아니었나 싶다. 듣기로는 200명의 대표가(복음주의권을 가정교회가 대표했다. 삼자교회는 신학적 노선, 정부와의 관계로 참석 자체를 시도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단 한명도 참석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주 원인은 중국정부의 참가방해였다. 대부분이 집에서, 혹은 공항에서 출국을 저지 당했다. 그리고 결국은 단 한명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중국인사역을 위한 국제회의에 첨석했다가, 이 200명의 대표중 한명인 가정교회 장로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 첨석하지 못하게 된 전후사정과 로잔대회가 중국교회에 미치는 영향들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번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중국교회의 변화와 축복을 볼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번 로잔대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교회는, 놀랍게도 단 한명의 참석자도 보내지 못한 중국교회가 될 것 같다.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알아야할 보편적인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그들을 향한 복음의 필요성에 대해서 더욱 깊이 인식하고, 세계선교에 대해서 그 만큼 더 많은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왜 중국교회가 한 명의 사람도 참석시키지 못하고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첫째, 이번에 첨석하려다 정부로부터 출국을 저지당한 사람들은 지금 로잔대회에 대해서, 가장 '가난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났던 가정교회의 장로님의 말에 의하면, 삼자교회든 가정교회든 이번에 대회에 참석하려다 저지 당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교회,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한가지 중요한 의문이 생겼다고 한다. 그 의문은 '도대체 우리가 왜 참석할 수 없는가? 참석을 저지 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로잔대회가 무엇이기에 그런 저지를 당했는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의문으로 말미암아 지금, 저마다 로잔대회에 대해서 연구하고 배우고, 나누고 있다고 한다. 가려다 못 갔으니, 참으로 가난하고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라도 더 듣고,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할 것이다.

둘째, 초청받은 중국의 대표자들중에는 30,40대의 젊은 지도자들이 많았다. 내가 만났던 그 장로님도 40대 중반의 젊은 장로님이었다. 그들은 정부의 각종 압력을 받으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각종 압력이 이들을 더욱 정직하게 더욱 성경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정부의 간섭아래서 순수하게 보편적인 세계교회와 연대하려고 노력하는 일환이 로잔대회의 참석이었다. 30,40대에 이미 고난의 터널을 지나며, 세계적 교회의 보편성에 연결점을 놓으려는 사람들, 그들이 이끌어갈 앞으로의 20, 30년간의 중국교회의 모습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셋째, 중국교회의 대표성과 고민이 달랐다. 무엇이 대표성일까? 아마 많은 나라의 경우, 후원을 많이 한 대형교회 지도자들, 선교단체의 대표들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교회는 좀 달랐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많이 대회를 후원할 여력이 없다. 그리고 선교단체도 없다. 대부분이 조심스럽게 가정교회를 세우고, 수 많은 어려움, 특히 핍박과 손해가운데 믿음을 지켜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대표들이었다. 그들은 기득권이라고는 한번도 가져본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고민은 국가와의 관계였다. 치열한 그 고민은 로마시대의 초기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닮았다. 이에 비해서 우리는 후기로마시대(기독교 공인이후)의 성도들의 고민과 닮았다. 고민이 다르니 기도가 다르고, 얻고 배우는 것도 다르다.

물론 중국의 복음적 가정교회들이 전부 괜찮은 것은 아니다. 아주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특히, 급속하게 진행되는 세속화는 우리의 중국교회에 대한 희망을 송두리째 짓밟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지난  2010년10월 발행한, 한 대도시의 대표적인 가정교회의 정기 간행물에 실린 로잔대회에 대한 글은 우리의 희망에 힘을 실어준다.

이 글에서 저자는, 로잔대회에 대한 역사, 영향, 의의, 그리고 중국교회와의 관계를 정리해서 알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参加2010 年洛桑会议对中国教会具有以下重要意义。
        第一,中国教会走出去,促进了与普世教会的合一与团契。1、我们作为中国教会的一部分,融入普世教会大团契。通过洛桑这个全球性的教会平台,加强了中国教会与普世教会间的相互了解和交流。2、恢复中国教会与普世教会在基督身体里的连接,并与大公教会的历史传承接轨。
        第二,中国教会走出去,有利于中国教会迈向普世宣教。1、了解并宣传普世教会宣教的现状和动向。2、成为中国教会走向普世宣教的一个平台,推动中国教会参与普世宣教的实际行动——共同寻求使命,共同承担责任。
        第三,中国教会走出去,展现出中国教会自身的成长与成熟。1、使中国教会具有更广阔的国度胸怀,促进中国教会内部的合一、交往和配搭。2、有助于加强中国教会在社会中的见证,推动中国教会以基督的爱和真理服侍这个世代并走向普世宣教。

위를 간략 번약하면,

 중국교회의 2010년 로잔대회 참석의 의의
 첫째, 중국교회의 참석은, 세계교회와의 일치와 단결을 촉진한다.
 둘째, 중국교회의 참석은, 중국교회의 세계선교에 도움을 준다.
 셋째, 중국교회의 참석은, 중국교회 자신의 성장과 성숙을 드러낸다.

이 글에서 강하게 드러난 그들의 고민과 분투는 세계교회와의 연계, 그리고 세계선교 등으로 표현되는 시대적 사명감이다. 중국교회는 그 시대적 소명감을 느끼고 있다.

















2010년 11월 7일 일요일

중보기도에 관하여.....

중보기도라는 단어는 논란이 많은 단어다. 이 용어를 중국어로는 代祷(대도)라고 하는데, 기독교계에서는 카톨릭적인 냄새가 나는 단어라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그 용어의 사용이 어떻든, 우리에게 대도는 중보기도라는 단어로 인식되어 있음으로 이곳에서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쓰도록 한다.

중보기도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 인용하고, 그 인용에 내 나름대로의 묵상과 해석을 더해보고자 한다.

"Your part in intercessory prayer is not to enter into the agony of intercession, but to utilize the commonsense circumstances God puts you in, and the commonsense people He puts you amongst by His providence, to bring them before God’s throne and give the Spirit in you a chance to intercede for them: In this way God is going to sweep the whole world with His saints"
(챔버스의 매일묵상 11월7일)

"중보기도에서 우리가 할 역할은 어떻게 중보기도를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 갖다 놓으신 일상적인 환경들과 사람들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려 드리고서, 우리 안에서 계신 성령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할 기회를 갖게 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온 세상을 그의 성도들과 더불어서 다스려 가고자 하신다."

이 묵상은 로마서 8장을 배경으로 한다.
로마서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중보기는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보기는 하나님이 일상에 만나게 하시는  사람, 일과 그 호흡을 같이 한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지금 바로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사람과 일들, 그리고 그전의 삶의 과정가운데 주어졌던 사람들과 일들이 내 중보기도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보좌위에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그것들을 품고 기도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실 수 있도록, 내 삶에 허락된 사람들, 일상들을 기도의 자리에 내놓는 것이다. 우리 안의 성령님이 우리를 품고 덮고 이끌고 기도하심으로 세상을 섬기신다.

그럼으로, 내가 내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먼저 내 마음에 품고, 기도 가운데 내 놓을때, 놀라운 성령님의 터치가 기도 가운데 주어진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중보하시는 것이다. 전에 알지 못했는 생각, 방법, 방향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무거웠던 것이 가벼워진다. 누리지 못했던 평안과 기쁨이 솟아난다. 그리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확신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땅가운데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그분을 보게 됨으로 나는 더욱 잠잠하고 작아진다. 그분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며, 더 벅찬 경외감으로 그분을 보게 된다.그래서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향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그분의 일의 동역자가 되어 이 세상을 섬길 수 있는 영광스러운 중보기도의 특권을 주신 것이다.

나는 이만열목사님의 중보기도를 잊을 수 없다. 이 분에 관해서는  "사람 그리고 만남"에 이미 기도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으니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그분의 기도는 여전히 내게 큰 자극이요 도전이다. 매일 1500여명 이상을 품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그의 기도는 그분을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는 복된 자리였다.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임재함으로부터 오는 신령함이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이 기도였으리라 믿는다.

오늘도 그 복된 기도의 자리에 나를 부르셨다. 감사! 감사! 감사!



2010년 11월 3일 수요일

중국인사역 국제회의를 참석하고 나서

지난주 한주간 중국인 사역을 위한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주로 해외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사람들이, 디아스포라 중국인들이 귀국후에 중국교회에 잘 정착하도록 돕기 위해서 모인 모임이다. 이번 모임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누렸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만남의 축복을 누렸다.  세계 이곳 저곳에서 중국인 사역을 하는 사역자, 중국내에서 유학하고 귀국해서 모임을 이루고 섬기는 사람들, 디아스포라 중국인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섬기는 이런 저런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그들을 통해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중  몇 몇 사람들과는 아주 가까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15여년만에 만난 과거 중국유학시절 동료도 있었다. 그는 당시 중국어를 배우러온 영국인 크리스천이었는데, 지금은 런던의 한 중국어 예배를 섬기는 목사가 되어 있었다. 참 인연이 놀랍다. 이외에 인상깊게 만난 홍콩의 팽장로님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건강하고 활기차게 주님을 섬기고 사는 70세 노인의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모임을 통해서 알게 된 중국 출신의 한 홍콩사역자는 주 안에서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는 내게 많은 질문을 했고, 그 답변을 소중하게 들어주었다.

둘째, 사역에 대한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는 배움의 축복을 누렸다.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사역들을 들으면서, 또 토론에 참석하면서, 하나님이 지금 전 세계 중국인들 가운데 어떻게 일을 이루어가고 계신지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대륙의 변화와 가정교회의 모습은 내가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지 더욱 생각하게 해주었다. 중국 가정교회 중에서 가장 앞서가는 일부 교회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해나가고 있었고, 매우 균형잡히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가정교회의 젊은 장로님의 강의는, 그들이 세계교회의 흐름을 잘 알고 있고, 그 흐름에 자기들의 모습에 끊임없이 투영하고 전진하고 있었다. 또한 본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서, 성경적이고 성령적으로 문제에 도전하고 있었다. 참으로 인상적이고 감사했다.

셋째, 내가 하고 있는 사역과 전략에 대해서 다시한번 돌아보고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지금 동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역이 대체적으로 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얻었다. 문제는 방향성을 가지고 지금 힘있게 추진하여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열매로 그 나무가 어떠한지 경험해야 한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