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다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다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2년 5월 16일 수요일

사역자의 기쁨, 선교사의 기쁨


사역자의 기쁨, 선교사의 기쁨

  "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 (요한복음3:29,30 새번역)

두 주전에 어떤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선교사로서 나는 어떤 기쁨을 가져야하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든 까닭은 다음과 같다. 당일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일본사회에서 자리를 잘 잡은 중국인들이었다. 나만 한국인이었다. 늘 중국인 사이에 나만, 혹은 우리 가족만 외국인이었지만, 그날은 낯선사람들을 만나서 그런지 더욱 긴장되었다. 중국어 발음도 더 신경쓰이고 그랬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친철하고 예의바르고 세련되었다. 그리고 모두들 좋은 말을 내게 해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 사람들중에(중국인들이) 누군가 작정하고 내게 적대적으로 대한다면 내 마음은 어떻까?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 그 언젠가 내가 사역하는 중국인 사역현장에서 독한 중국인 한 명이 나와 내게 험하게 공격한다면 나는 감당해낼 수 있을까? 그로 인해서 내게 주신 중국인에 대한 애정이 사그러지고 무정(無情)해지면 어떻게 하지? 다행히 중국인 사역을 한지 근 10년이되는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며 잘 대처해 낼 수 있을까? 

자신을 왕따시키는 학교에 정이 떨어지고, 자신을 무시하는 직장을 관두고 싶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 곳을 사임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특히, 나는 마음이 약한 것이 약점이다. 상처를 쉽게 입는 편이다. 맞서 싸우지 못하고 뒤돌아가서 신음하는 스타일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약하다. 어떻게 이런 약한 기질을 극복하면서, 중국인 사역에 대한 부르심을 다하고 이 길을 끝까지 다 달려갈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있을 때, 읽고 있던 요한복음 3:29,30이 새롭게 와 닿았다. 

1. "신부를 차지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신랑이다." 

중국인들을 차지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신랑되신 주님이시다. 나는 이 신부된 양무리들을 신랑에게 소개하는 자이다. 요한처럼말이다. 내가 신부된 양무리들의 마음을 얻는 기쁨, 그들의 인정을 받는 기쁨, 사랑을 받는 기쁨도 내려 놓아야 한다. 이런 기쁨들은 내가 신부를 차지하는 신랑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갖게 한다. 이 착각이 비극의 시작이다. "신부를 차지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신랑이다". 신랑이 신부를 차지하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쁨이다. 행복이다. 

2.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
     뻐한다."

사역자 된 나, 선교사된 나는 무엇으로 기뻐해야하는가?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그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신랑의 소리다. 결코 신부나, 그 주변인이 아니다. 기타 사람들의 소리가 아니라, 신랑의 음성이다. 이게 사역자를 선교사를 크게 기뻐할 수 있게 한다. 신랑과의 인격적인 관계, 신뢰, 기대에서 오는 기쁨이다. 신랑을 만나는 기쁨이다. 신랑의 음성은 하늘의 소리요. 땅의 양식이다. 신랑의 음성만이 진정성 있는 기쁨이다. 사역도, 사역의 열매도 큰 기쁨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이런 일들이 기쁨과 보람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쁨을 사탕처럼 하나 하나 즐기다며 보면, 신랑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아니 신랑의 음성을 듣고 싶어지지 않는다. 듣고도 못들은 척 하는 수준에 이를수도 있다. 그리고 점점 자신이 신랑인듯이 착각하고는 신랑의 기쁨에 한다리 걸쳐놓고 신랑행세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거짓 기쁨이다. 불의한 기쁨이다. 

요한은 신랑의 음성으로 크게 기뻐했다.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요3:29). 나는 신랑의 음성을 듣는 기쁨을 맛보고, 맛보고, 또 맛보면서 여기에 인이 배기고 중독이 되어야 한다. 신랑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하는 기쁨으로 가득차야 한다. 이 기쁨이 내 안을 채워나가고, 내 삶을 채워가날 때, 나는 선교사로서의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기쁨이 동기가되고 수단이 되고 목적이 될 때, 그 어떠한 혹독한 공격앞에서도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랑이 있고, 신랑의 음성이 있는데 그 무엇이 더 필요하랴! 

며칠 전, 동경 기독 중국인 펠로우쉽을 섬기면서 아주 작지만 이 기쁨을 다시한번 맛 보았다. 거의 처음으로 오십여명의 사람들이 자기교회 사람들이 아닌 동료 크리스천들을 만나며,  서로 인사하고, 이름을 주고 받고, 교제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아무도 나를 안 찾아 준다할지라도 그 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기뻤다. 그들이 흥해가는 것이 얼마나 흐믓하든지!

3. "그는 흥하여야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선교사만큼 이 쇠하는 기쁨, 흥하는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기쁨을 누리는 소명으로서의 직업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직업적으로(?) 떠남이 전제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현지인이 흥해지면 차츰 쇠해져야하는 것이 외국인 전도자다. 이 점이 내 개인적으로는 지역교회 목회와 많이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도 흥하고 나도 흥하는 케이스가 있긴 하다. 그렇지만 선교지에 그런 케이스는 결국 건강하고 자립적인 현지인 공동체 건립을 지체시키는 주 원인이 된다. 내 존재의 필요성이 갈수록 작아질만큼 현지인의 자립성이 높아지는 것이 사역자로서의 성공이다. "그는 흥하여야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아멘!!

그들이 서로 친해지고 흥해가는 것이 내 기쁨이다
(5월13일, 동경 기독 중국인 연합 Fellowship)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나의 설교 - 추구와 스타일 전환중

나는 지난 8월부터 설교, 그 추구와 스타일을 갱신하고 있다.

우선은 적은 본문에서, 좀 더 긴 본문으로 바꾸었다.
예를들면, 출애굽기의 경우, 전체 출애굽기를 다섯번의 설교로 마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렇게 할 경우, 깊이 쪼개고 살피고 살을 붙이고 하는 작업을 들하게 된다. 지난 몇 달간 긴 본문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으로 설교를 해보니, 본문에 살을 붙이지 않고 오히려 본문에서 살을 빼는 작업을 더 많이 해야 했다. 심지어 십계명 전체도 한 설교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전체 흐름에 분문을 맡기게 되고,  본문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말씀하게 하는데 더욱 적절한 심플한 설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심플한 설교는 너무 단조롭고, 가볍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심플함으로 포인트가 잘 드러났고, 본문 자체가 말씀이기에 가볍지 않았다. 내가 설명을 더 하고, 예화를 붙이고, 목소리를 높여서 길게 얘기해야 무게가 실리는게 아니었다. 지난주 한 형제의 설교후 sharing은 그 점을 증명해 주었다. 나는 설교중 출애굽기 20장 뒷부분을 지나면서, 하나님을 경외함을 본문 그래로 거의 읽는 수준으로 전달했는데, 그 형제는 굉장히 진지하고 무게 있게 받아들였다. 그야말로, 내가 말하지 않고, 말씀이 말씀하셨음이 보여진 것이다.  

긴 본문을 다루다 보니, 성경자체가  강조하는 부분, 특히 중복해서 다루는 부분이 잘 드러났다. 너무 짧은 본문을 다룰때는 긴 시간이 지나야 성경의 66권중에서, 겨우 한 권을 다룰 수 있는데, 그럴때 성경전체의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 너무 깊이 좁게 들어가 버려, 나무만 보이고 숲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긴 본문을 다룰 때는 그 그림, 숲이 더 잘 보이게 된다. 설교자뿐 아니라 회중도 그렇다.

또한, 전체 성경을 통전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나와 회중에게 성경을 한 구절, 한 구절의 나열로 보지 않고, 한권 한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분의 말씀이라는 통전적 시야를 준다. 보이지 않게 그런 관점이 생겨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나 개인적으로는 내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구약의 많이 다루지 않는 부분들 (예를들면, 레위기, 민수기...등)을 잘 전달할 수 있늘까? 하는 우려도 있었는데,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은 자신감이 생겼다. 몇달을 이렇게 설교하면서, 구약본문의  중국어 단어들이 어렵고 익숙하지 않다 보니, 내말로 표현하기 보다는 성경본문을 그대로 읽는 일이 많아 졌는데, 오히려 이 점이 나의 중국어를 더 진보시키고 있다. 준비하면서 읽고, 하면서 읽고, 나누면서 읽고, 계속 반복하면서 어려운 고유명사들을 읽다보니 조금씩 익숙해졌다. 지금까지 구약의 여러 이름, 지명, 단어들은 중국어로 익숙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좀 더 좋아질 것 같다. 자꾸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니, 구약의 이름, 지명, 단어들이 중국어로 더 익숙해지고, 조금씩 입에 붙게 되는 것을 느낀다.

얼마전 한 후배(설교를 전공한)의 facebook에서 이런 글을 봤는데, 많이 와 닿았다.

"하나님은 우리 설교의 창의력에 점수를 주지 않는다.
 설교가 얼마나 신실하고 분명한가에 점수를 준다.-해든 로빈슨"

많이 공감하는 말이다. 창의적으로 설교하려기 보다, 조금 더 신실하고, 분명하게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전달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설교의 길이다.  



2010년 11월 7일 일요일

중보기도에 관하여.....

중보기도라는 단어는 논란이 많은 단어다. 이 용어를 중국어로는 代祷(대도)라고 하는데, 기독교계에서는 카톨릭적인 냄새가 나는 단어라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그 용어의 사용이 어떻든, 우리에게 대도는 중보기도라는 단어로 인식되어 있음으로 이곳에서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쓰도록 한다.

중보기도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 인용하고, 그 인용에 내 나름대로의 묵상과 해석을 더해보고자 한다.

"Your part in intercessory prayer is not to enter into the agony of intercession, but to utilize the commonsense circumstances God puts you in, and the commonsense people He puts you amongst by His providence, to bring them before God’s throne and give the Spirit in you a chance to intercede for them: In this way God is going to sweep the whole world with His saints"
(챔버스의 매일묵상 11월7일)

"중보기도에서 우리가 할 역할은 어떻게 중보기도를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 갖다 놓으신 일상적인 환경들과 사람들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려 드리고서, 우리 안에서 계신 성령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할 기회를 갖게 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온 세상을 그의 성도들과 더불어서 다스려 가고자 하신다."

이 묵상은 로마서 8장을 배경으로 한다.
로마서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중보기는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보기는 하나님이 일상에 만나게 하시는  사람, 일과 그 호흡을 같이 한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지금 바로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사람과 일들, 그리고 그전의 삶의 과정가운데 주어졌던 사람들과 일들이 내 중보기도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보좌위에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그것들을 품고 기도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실 수 있도록, 내 삶에 허락된 사람들, 일상들을 기도의 자리에 내놓는 것이다. 우리 안의 성령님이 우리를 품고 덮고 이끌고 기도하심으로 세상을 섬기신다.

그럼으로, 내가 내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먼저 내 마음에 품고, 기도 가운데 내 놓을때, 놀라운 성령님의 터치가 기도 가운데 주어진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중보하시는 것이다. 전에 알지 못했는 생각, 방법, 방향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무거웠던 것이 가벼워진다. 누리지 못했던 평안과 기쁨이 솟아난다. 그리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확신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땅가운데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그분을 보게 됨으로 나는 더욱 잠잠하고 작아진다. 그분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며, 더 벅찬 경외감으로 그분을 보게 된다.그래서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향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그분의 일의 동역자가 되어 이 세상을 섬길 수 있는 영광스러운 중보기도의 특권을 주신 것이다.

나는 이만열목사님의 중보기도를 잊을 수 없다. 이 분에 관해서는  "사람 그리고 만남"에 이미 기도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으니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그분의 기도는 여전히 내게 큰 자극이요 도전이다. 매일 1500여명 이상을 품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그의 기도는 그분을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는 복된 자리였다.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임재함으로부터 오는 신령함이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이 기도였으리라 믿는다.

오늘도 그 복된 기도의 자리에 나를 부르셨다. 감사! 감사! 감사!



2010년 8월 4일 수요일

사람을 사랑함-목양(1) 잠27:23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다.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이외에 인간 존재 근본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격려를 격발시키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롬5:5) 사랑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21:15-17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부활이 증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것, 그들을 목양하는 것이다.

왜 목양일까? 왜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섬겨야하는가?
거기에 삶의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인생의 진미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을 더욱 더 사랑하고, 더욱 더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목양를 하다보면, 가족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에 눈이 떠간다. 타인에게 관심 갖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애쓰게 되고, 결국에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 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그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부지부식간에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랑으로 범벅되어 살다가 사랑에 물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목양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절대 전임 사역자들에게만 떠 넘길 수 없는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특권인 것이다.

목양이란 무엇일까?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잠언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잠언27:23에 의한 목양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첫째: 내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내가 알게 되고, 관계 맺게 되고, 마음을 주신 그 양무리의 형편을 살펴야 한다. 양떼는 형편을 살펴 주어야만 잘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다. 목자의 도움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동물이다. 목자가 어떤 사람이냐? 가 양떼의 생명, 복지를 좌우한다. 그래서 선한목자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나는 선한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예수님은 목숨을 희생한 선한 목자였다. 양떼된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예수님은 목숨을 우리에게 주기로 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것 외에는 정말 방법이 없는 그런 양무리이기 때문이다. 중국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 구절을 번역했다. "你要详细知道你羊群的景况,留心料理你的牛群"。详细知道 상세하게, 자세하게 자기 양무리들의 처한 상황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상세히 알아야한다고 해서, 스토커처럼 의심, 불신, 강요로 알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기초한 긍휼이 넘치는 관심을 말한다. 그야말로 사랑으로 그 양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가 필요한 것, 힘들어하는 것, 기뻐하는 것, 살아가는 것...... 이런 것들을 알아 가는 것이다.  

양떼의 형편을 잘 살피려면, 관심이 그들에게 있어야 한다. 무관심이라는 장벽을 뚫어야 한다. 관심을 갖는 것이 버겨운 시대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관심하도록 교육 받았고, 자라났고, 훈련되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심을 갖지 않는 시대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무관심으로 일어나는 수 많은 사건과 사고를 볼 수 있다. 조금만 관심이 있었어도, 애정과 긍휼로 귀를 조금만 기울였어도 죽지 않을 생명들이 사라져 간다.

나에게 무관심 타파는 참으로 쉽지 않다. 타고난 무관심(?)의 본성을 가진 나로서는 남에게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버겹다. 관심을 가질 때, 오는 정신적 부담감, 심적 무게감, 긴장감이 너무 크다. 이 점은 아내와 매우 대조적이다. 아내는 타고난 관심의 본성을 가졌다. 사람들의 형편, 그들의 고통, 아픔에 자신을 자주 오버랩 시키기까지 한다. 반면,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삶을 나누는 것이 참 쉽지 않다. 그것이 내가 잘 해야할 목회자의 일임에도 그렇다. 심할때는 모임을 하려고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한 동안은 내가 목회가 아닌 다른 사역을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심각하게 고려했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주님을 알아가면서 이런 어려운 점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관심을 가지려면, 두가지를 해야하는 것 같다.

첫째는 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다. 한 식탁에서 밥을 먹으면서, 천천히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듣는 것이다. 그의 지금과 부딪친 일들과 사건, 사고, 문제들을 듣는 것이다. 삶의 희,노,애,락을 귀로 듣는 것이다. 얼굴을 보고 밥을 먹으며, 얘기를 들으면 관심이 생긴다. 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얘기하다보면, 그와 나의 개인적인 관계가 생긴다. 그가 내 밥을 같이 먹는 식구(食口)가 되는 것이다. 가족으로서의 관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두번째는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나눈 사람을 마음에 품고, 그의 삶의 얘기들을 떠 올리며 기도하면 그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전에 안보이던 것이 보인다. 그 전에 안 생기던 감정이 생긴다. 긍휼, 사랑, 연민 그런 것 말이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계신 영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그리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무관심"이라는 내 본성이 조금씩 변화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내게 절대 책임이 있는 가족이 생기고 나서 부터는 더욱 그렇다. 아내와 아이들, 늘 나의 무관심을 돌파해 주는 지원군들이다. 목회와 가정이 나를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모임에 대한 스트레스는 급속히 줄었다. 왜냐하면, 두 세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형제 자매들 안에 계신 영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대감과 신뢰감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목회와 가정의 두 날개를 가진 나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둘째, 네 소떼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목자는 양무리(소떼)에게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게 목자의 본분이다. 그 무엇보다, 그 어떤 일보다 거기에 마음의 우선순위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 마음을 두고 그들을 바라보고, 마음을 두고 그들과 대화하고, 마음을 두고 섬겨야 한다. 그것이 선한 목자의 자세다.

요즘 나는 "장기려 그 사람"이라는 책을 읽는다. 장기려 박사의 전기다. 그 어떤 환자든 예수님이 보내주신 양으로 보는 그의 삶이 은혜롭다. 예수님이 보내주신 양무리, 그들에게 내 마음을 두는 것이다. 마음을 뺏기는 것이다. 그것이 목양이다. 나는 어디에 마음을 잘 두는가? 참 한심하고, 가련하고, 부끄럽다. 마음 있는 곳에 보물이 있는데 말이다. 양무리로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는 오늘을 살기를 기도한다.

아래그림: 선한목자를 그린 카타쿰의 벽화, 그리고 그림들


2010년 7월 23일 금요일

내안의 "옛 자아"가 죽는 네가지 방법!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에서 언급한 우리 자아의 죽음은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결국 우리의 문제는 죄의 문제이고, 죄의 문제는 내 안에 내가 살아있는 문제라는 것을 절감한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생활에서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주 그럴싸하고 교묘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여간 분간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볼 필요도 없고, 그동안 내가 행한 생각, 이에 따른 언행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하튼, 내가 철저히 십자가에 못 박혀 완전히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실제 생활에 필요한 행동 지침이 있다. 나는 최근, 휴스톤 침례교회의 최영기 목사님의 강의를 시디로 듣다가  자아의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실제 행동 지침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초를 얻었다. 그리고 그 단초에 기초해서 몇 가지 내 나름의 생각을 추가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완벽한 과거 완성의 사건이 내 삶에 구현되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힘있게 행하시려면, 다음과 같은 원칙을 갖고 살아야 한다.

첫째, "기분 나쁘다" 라는 생각, 기분을 갖지 말고, 거기에 영향받은 언행을 하지 말자!
여하튼, 내 기분이 나쁜 것이 문제다. 기분이 나쁠 일들이 적지 않는데, 기분 나쁘다는 판단이 서면, 그로 인해 각종 악이 자라나게 된다. 억울함, 미움, 분노, 적개심, 불공정...... 각종 더러운 것이 안에서 자라고 나오게 된다. 기분 나쁜일들이 없을 수 없지만, 갈2:20절을 기초로 볼 때, 기분 나빠하는 자체가 큰 문제다. 왜냐하면,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었으면 기분이 나쁠수가 없다. 어떤 얘기를 듣던, 내가 죽어 있다면, 그렇게 민감해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죽지 않고 살아서 기분 나빠하는 나의 옛 자아다. 이제 기분 나빠하는 나는 죽었다. 이제 그 어떤 가운데서도 "기분 나쁘다"라는 기분, 생각, 감정이 나의 마음, 행동을 지배하지 않토록 힘을 다해 싸우겠다.

둘째, "무시 당했다"는 생각, 기분을 갖지 말고, 거기에 영향받은 언행을 하지 말자! 
말이나 행동으로, 혹은 절차나 도리로 나를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면, 별일이 다 일어난다. 사회에서는 각종 폭력과 살인의 주 원인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서 발원한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하는 많은 것들이 무시당했다는 기분, 생각이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또 거기서 각종 악이 자라난다. 큰 문제다. 왜냐하면, "무시 당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나의 옛 자아가 죽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다. 내 옛자아가 죽었다면 어떻게 "무시 당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의 노리개가 되어서는 안된다. 혹 무시 당할수 있는데, 나는 죽었음으로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수 많은 오해와 서로 원수됨의 죄악을 면할 수 있다.

셋째,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 자기 편리주의"를 극히 경계하자!
인간의 자기 중심적 생각, 자기 편리주의적 발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 민족, 한 개인을 묵사발 만드는 식민지배나, 폭행을 저지르고도, 피해 받은 사람들을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이 지극히 자기 중심주의적이고, 자기 편리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성, 객관성, 상대방을 고려하는 이타심이 없다. 그냥 자기 편한대로 생각하고 믿는다.

나는 이런 동일한 위험이 우리와 같은 목사, 선교사들에게 더 쉽게 더 많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예를 종종 본다. 그런 예를 살펴보면, 그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은 객관적 기준, 특히 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사랑, 구원, 성결......등이 아니고,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편리적인 발상들이다. 자기가 범죄하고 있으면서도, 그 범죄의 상황도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자기 편리주의적인 해석을 한다. 그야말로 영혼이 혼미해진 것이다. 자기가 죽었다면, 자기를 위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그 누구도 이용하려하지 말자, 도리어 이용 당하자!"
아무리 좋은 말로, 미사어구를 동원하더라도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이 아니면 행해서는 안된다. 옛 자아는 아주 영악해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속인다. 그 흔한 속임수 중에 하나는 타인을 이용하려는 파렴치한 행동이다. 물론 아주 잘 포장되어 있어서 그렇게 파렴치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두번 세번 생각해보면, 기도해보면 알 수 있다. 이 생각, 이 행동이 나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를 이용해서 더 풍성한 생명을 얻으려는 것인지 말이다. 죽지 않은 옛자아의 특징은 이기심이다. 이기심이 발동한 생각, 행동을 통해 사람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목회자인 내가 극히 경계해야할 것은 양무리를, 교인들을 이용하려는 생각이다. 그들의 덕을 보려는 작은 언행들도 경계해야 한다. 양무리가 피와 땀을 나를 위해 흘리게 해서는 안된다.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만 그들의 희생이 가치있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이용당하는 것이 낫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그야말로 바보같은 행동이다. 그렇지만 다 내주고, 내 버리신 그 분처럼 말이다.
 
갈2:20의 말씀이 내 삶속에 더욱 힘차게 구현되려면, 그리고 내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심이 확실해지려면, 나는 나를 침투해 들어오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 자기 편리주의를 극히 경계하고 극복해야 한다.










 
 
 

2010년 7월 19일 월요일

하반기 설교에 대한 구상

상반기에 설교는 
예수님에 관한 설교였다. 당연히, 복음서였지요! 복음서중에서 요한복음을 1장에서 21장까지 설교했다. 회중이 대부분 처음 교회의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그분의 놀라운 사람, 섬김, 희생, 죽음, 부활, 기적, 말씀.......을 함께 나누는 시간은 복된 시간이었다.

안식년을 지나면서, 제가 설교하는 스타일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너무 세세히 쪼개고 분석해서, 깊이 나가는 것을 지양하고, 할 수 있으면 넓게 보고, 복음서의 큰 흐름 속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살펴보는 것이었다. 좀 더 평범해지고, 심플해졌다고 자평한다.

이를 통해서 얻게된 좋은 점은 설교에서 성경을 통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너무 길지않은 시간에 요한복음 전체를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금년도 하반기 설교는 이렇게 하고자 한다.

먼저는, 성경을 통전적으로 보면서, 핵심을 다루는 통전적 접근을 유지하려 한다.

둘째는, 심플한 접근하고, 심플한 해석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성경자체가 가지고 있는 통전적 메세지가, 지협적 파헤침보다 더 크게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소망한다.

셋째는, 구약(창세기12장부터) 성경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우려고 한다. 그러면서, 매월 마지막 주에는, 요한복음에서 기록하지 않은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에 나타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우려고 한다.  

이런 접근을 시도하는 가운데, 몇 가지 극복해야할 과제도 있다.

첫째, 성령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도행전, 서신서에 나타나신 위대한 성령님의 사역들을 통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알려야 한다. 그리고 이보다 더 노력해야할 부분은, 성령님을 기도와 삶 가운데 체험하며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설교를 주로 창세기와 복음서를 다루면서 이 성령님의 부분을 놓치지 않고 잘 안고가는 것이 숙제다.

둘째, 중국어의 진보다. 하반기 설교도 계속해서 중국어로 진행된다. 현재 중국어 설교 5년차다(안식년 1년 제외하면). 목회사역의 특성상, 매주 설교를 해야 한다. 이 덕에 중국어로 설교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발음도 안식년 기간동안의 북경연수(?)를 통해서 좀 더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어 전체의 수준향상의 문제에 걸려 있다. 좀 더 높은 수준의 중국어로 표현되어지는 설교, 중국인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터치할 수 있는 언어구사력이 절실한 습득 과제다. 이를 위해서 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어를 수준 있게 구사하면서도, 회중에 터치하는 힘이 있는 중국인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 익히는 것이다. 이는 전에도 시도해 본 적이 있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별로 진전이 안보이는 투자다. 그렇지만 꾸준히 장기적으로 해 나갈 경우, 나의 중국어 설교 수준의 근본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2010년 4월 3일 토요일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묵상하면서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시간을 글을 쓰면서 잘 정리해보려고 한다. 늘 궁금했던 성경구절들도 있고, 매우 인상적이었던 성경구절들도 있고, 좀 더 확실하게 붙들고 싶은 성경구절들도 있어서, 이런 구절들을 좀 더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되새김의 유익을 누리고, 푸른 나무의 영양분들을 공급받는 바램으로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다"를 해보고자 한다.

이 칼럼은 말씀구절을 좀 더 연구하고, 내게 적용하고, 경험하는 장이 될 텐데, 매우 주관적인 해석이 장이 될 소지가 높다. 왜냐하면,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탐구하는 여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글을 씀으로써, 나 자신이 정리의 유익을 누리고, 나눔의 유익을 누리기 원하기에 이곳에 기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게되는 분들이, 그런 주관성을 주의해서 읽어주시고, 이를 통해서 좀 더 성경말씀에 대해 고민하고, 묵상하고, 되새김질해보는 유익을 누리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