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3일 수요일

선교편지(2012년 8월, 선교타임즈)


참고: 많이 지난 옛 선교편지 올립니다. 아는 분 부탁으로 선교타임즈에 선교편지 썼던 것인데, 우연히 이제야 발견하고 기록을 위해 올려둡니다.  

[선교편지]동경에서

2012/08/01

주 안에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동경의 박수민 선교사입니다. 그 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요즘 날씨가 하루 하루 가 다르게 더워지고 있습니다. 어제는 태풍 4호가 동경을 지나갔습니다. 내일모래에 태풍 하나가 더 날아옵니다. 한 해에 30여개의 태풍이 지나가는 일본이니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보니, 올해 반년을 넘기는 지금 6월까지, 이미 온갖 자연재해가 일본을 휩쓸고 지나갔네요. 태풍, 지진, 돌풍…., 이 외에도 화산폭발, 쓰나미, 일본은 참 자연재해가 많은 나라입니다.

저희는 동경에 온지 올 9월이면 3년째가 됩니다. 홋카이도에서 첫 번째 term 4년5개월을 지내면서 삿포로 국제교회에서 중국인예배를 개척하고 섬겼던 경험은 동경에서 시작한 “디아스포라 중국인 교회” 개척사역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경험했던 사이판 중국인 교회의 경험은 더 유익한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말이 나오니 그 때의 형제, 자매들이 그립네요. 비록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그렇게 순수한 마음과 사모함을 가진 분들을 만나서,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저희에게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어디든 새롭게 시작하면 걸려야 하는 시간은 다 걸려야 하고, 겪어야 하는 것은 다 겪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녹녹하지 않은 동경에서의 개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감사하게도 이제 좀 자리를 잡고, 기초공사 단계에서 벗어나 진일보한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궤도 수정에는 최근 있었던 “동경 중국인 캠프 2012”, “동경 중국인 전도대회 2012”, 이 두 대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캠프에는 69명의 형제, 자매들이 참석해서 은혜를 누렸고, 현장에서 8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일본에서만 가능한 노천온천 세례식도 있었습니다. 전도대회에는 이틀간 280여명이 참석해서 40여명이 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동경 기독중국인 연합기도 모임”이 생겨 났습니다. 앞으로 할 일 많은 일본 내 중국인 디아스포라 사역에 중요한 교두보가 확보된 샘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무엇보다 저희 교회의 형제, 자매들이 부쩍 자라났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신랑 친구의 기쁨(요3:29)을 누렸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 찾아서 성의껏 해내는 그들은 제가 어떻게 제자양육에 동참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디아스포라 중국인 사역은, 지금 여기에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훗날 중국에서” 입니다. 저희 같은 디아스포라 교회의 형제, 자매들은 5년내에 60-70% 정도가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앞으로 더 잘하는 사람, 목회자가 있는 지금 이 곳 보다, 목회자 없는 중국의 그 어디에서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점이 어려운 점이면서도 동시에 가능성입니다. 저는 가능성으로 봅니다. 자비량 선교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고, 가족, 친척, 친구들을 중심으로 복음의 거점을 확보해 나가는 용사로 보고, 그렇게 되어가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디아스포라 중국인 사역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제자화해서), 보내는 사역- 살키보 사역” 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기도로 호흡하며, 사람들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기초가 뼈처럼 단단하게 자리잡고, 그 위에 말씀의 살이 붙고, 성령의 활기찬 생명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성령님의 감동가운데 인격적으로 결단하고 스스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지점에서 든든한 기초가 놓여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이렇게 자라가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일본에는 80여만명(불법 포함시 100여 만 명 추정)의 중국인들이 있습니다. 그 중 30여만명이 동경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 지역에 있습니다. 작년의 대지진과 방사능 문제로 주춤하고 있긴 하지만, 일본정부의 계획이나 여러 주변 상황으로 볼 때, 일본 내 중국인들은 앞으로도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중국인 교회는 전국에 겨우 30 여 곳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 중국대륙출신을 배경으로 하는 목회자나 교회는 거의 전무합니다. 거기에 일본 교회 자체가 많지 않고, 외국인 사역을 하는 교회가 거의 없음으로, 수 많은 중국인들이 복음을 거의 들어보지 못한 채 일본에서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은 고달픈 삶을 살아갑니다. 노동 강도가 높은 힘든 아르바이트, 일본인이 꺼리는 3D업종의 일들, 폐쇄적인 일본사회에서 오는 스트레스, 열악한 주거환경, 비싼 생활비, 그야말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압력에 심신이 병든 이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이들에게 저희가 사람을 살리는 복음, 해방의 복음, 자유의 복음, 능력의 복음, 바로 예수의 복음을 힘 있게 전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아까 말씀 드렸던, “동경 기독중국인 연합기도 모임”이 좋은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모임이 재일중국인들의 필요를 섬기기 위한  Community Center, 헌신자들을 훈련하기 위한 훈련기관들, 장차 선교중국에 이바지할 중국인 선교사들이 자라나는 모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내년 봄에 한국에서 열릴 예정인 “제3회 동북아시아 기독청년대회”에서 혹시 여러분들 중에 만나 뵐 수 있는 분이 있을지요? 지난 번에 편지 드렸던 대로, 일본에서 있었던 지난 두 번의 대회는 참 의미가 있었습니다. 동북아의 중심축을 이루는 한국, 일본, 중국, 이 세 나라의 기독청년들이 함께 모여서 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때에, 서로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이 세 나라는 역사와 현실의 문제로, 평화와 공영의 발 걸음을 제대로 못 내딛고 있지만, 삼국의 기독 청년들의 삶과 미래에 평화와 공영의 생명의 씨앗이 심겨져 가고 있음을 봅니다. 막힌 담을 모두 허무시는 그분의 사랑과 평화의 능력이 이들을 통해 동북아시아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늘 저희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분들께 펜을 들면 말이 많아집니다. 말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이제 몇 가지 기도를 부탁 드리면서, 오늘 편지를 이만 줄이려고 합니다. 먼저는, 주님이 저희에게 새롭게 열어주신 연합사역, 교회 사역이 동경에 있는 중국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는, 최근 새롭게 보내주신 형제, 자매들이 교회에 잘 정착하고, 기존의 형제, 자매들과 새롭게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셋째는, 저희가 영육간에 강건하여서 주님의 손과 발로써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와 위로로 함께 해주신 성도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저희도 여러분들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하소서!

2012년 6월20일 동경에서 박수민, 송수아 올림

2013년 3월 4일 월요일

제3회 동아시아 기독 청년 대회(제주도 대회)

지난 2월12일(화)-15일(금), 제3회 동아시아 기독 청년 대회가 총 49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도에서 있었다. 이번 제3회 대회는 지난 두 번의 대회의 정신을 이어가면서도 새로운 기운이 엿 보였던 대회였다.

동시아삼국, 한국, 중국, 일본이 유난히 많이 부딪히고 어렵게 관계를 유지해 온 지난 1년을 생각해 보면, 평화의 이야기가 얼마나 필요하면서도 요원한지 모르겠다. 동아시아 각국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의 너무나도 무책임한 언행이, 얼마나 민초들을 고통스럽고 가난하며 불안케 하는지 생생하게 체험하고 살아온 1년이었다. 더 이상 평화는 그런 책임 있는 지도자들의
무책임한 언행에 맡겨서는 안된다. 

그런 훈훈하지 않은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런 작디 작은 모임은 삼년째 지속되고 있다. 동아시아의 나라와 민족의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화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모임,  나라와 민족의 장벽과 장애를 넘어 한 평생을 가는 친구 만들기를 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모임, 그것이 내가 느끼는 동아시아 기독 청년 대회의 매력이다.  

이번 대회는 몇 가지 면에서 지난 모임들과 달랐다. 어떤 점이 달라졌나 하면, 먼저는, 장소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뀐 점이다. (일본 -> 한국 -> 중국, 이렇게 삼국의 땅을 가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공기를 호흡해 보는 것이 장기 방향이다.) 두 번째는 대회 준비 멤버가 두 개의 교회(예수마을교회& 동경닛포리국제교회)를 넘어서 한국의 "청어람"(http://www.bluelog.kr/)이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청어람의 참여는 내용과 형식 면에서 모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강의와 프로그램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수양회와 펠로우쉽의 두 측으로 돌아가던 대회의 관성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성과 사회를 끌어 안고 갈 수 있는 새로운 탄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김응교 교수의 인문학 강의, 조영헌 교수의 동아시아 역사 특강, 송강호 박사의 평화이야기, 한 탈북자의 이야기 등은 동아시아 인들의 가슴에 담겨져 있던, 그러나 감추어 있던, 아니 잠자고 있던 평화와 삶에 대한 강한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굴절과 한 많은 동아시아 전쟁의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후손들에게, 앞으로 함께 추구하고 경험해야 할 새로운 "동아시아 기독 청년 지식 생태계"의 문을 살짝 열어준 것 같다. 그곳에 먹을 것이 많터라!!

이외에도, 수양회가 안겨주는 은혜와 감동, 사귐과 사랑, 유쾌함과 심오함을 두루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참석자들의 반응을 일일이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 교회 참석자들의 소감만 들어 보아도, 또 그들의 대회 후의 언행을 살펴보아도 적지 않은, 좋은 변화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시야가 많이 넓어진 사람, 확 트인 영적, 지적 세계를 얻게 된 사람, 평화 혹은 평안을 얻게 된 사람, 동아시아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된 사람, 새로운 동아시아 기독 청년 친구들을 사귀게 된 사람........, 우리 가운데 이 일의 증인들이 많다. 이들의 증언은 앞으로 차곡차곡 모아서 올려보고자 한다. 아마도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세개의 언어로 다양하게 올라올 가능성이 있는데 양해를 부탁드린다. ^ ^. 

나 개인적으로도 많이 격려 받고,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되고 돌아온 대회였다. 사람들이 좋았고, 모임이 좋았고, 한국이 특히 신혼 여행 때도 못 가 본 제주도가 좋았다.

제4회 동아시아 기독 청년 대회는, 내년 2014년은 2월20일-22일에 다시 한 번, 제주도에서 열린다. 사랑하는 분들의, 동아시아 기독 청년들의(자칭 청년들도? ) 참여를 독려하며 환영한다. 끝으로 함께 기도해 주시고 마음 모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샬롬!
  
                                           Video By Li Wen Ge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동아시아 기독청년 대회를 위한 기도부탁

제 3회 동아시아 기독청년 대회가 14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두 번의 대회를 동경에서 했고, 올해는 2월12일-15일까지 한국 제주도에서 열리게 된다. 한국에서 하는 이유는, 동아시아 대회의 삼국 한국, 중국, 일본 중의 한 나라인 한국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다. 

동아시아 기독청년대회는 

1 동아시아 삼국(일본, 중국, 한국)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화를 추구한다. 예수 안에서의 개인간, 국가간, 민족간의 평화가, 그 동안 가장 가깝고도 먼 이웃으로 살아온 우리들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2. 삼국의 청년들이 이 대회기간을 통해서 일생 함께가는 친구로 빚어지기를 소망한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나라를 좋아하게 된다. 그런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는 3박4일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번 대회는 한국에서 치르게 됨으로 여러 면에서 색다른 접근이 이루어진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준비 단체의 변화다. 지난 두 번의 대회는 한국의 예수마을교회, 동경의 닛포리 국제교회가 중심이 되어 행사가 치뤄졌다. 여전히 내부적으로는 그런 틀을 유지하지만, 올해부터는 새로운 한국측 준비 단체(청어람 등)와 인력이 합류하게 되었다. 강사진에도 전문가들이 늘어났고 다양해 졌다. 대회의 장이 약간 더 오픈되고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하기 때문에 넘어야 문제도 많다. 일본에서 한국까지 가서 참석해야 함으로 일본측 참석자들에게 경제적 시간적 부담이 늘었다.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니, 장점이 더 드러나고 새로운 창조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모임을 앞두고 몇 가지 기도제목을 알리고 함께 기도를 해주기를 요청한다.    

1. 3박4일간 함께 하는 모든 참석자들이 나라와 민족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넘치게 경험하기를.
2. 동아시아(한,일,중) 평화를 향한 생명의 씨앗들이 사람들 속에 깊이 심겨지기를
3.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을 대회에 보내주시기를 

2013년 1월 3일 목요일

섬김은 뼈저리게 고통스러운 것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글인데, 다시 읽고 싶었다. 다시 읽고나니 지인들과 나누고 싶어졌다. 그래서 올린다. 섬김은 뼈져리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뼈저리게 마음에 와서 닿는 말이다. 


섬김은 뼈저리게 고통스러운 것(CT Korea 2010년 9월호)

To Serve Is to Suffer

If the apostle Paul knew fatigue, anger, and anxiety in his ministry, what makes us think we can avoid them in ours?     

사도 바울을 덮친 피로와 분노와 불안, 우리라고 피할 수 있을까
아지스 페르난도  Ajith Fernando 2010.10.13 정모세 옮김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활동가 연합이 서구 바깥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박해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운 1996년 이래로 북미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하여 남반구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리스도인들, 특히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다수 세계(majority world)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박해에 관심을 표명할 때, 종종 인권이라는 렌즈로 그 사안에 접근한다. 이번 호에서는 스리랑카 출신 목회자이자 복음전도자 아지스 페르난도가 기독교 제자도의 본질적 부분인 고난, 특별히 교회 지도자로 부름받은 자들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도록 도전한다.
바로 얼마 전에 스리랑카의 최남단 지역에서 일주일 동안 목회자들을 가르치고 돌아왔다. 이들 목회자들의 경험에 따르면,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서 개척을 시작할 때에는 의미 있는 열매가 열리고 적개심이 누그러지는 데 보통 10년에서 15년 정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개척 초창기에 그들은 부당한 폭행과 비난을 받는다. 집 지붕에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도 하고, 자녀들은 학교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고서도 진정한 회심자를 얻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많은 개척자들이 수년 내에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인내하는 자들은 허다한 영원의 열매를 맺는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문제들로 불평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서구에서 사역을 하고 돌아왔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아주 달랐다. 그곳에서 사역할 때는 “내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고, 대부분의 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효율성이 떨어지는 스리랑카 문화에서 다시 지도자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온갖 좌절이 나를 뒤덮었다. 서구에서 강연을 하다가 스리랑카에서 목회를 하기란 쉽지 않다. 지도자인 나는 내가 이끄는 사람들의 노예(doulos)다(고후 4:5).이것은 내 필요보다는 그 사람들의 필요에 맞춰 내 일정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 성취는 매우 독특한 특징이 있어서,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기 사명을 성취하는 것과 다르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우리는 행복하고 만족해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도,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는 십자가도 포함된다. 십자가는 우리의 사명 성취를 정의할 때 본질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 


서구에서 공부하고 스리랑카로 돌아온 젊은 그리스도인 일꾼들은 이 점을 두고서 고심한다. 그 젊은이들은 아주 유능하지만, 가난한 조국은 (그들이 스스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재능을 인정해줄 여력이 없다. 우리는 전문가를 온전히 쓸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다. 그들은 좌절 속에서 고뇌한다. 어떤 사람들은 결국 몇 년 후에 이 나라를 떠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 단체를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은 컨설턴트가 되어서 자신의 특정 분야에서 전문적인 훈련과 조언을 제공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리네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궁극적으로 조국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이러한 학생들에게 그들의 좌절이 예리한 통찰을 개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나는 칼빈이나 루터 같은 사람들이 어지럽도록 다양한 책임을 감내해야 했고 그래서 피로의 안개에 뒤덮인 채로 자신의 은사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도자로서 또 여러 책의 저자로서 한 수고의 열매는 교회에 커다란 복이 되었다.


좌절과 성취 

바울 신학은 우리가 창조세계의 구속을 기다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인내로써 좌절을 견뎌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울은 우리가 이러한 좌절로 탄식하고 있다고 말했다(롬 8:18-27). 내가 보기에 우리는 사명 성취를 이해하면서 이러한 좌절까지를 포함시켜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교회가 그들의 일꾼들에게 성취를 잘못 이해시키면 교회는 병들고 말 것이다. 이야말로 교회가 그토록 피상적이고 천박해지는 이유일 수 있다. 우리는 세상 기준으로 성공을 측정했고, 완전히 다른 성경적 방식으로 성취를 이루면서 세상에 도전하는 데 실패했다.

오늘날 효율성과 측정 가능한 결과를 강조하는 풍토는 좌절을 더욱더 견디기 힘들게 만든다. 과거 4세기 동안 서구에서 일어난 산업과 기술의 발전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만들었다.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한때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에서도 필수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권리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헌신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상은 타격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 교회와 기독교 기관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족은 아주 비효율적인 기관이다. 건강한 가족이라면, 한 사람에게 커다란 필요가 생길 때 모든 것을 중단한다. 우리는 이러한 헌신을 그리스도의 몸 된 생활에까지 기꺼이 확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헌신과 공동체

공동체 생활에 관한 성경적 모델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근거한다. 즉 한 지체가 다른 지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그러한 모델이다(요 15:12-13). 기독교 리더십의 모델은 선한 목자의 모델로, 그 선한 목자는 위험한 상황에서 양떼를 버리고 달아나지 않고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을 섬기게 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섬기는 자들을 위해 와서 죽으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고 그들이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에라도 우리는 그들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섬기고 그들이 자기 문제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사람들이 우리를 거스를 때에라도, 당신들을 섬겨줄 다른 장소를 찾아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의견 일치를 보거나 의견 차이를 서로 인정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수고한다.

사람들이 교회 프로그램이 자기한테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를 떠나면 그것은 아주 치명적인 메시지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일에 헌신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리스도와 복음이 아니라 주로 일에 근거해 만나고 한 몸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결과 슬프게도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기댈 수 있었던 공동체와  안정감을 잃는다. 그들은 얄팍한 개인으로 남아, 참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이 모임 저 모임을 전전한다. 프로그램에 헌신한 교회는 수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성경적 그리스도인을 양육하지 못한다.


사람들을 가까이하는 일은 좌절을 불러온다. 분노나 상처를 품은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데 여러 시간을 쏟는 것은 그리 효율적이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런 일을 처리해줄 전문가들이 있는데, 왜 굳이 우리가 거기에 시간을 들여야 하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가 해주어야 할 일을 대신해주는 상담가를 만난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상담가는 진단을 하고 어려운 경우를 다룬다. 친구들은 용납과 위로와 우정을 통한 치유가 일어나도록 함께해준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대개 그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가 돕고자 하는 상처 입고 분노한 사람들도 우리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들에게서 상처를 입은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헌신한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구를 위해 죽으라고 명하셨기에 우리는 그 고통을 참는다.


전쟁 때문에 황폐해지고 복음전도에 적대감을 표하는 나라에서 사역하기가 힘들고 좌절스러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실제로 나는 고난을 겪었다. 몇 달 전에, 우리 간사 한 명이 끔찍한 폭행을 당한 후에 살해되었다.그러나 내 생각에 가장 심각했던 고통은 내가 지난 34년간 섬겼던 ‘십대선교회’(Youth for Christ)에서 받은 고통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과 가족 바로 다음으로 ‘십대선교회’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었다. 동양에 살든 서양에 살든,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사람은 반드시 고난을 겪을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고난이다. 우리는 관계를 끊거나 좀더 ‘성취감을 주는’ 일들로 옮겨서 고통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우리가 잃게 될 것은 무엇일까? 


몇 년 전, 서구를 여행하면서 헌신에 관한 메시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자신이나 가까운 지인이 어떤 문제 때문에 모임이나 사람과 결별했다는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셋이나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은 불행한 결혼생활을 접었다. 다른 사람은 교회를, 또 다른 사람은 단체를 떠났다. 각 사람은 그런 결별 과정을 고난에서 벗어나 은혜 가운데 놓여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우에도 끝까지 남아 고난을 견디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가 아니었을까 하고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외부의 압박이냐, 자발적 섬김이냐

필요할 때마다 내가 기도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 그들에게 극심한 피로를 호소하기도 한다. 내가 그런 내용으로 편지를 보내면, 하나님이 나를 강건하게 해주시고 내 일정 가운데 나를 인도해주시도록 기도하겠다는 답장을 많이 받는다.그런데 서양 친구들과 동양 친구들이 반응하는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많은 서양 친구들로부터는, 과로로 인한 피곤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증거로 생각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물론, 외부의 압박과 불안정감으로 인한 과로로 아팠다면 그러한 판단은 잘못이다. 그러나 바울처럼 우리가 사람들을 섬길 때는 피곤을 견뎌야 할 때도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그 일 때문에 고난당할 것을 분명히 밝힌다. 피곤, 스트레스, 긴장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십자가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으로 인한 신체적 어려움에 관해 말했는데, 그것은 감정적 긴장(갈 4:19; 고후 11:28), 고뇌(고후 11:29), 불면증과 배고픔(고후 6:5), 심신의 고통과 혼란(고후 4:8), 진을 빼도록 일하는 수고(골 1:29)를 포함했다. 바울은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라고 말하는데, 오늘날처럼 ‘몸을 돌보는’ 사회에서는 철저히 반문화적인 내용이다. 또한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1-12)라고 말한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본문들에 접근하면서 어떻게 이 구절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묻기보다는 그저 학문적인 관심에 그치는 것이 안타깝다.


시간의 횡포 아래 고군분투하는 서양 사람들은 휴식의 필요성에 대해 동양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것이 많다. 동양 사람들은 사람에 헌신할 때 발생하는 신체적 문제들을 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서양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다. 사역 때문에 신체적으로 고난을 겪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고난이 결실과 성취를 향한 통로로 들어서기 위한 피할 수 없는 발걸음임을 믿는 사람들보다 그 문제로부터 더 많은 고난을 겪을 것이다. 십자가가 제자도의 기초적 측면이기 때문에, 교회는 교회 지도자들이 고통과 곤경을 예상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이러한 관점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 때, 고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쁨과 만족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고난과 기쁨은 열여덟 군데 다양한 신약성경 구절에서 함께 나타난다. 사실상 고난은 종종 기쁨의 원인이기도 하다(롬 5:3-5; 골 1:24; 약 1:2-3).


복음의 영광

건강과 외모, 편리함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곤경을 견디는 가운데 기쁘고 만족하게 살아감으로써 복음의 영광을 분명하게 드러내라고 그들을 부르고 계신다. 만족하지 못할 일들을 추구하고 나서 별 성취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삼가면서도 즐거워하고 만족해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놀랄 것이다. 이것은 쾌락주의 문화를 향하여 복음의 영광을 확증하는 새로운 방식일 것이다.

나는 교회가 많이 염려스럽다. 서양은 급속하게, 복음이 닿지 않는 지역이 되어가고 있다. 성경과 역사는 고난이야말로 복음이 닿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본질적인 요소임을 보여준다. 서구교회가 고난의 신학을 상실하면서 비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을까? 동양의 교회는 성장하고 있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이 고난을 겪는다. 서양은 막대한 자금과 교육을 동양에 제공한다. 그러한 자금과 교육을 통해 영향도 함께 미친다. 만약 지금 고난을 겪고 있다면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메시지를 서구인들이 동양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면서 십자가를 내려놓도록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건강하고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동서양을 불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확고히 고난의 신학을 견지해야 한다.



아지스 페르난도(Ajith Fernando)는 1976년부터 스리랑카 ‘십대선교회’ 총무로 사역했다. 또한 아내와 함께, 주로 가난한 도심 1세대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콜롬보 지역의 한 교회에서 섬기고 있다. 「고난과 기쁨, 그 역설의 믿음」(디모데 역간), 「예수님이 이끄시는 사역」(생명의말씀사)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