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합니다! 欢迎光临! ようこそ! 일본에 있는 디아스포라 중국인들을 위해 사역하는 박수민,송수아 선교사의 블로그입니다. 이 공간은 디아스포라 중국인 사역을 위한 네트워킹과 커뮤니케이션 공간입니다.
2016년 7월 7일 목요일
Book download(Chinese, Korean) - 散居華人事工一撇 / Diaspora Chinese Ministry in Japan / 한눈에 보는 디아스포라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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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2일 일요일
首次在日华人联合短宣之回顾
在日华人基督徒中心(JCC)主办的泰国短宣,于 1 月 6 日到 11 日期间,访问了短宣目的地,泰 北清迈国境地带的华人难民村----大谷地。大谷地是泰北国境地区的中心,居住着 30 万中国 难民。其中一部分是国民党士兵,战争结束后没
有回归本国,成为残留在泰国的难民;还有一部 分是因为经济问题,从缅甸和云南流入此地的华 人。这些难民中,80%无国籍,身份与未来都不 安定。
这次的短宣队,由7家在日华人教会联合组 成,队员们持有 4 个国家的护照,一共 16 人。 令人注目的是,这支短宣队,不是来自一个单独
的教会,而是来自7家教会的圣徒参加的联合宣 教队。此外,这次短宣,得到了众多教会的祷告 和奉献支持,在此,向众教会和弟兄姐妹们表示 由衷的谢意。 这次短宣的全体队员们,都接受了正式的
宣教训练课程。训练一共有 8 次,合计 20 多个 小时。其内容大致有 3 部分,①有关宣教的总体 认识与理解(从圣经、历史以及战略的角度);
② 开 拓 教 会 运 动 (CPM: Church Planting Movement)的理论及实习训练;③个人敬谦生活 的训练。有 5 位讲师(加拿大籍华人宣教师,驻 泰国韩国宣教师,日本人牧师)参与培训和授课。计划系统的训练课程,并在短宣出发之前 接受训练,这是很自然的短宣步骤。因此,事先 让参加者认识短宣的步骤,再接受训练是极其有
意义的。最重要的训练内容是队员们的每日灵修训练。即,有计划地每天阅读 4 章圣经,从中选 出一章,将其灵修内容作出笔记。短宣队员们,
每周至少写 5 次,一共连续写了 10 周以上的灵 修笔记。通过这项训练,参加训练的队员们,养
成了终身受用的灵修习惯。
在大谷地,短宣队的主要活动是:难民村的学校授课交流;开拓教会(CPM)的训练与实践;与难民村孤儿和生活困难孩子们的交流。这
田園詩歌般的鄉村,对于来自于繁华大都市东京 的我们来讲,真是莫大的祝福。清晨,“咕咕 ---咕”的鸡鸣声,把我们从睡梦中叫醒,真是 久违了的情景。难民村孩子们,那纯粹的目光,
质朴的态度,还有那田园风光⋯⋯一切的一切都 是赐予我们的美好祝福。在当地,以难民第 3 代,4 代为主的华人学 校,从建校起在短短的时间内就接纳了870名学 生。在该学校里,短宣队员们给孩子们上了 5 节课,分别教授日文,中文,英文歌曲等等;享受 了与孤儿院的孩子们一起做游戏,赞美,分享交 流的美好时光。另外,队员们还在当地,每天接 受 CPM 训练,并且到村子里、街头上实践传福 音。在传福音,或宣讲救恩真理的时刻,队员们
亲眼看到了圣灵的动工。特别是,短宣中无可取 代的体验是,队员们通过这一周的共同生活,彼 此认识更多、理解更深,更加相爱。来自不同教 会的队员们,起初,彼此不太了解,不够亲密,
但是,经过一段时间,友情增加了,变得互帮互 助彼此扶持。最后,大家挤在一间小小的房间里, 分享彼此的得救见证,那时,我的心充满了平安 和喜乐,仿佛置身在亲密无间的骨肉之情的大家
庭里一般。
这次在日华人联合短宣,是一次新的挑战。 为此,我们越过了重重障碍。从日本忙碌的生活 中走出来,参加短宣,跨越教会间的墙壁,经历
共同事奉的时光。从自己所属的教会信仰生活 中,到追求共同开拓教会运动中,迈出了重要的 一步。
在日华人有宣教的充分实力。人力、财力、灵性方面,都有极大的潜能。因此,这次短宣, 就是发现宣教的需要,使这个能力与世界宣教连
接上了。从短期宣教,进入长期宣教;从个人宣 教,发展为集体宣教;从泰国清迈的大谷地开始, 扩展到非洲、中东等等,这些需要中国宣教师的 地方!同时,也需要更多的在日华人献身于这宣
教士事工中,当然,日本也是我们华人基督徒宣 教的重要舞台。与此同时,我们努力使日本成为 培训众多华人基督徒成为宣教师,并差派他们到 世界各地宣教的基地。
这次短宣的意义,可以归纳为以下几点:
第一,在日华人基督徒之间,“宣教”这个词汇和意义,开始在日常生活中鼓动萌芽。时间、 关心焦点、祈祷、会话、资金等等,都会和“宣教”这个圣经的中心话题连接到一起。这是到目 前为止,未曾有过的现象。亲身体验宣教的人, 诞生了,这也给参加本次短宣的各教会带来不少
的反响。体验者们把自己的感动,向自己身边的 人传讲。本次短宣验证了日华人基督徒的宣教潜力,仿佛在静静的湖面上,掀起了宣教運動(Mission Movement)的浪花。这是极其重要的, 是前所未有的。
第二,为在日华人短宣创造了一种模式。从招募队员开始,到训练、支持、总结(报告和白 皮书)等,一系列的短宣活动,将来会逐渐成为一个在日华人宣教的模式。这是很有意义的地 方。
第三,通过这次短宣,“短宣的生命种子”萌芽了。这次短宣的主要目标是接受开拓教会 (CPM)训练。这也是目前,在日华人社会所 必要的共同课题。在日华人社会,教会极其缺少,
开拓教会刻不容缓。在日华人社会,至少需要 400 件教会,但是,现今只有 40 几间。谁来担 负这项重任呢?我们所有人都有责任。透过短
宣,接受了开拓教会训练和实践的有经验的人, 站在前头作开路先锋,是理所应当的,也是众之 所望的。
首次在日华人联合短宣,在大蒙主恩中结束 了。这次的收获是,整个过程中,参加者和支持
者都象蒲公英的种子一样,留下了“宣教的种子”。我个人也经历了难忘的幸福时刻。即使现 在回想起来,仍是心潮澎湃,一股新的力量一直 在鼓舞着我。这“宣教的种子”是主所赐的礼物!
我祈求,愿主丰富的祝福,在今后也源源不断, 大放异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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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
2014년 2월 21일 금요일
제1회 재일 중국인 연합 단기선교를 다녀와서
지난 1월6일-11일까지 동경 기독 중국인 센타(JCC) 주최로, 태국의 치앙마이 국경지대의 중국 난민촌 따꾸띠(大谷地, 注:주태국국경지대를 중심으로 30만명의 중국난민이 살고 있다. 이들은 국민당의 일부 병사들이 본국귀환을 하지 않고 남은 사람들, 그리고 그 후에 미얀마 등지에서 경제적 이유로 내려온 중국인들이다. 80%가 국적이 없는 난민상태이며, 불안한 신분과 미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으로 단기 선교를 다녀 왔다.
이번 단기 선교 팀은 일곱개교회, 네개의 국적, 총16명이 함께 한 연합 팀이었다.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재일 화교 교회가 시도한 첫 단기 선교가 아닌가 싶다. 한 교회가 아닌, 여섯 교회 멤버들이 참여한 연합 선교 팀이었다는 점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선교 팀을 지원하기 위해서 많은 개인과 교회가 나서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기도해 주시고,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린다.
이번 단기 선교 팀의 팀원들은 모두 정식 단기선교사 훈련과정을 거쳤다. 훈련은 총 여덟 차례, 시간적으로는 20시간 조금 넘게 투자되었다. 훈련 내용은 선교에 대한 전반적인(성경적, 역사적, 전략적) 이해와 교회 개척 사역(CPM:Church Planting Movement)에 대한 학습과 실습 훈련, 개인 경건 훈련이었다. 5명의 강사(캐나다계 중국인, 전태국선교사, 현태국주재 중국선교사, 일본목사)가 강의에 참여했다. 체계적인 훈련과정을 개설하고, 훈련을 거쳐 단기 선교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 당연한 일이 선교 참여자들에게 인식되고, 훈련을 통해서 참여자들에게 학습된 점은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이번 훈련중 제일 중요한 훈련은 매일 맥체인 성경 읽기표를 따라 성경본문을 읽고, 그 중 한 장을 택해서 영성일기(Spiritual Journal)를 쓰는 것이었다. 훈련생들 모두가 한 주에 오일 이상, 10주간 지속적으로 성경읽기와 영성일기를 훈련받았다. 이를 통해 개인이 평생 지속할 수 있는 영적습관을 형성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현장에서의 팀의 주 사역은 난민촌 학교사역 지원, 교회개척(CPM)훈련 학습 및 실습, 난민 기숙사 아이들 지원 활동 등으로 이루어졌다. 현장에서의 사역은 현장이 가진 국경지역 시골의 단아함과 순수함으로 둘러싸여져 있어, 대도시 동경에서 살다온 선교 팀에게 더욱 많은 도전과 은혜를 안겨다 주었다. 새벽 닭의 "꼬끼요!" 소리를 듣고 잠을 깬 것이 얼마만인가? 난민촌 학교의 아이들의 맑은 눈, 순수한 행동, 변경지역 시골의 고요함.... 축복된 시간이었다. 800여명 규모에 이르는 현지 중국어 학교에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난민 3, 4세대 아이들에게 일어, 중국어, 영어 강습을 실시했다. 기숙사 아이들에게는 준비해 간 게임과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매일 교회 개척 훈련을 함께 받고, 이를 마을의 거리로 나가 실습했다.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이 선포될 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었다. 특히 빼놓을 수 없던 일은, 한 주간의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팀원들이 서로 알아가고,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교회가 서로 달라서 잘 모르고,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팀원으로서의 의식이 생겨나고 서로를 더욱 섬기게 되었다. 마지막 날 좁은 한 방에 모여 서로의 구원간증을 들으며, 심령에 느꼈던 평안과 기쁨은, 가족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것들이었다.
이번 재일 중국인 연합단기선교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작은 많은 경계를 넘어섰다. 일본의 분주한 일상생활을 넘어서 선교의 현장으로, 교회간의 장벽을 넘어서 함께 함으로, 자기 교회 울타리 안의 안주하는 삶을 넘어서 교회 개척자로서의 삶으로 넘어서는 첫 발걸음을 뗐다.
재일 중국인들은 충분한 선교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인적으로, 재정적으로, 영적으로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 역량이 적합한 출구를 찾아 세계 선교와 연결 되어가고 있다. 단기로 시작해서 장기로, 개인으로 시작해서 교회 공동체로, 치앙마이 따구띠로 시작해서 아프리카와 중동, 중국인 선교사가 필요한 지역으로 이어져 나갈 것이다. 재일 중국인은 더 많은 목회 헌신자를 필요로 하는 선교 대상지이지만, 동시에 더 많은 중국인 선교사가 훈련받고 파송받아 전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선교사 파송 베이스 캠프다.
이번 단기 선교의 의미를 다시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재일 중국 기독교인들의 시간, 관심, 기도, 이야기, 재정...등이 "선교"라는 성경의 중심 내용에 접촉하게 된 점이다. 없던 영역이 생겨 났고, 적지 않은 내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선교를 맛 본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은 이 맛을 지속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재일 중국 기독교인들의 선교 역량이라는 고요한 호수 위에 작은 선교운동(Mission Movement)의 파도가 일어났다. 굉장히 중요하지만 지금까지는 없었던 영역이 생겨난 것이다.
둘째는, 재일 중국 기독교인들을 위한, 단기선교 프로그램이 훈련, 현장 사역, 마무리(보고와 백서), 후속 사역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써클"이 만들어지고 자리를 잡게 된 점이다.
셋째는, 이번 단기 선교를 통해서,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 "선교라는 생명의 씨앗"을 품게 된 점이다. 이번 단기 선교 팀이 주안점을 가지고 배운 것은 교회개척 훈련(CPM)이다. 이것은 현재 일본내 화교사회의 필요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화교사회내 교회는 너무나 적고, 교회개척운동은 필수불가결한 상황이다. 일본의 화교사회는 최소한 400여 교회가 필요한데, 현재 40여개의 교회 밖에 없다.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단기 선교훈련으로 교회개척 훈련과 실습을 경험한 그들이, 그 대열의 조금 더 앞쪽에 서서 인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제1회 재일중국인 연합 단기선교가 은혜 가운데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이번 도전은 단기선교 전 과정을 통해서 직접 현장에 파송된 자들이나, 파송한 자들 모두에게 작은 민들레 씨앗과 같은 "선교의 씨앗"을 남겼다.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지금도 돌아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쁘다. 새 힘이 생겨난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분이 선물로 주신 "선교의 씨앗"에 햇빛 주시고, 빛 주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이번 단기 선교 팀은 일곱개교회, 네개의 국적, 총16명이 함께 한 연합 팀이었다.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재일 화교 교회가 시도한 첫 단기 선교가 아닌가 싶다. 한 교회가 아닌, 여섯 교회 멤버들이 참여한 연합 선교 팀이었다는 점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선교 팀을 지원하기 위해서 많은 개인과 교회가 나서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기도해 주시고,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린다.
이번 단기 선교 팀의 팀원들은 모두 정식 단기선교사 훈련과정을 거쳤다. 훈련은 총 여덟 차례, 시간적으로는 20시간 조금 넘게 투자되었다. 훈련 내용은 선교에 대한 전반적인(성경적, 역사적, 전략적) 이해와 교회 개척 사역(CPM:Church Planting Movement)에 대한 학습과 실습 훈련, 개인 경건 훈련이었다. 5명의 강사(캐나다계 중국인, 전태국선교사, 현태국주재 중국선교사, 일본목사)가 강의에 참여했다. 체계적인 훈련과정을 개설하고, 훈련을 거쳐 단기 선교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 당연한 일이 선교 참여자들에게 인식되고, 훈련을 통해서 참여자들에게 학습된 점은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이번 훈련중 제일 중요한 훈련은 매일 맥체인 성경 읽기표를 따라 성경본문을 읽고, 그 중 한 장을 택해서 영성일기(Spiritual Journal)를 쓰는 것이었다. 훈련생들 모두가 한 주에 오일 이상, 10주간 지속적으로 성경읽기와 영성일기를 훈련받았다. 이를 통해 개인이 평생 지속할 수 있는 영적습관을 형성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현장에서의 팀의 주 사역은 난민촌 학교사역 지원, 교회개척(CPM)훈련 학습 및 실습, 난민 기숙사 아이들 지원 활동 등으로 이루어졌다. 현장에서의 사역은 현장이 가진 국경지역 시골의 단아함과 순수함으로 둘러싸여져 있어, 대도시 동경에서 살다온 선교 팀에게 더욱 많은 도전과 은혜를 안겨다 주었다. 새벽 닭의 "꼬끼요!" 소리를 듣고 잠을 깬 것이 얼마만인가? 난민촌 학교의 아이들의 맑은 눈, 순수한 행동, 변경지역 시골의 고요함.... 축복된 시간이었다. 800여명 규모에 이르는 현지 중국어 학교에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난민 3, 4세대 아이들에게 일어, 중국어, 영어 강습을 실시했다. 기숙사 아이들에게는 준비해 간 게임과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매일 교회 개척 훈련을 함께 받고, 이를 마을의 거리로 나가 실습했다.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이 선포될 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었다. 특히 빼놓을 수 없던 일은, 한 주간의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팀원들이 서로 알아가고,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교회가 서로 달라서 잘 모르고,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팀원으로서의 의식이 생겨나고 서로를 더욱 섬기게 되었다. 마지막 날 좁은 한 방에 모여 서로의 구원간증을 들으며, 심령에 느꼈던 평안과 기쁨은, 가족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것들이었다.
이번 재일 중국인 연합단기선교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작은 많은 경계를 넘어섰다. 일본의 분주한 일상생활을 넘어서 선교의 현장으로, 교회간의 장벽을 넘어서 함께 함으로, 자기 교회 울타리 안의 안주하는 삶을 넘어서 교회 개척자로서의 삶으로 넘어서는 첫 발걸음을 뗐다.
재일 중국인들은 충분한 선교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인적으로, 재정적으로, 영적으로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 역량이 적합한 출구를 찾아 세계 선교와 연결 되어가고 있다. 단기로 시작해서 장기로, 개인으로 시작해서 교회 공동체로, 치앙마이 따구띠로 시작해서 아프리카와 중동, 중국인 선교사가 필요한 지역으로 이어져 나갈 것이다. 재일 중국인은 더 많은 목회 헌신자를 필요로 하는 선교 대상지이지만, 동시에 더 많은 중국인 선교사가 훈련받고 파송받아 전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선교사 파송 베이스 캠프다.
이번 단기 선교의 의미를 다시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재일 중국 기독교인들의 시간, 관심, 기도, 이야기, 재정...등이 "선교"라는 성경의 중심 내용에 접촉하게 된 점이다. 없던 영역이 생겨 났고, 적지 않은 내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선교를 맛 본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은 이 맛을 지속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재일 중국 기독교인들의 선교 역량이라는 고요한 호수 위에 작은 선교운동(Mission Movement)의 파도가 일어났다. 굉장히 중요하지만 지금까지는 없었던 영역이 생겨난 것이다.
둘째는, 재일 중국 기독교인들을 위한, 단기선교 프로그램이 훈련, 현장 사역, 마무리(보고와 백서), 후속 사역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써클"이 만들어지고 자리를 잡게 된 점이다.
셋째는, 이번 단기 선교를 통해서,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 "선교라는 생명의 씨앗"을 품게 된 점이다. 이번 단기 선교 팀이 주안점을 가지고 배운 것은 교회개척 훈련(CPM)이다. 이것은 현재 일본내 화교사회의 필요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화교사회내 교회는 너무나 적고, 교회개척운동은 필수불가결한 상황이다. 일본의 화교사회는 최소한 400여 교회가 필요한데, 현재 40여개의 교회 밖에 없다.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단기 선교훈련으로 교회개척 훈련과 실습을 경험한 그들이, 그 대열의 조금 더 앞쪽에 서서 인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제1회 재일중국인 연합 단기선교가 은혜 가운데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이번 도전은 단기선교 전 과정을 통해서 직접 현장에 파송된 자들이나, 파송한 자들 모두에게 작은 민들레 씨앗과 같은 "선교의 씨앗"을 남겼다.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지금도 돌아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쁘다. 새 힘이 생겨난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분이 선물로 주신 "선교의 씨앗"에 햇빛 주시고, 빛 주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더 많은 사진자료와 중문자료는 이곳에 있다.
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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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글모음,
하루 하루
2013년 12월 10일 화요일
선교사는 " 다리(Bridge)" 다.
- 선교사란 누구인가? 에 대한 두번째 대답.
- 선교사란 누구인가? 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이곳에
(http://www.blogger.com/blogger.g?blogID=8449156411065876033#editor/target=post;postID=2250455572106293637)
- 선교사란 누구인가? 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이곳에
(http://www.blogger.com/blogger.g?blogID=8449156411065876033#editor/target=post;postID=2250455572106293637)
다리는 지금 이곳과 건너편 저곳을 연결해 준다. 다리가 없던 시절, 계곡, 강, 바다의 장애물이 있던 땅들은 서로 나눠져 있어야 했다.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저 계곡 건너, 저 강 건너, 저 바다 건너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갈 수 없었다.
다리는 이 곳과 저 곳의 단절을 연결한다. 이어주고 연결해 주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케 해주는데 있어서 다리처럼 유용한 도구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다리가 있다고 모든 사람이 건너가는 것도,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도 아니다. 다리가 있어도 건너려는 의지가 없다면 다리는 무용지물이다. 그렇지만 없던 다리가 존재하게 될 때, 최소한 건너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이들에게 다리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준다.
다리는 이 곳과 저 곳의 단절을 연결한다. 이어주고 연결해 주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케 해주는데 있어서 다리처럼 유용한 도구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다리가 있다고 모든 사람이 건너가는 것도,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도 아니다. 다리가 있어도 건너려는 의지가 없다면 다리는 무용지물이다. 그렇지만 없던 다리가 존재하게 될 때, 최소한 건너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이들에게 다리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준다.
선교사는 이런 다리와 같은 존재다. 현지인이 아직 보지 못한 곳, 가지 못한 곳, 갈 수 없는 곳에 이르는 다리가 되어 준다. 보고, 듣고, 경험케 해준다. 다리된 선교사는 현지인의 오늘의 이곳을, 내일의 저곳으로 연결해 주는 존재다.
선교사는 현지인과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살다가 현지에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가능성이 크다. 선교사가 이미 경험한 세계,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세계가 현지인에 유용한 세계, 그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주는 세계라면, 선교사는 현지인과 그것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는 하나님을 모르는 죽음 이편에 서 있는 이들을, 하나님을 아는 생명 저편의 세계로 연결한다. 더 풍성한 생명이 있는 저편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또한 현지인의 믿음이, 그들의 신앙이 이편의 세계에만 갇히지 않고, 저편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중간에 서있는 다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다리가 밑에 깔려줄 때, 사람들은 그 다리를 밟고, 저편의 세계로 전진할 수 있다.
다리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연결"에 있다. "이어줌"에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섬기는 재일중국인 디아스포라에게 어떤 "연결"이요, 어떤 "이어줌"의 다리여야 하는가?
나는 이 곳 사람들을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연결하는 다리다. 나의 모든 존재는 이 다리가 되고자 애쓴다.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한 사람 한 사람 권면하는 것은 이를 위해서다. 그들의 삶이 나를 밟고 지나가서 그 분에게 이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 곳 재일중국인들을 하나님 나라 사역의 세계로, 세계 선교로 이어주는 다리다. 이들이 다리 저편의 세계에 눈이 열리도록 접속하고, 넷 워킹하고, 코디하는 다리다.
선교사는 현지인과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살다가 현지에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가능성이 크다. 선교사가 이미 경험한 세계,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세계가 현지인에 유용한 세계, 그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주는 세계라면, 선교사는 현지인과 그것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는 하나님을 모르는 죽음 이편에 서 있는 이들을, 하나님을 아는 생명 저편의 세계로 연결한다. 더 풍성한 생명이 있는 저편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또한 현지인의 믿음이, 그들의 신앙이 이편의 세계에만 갇히지 않고, 저편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중간에 서있는 다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다리가 밑에 깔려줄 때, 사람들은 그 다리를 밟고, 저편의 세계로 전진할 수 있다.
다리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연결"에 있다. "이어줌"에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섬기는 재일중국인 디아스포라에게 어떤 "연결"이요, 어떤 "이어줌"의 다리여야 하는가?
나는 이 곳 사람들을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연결하는 다리다. 나의 모든 존재는 이 다리가 되고자 애쓴다.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한 사람 한 사람 권면하는 것은 이를 위해서다. 그들의 삶이 나를 밟고 지나가서 그 분에게 이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 곳 재일중국인들을 하나님 나라 사역의 세계로, 세계 선교로 이어주는 다리다. 이들이 다리 저편의 세계에 눈이 열리도록 접속하고, 넷 워킹하고, 코디하는 다리다.
모든 다리가 다 대교(大橋) 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작은 냇가를 가로 지르는 징검다리도 있고, 시골의 투박한 나무다리도 있다. 그 지역의 필요에 맞추어서 크기와 모양이 다듬어진 다리가 놓여진다. 크고 화려한 대교들과 비교하면, 작고 보잘 것 없는 다리도 "연결"과 "이어줌"에 있어서는 너무나 소중한 다리다.
다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외모도 규모도 아니다. 다리가 놓여져야 할 위치다. 다리가 이미 있는 곳에 또 하나의 다리를 놓을 필요가 없다. 선교사는 그 어떤 곳보다 다리가 필요하지만 아직 놓여지지 않은 곳에서 다리를 건설해야 한다. 그것이 부르심에 대한 더욱 합당한 응답이라고 믿는다.
다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외모도 규모도 아니다. 다리가 놓여져야 할 위치다. 다리가 이미 있는 곳에 또 하나의 다리를 놓을 필요가 없다. 선교사는 그 어떤 곳보다 다리가 필요하지만 아직 놓여지지 않은 곳에서 다리를 건설해야 한다. 그것이 부르심에 대한 더욱 합당한 응답이라고 믿는다.
그 부르심에 따라 살다보면 멋진 완성품으로서의 다리로 쓰임받기 보다 "징검다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우리의 인생은 짧고 하나님의 일은 장구하기에 징검다리 중간 어디에 놓인 돌 하나에 불과한 존재임을 깨닫곤 한다. 내 세대에 내 역할의 돌을 놓고 나면, 누군가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돌을 하나 더 놓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의 때에 이 곳 사람들을 저 곳에 이르게 해주는 다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징검다리가 뭐 자랑할 것이 있으며, 뭐 내놓을 것이 있겠는가? 선교사는 그저 물살에 부디끼고 삭아져서 민민해진 몸둥이 하나 가지고, 여전히 그 물살 한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그런 내 위를 밟고 지나가 이 물살 저편에 이르러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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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3일 목요일
섬김은 뼈저리게 고통스러운 것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글인데, 다시 읽고 싶었다. 다시 읽고나니 지인들과 나누고 싶어졌다. 그래서 올린다. 섬김은 뼈져리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뼈저리게 마음에 와서 닿는 말이다.
섬김은 뼈저리게 고통스러운 것(CT Korea 2010년 9월호)
To Serve Is to Suffer
If the apostle Paul knew fatigue, anger, and anxiety in his ministry, what makes us think we can avoid them in ours?
사도 바울을 덮친 피로와 분노와 불안, 우리라고 피할 수 있을까
아지스 페르난도 Ajith Fernando 2010.10.13 정모세 옮김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활동가 연합이 서구 바깥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박해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운 1996년 이래로 북미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하여 남반구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리스도인들, 특히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다수 세계(majority world)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박해에 관심을 표명할 때, 종종 인권이라는 렌즈로 그 사안에 접근한다. 이번 호에서는 스리랑카 출신 목회자이자 복음전도자 아지스 페르난도가 기독교 제자도의 본질적 부분인 고난, 특별히 교회 지도자로 부름받은 자들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도록 도전한다.
바로 얼마 전에 스리랑카의 최남단 지역에서 일주일 동안 목회자들을 가르치고 돌아왔다. 이들 목회자들의 경험에 따르면,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서 개척을 시작할 때에는 의미 있는 열매가 열리고 적개심이 누그러지는 데 보통 10년에서 15년 정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개척 초창기에 그들은 부당한 폭행과 비난을 받는다. 집 지붕에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도 하고, 자녀들은 학교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고서도 진정한 회심자를 얻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많은 개척자들이 수년 내에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인내하는 자들은 허다한 영원의 열매를 맺는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문제들로 불평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서구에서 사역을 하고 돌아왔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아주 달랐다. 그곳에서 사역할 때는 “내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고, 대부분의 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효율성이 떨어지는 스리랑카 문화에서 다시 지도자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온갖 좌절이 나를 뒤덮었다. 서구에서 강연을 하다가 스리랑카에서 목회를 하기란 쉽지 않다. 지도자인 나는 내가 이끄는 사람들의 노예(doulos)다(고후 4:5).이것은 내 필요보다는 그 사람들의 필요에 맞춰 내 일정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 성취는 매우 독특한 특징이 있어서,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기 사명을 성취하는 것과 다르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우리는 행복하고 만족해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도,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는 십자가도 포함된다. 십자가는 우리의 사명 성취를 정의할 때 본질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
서구에서 공부하고 스리랑카로 돌아온 젊은 그리스도인 일꾼들은 이 점을 두고서 고심한다. 그 젊은이들은 아주 유능하지만, 가난한 조국은 (그들이 스스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재능을 인정해줄 여력이 없다. 우리는 전문가를 온전히 쓸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다. 그들은 좌절 속에서 고뇌한다. 어떤 사람들은 결국 몇 년 후에 이 나라를 떠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 단체를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은 컨설턴트가 되어서 자신의 특정 분야에서 전문적인 훈련과 조언을 제공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리네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궁극적으로 조국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좌절과 성취
바울 신학은 우리가 창조세계의 구속을 기다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인내로써 좌절을 견뎌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울은 우리가 이러한 좌절로 탄식하고 있다고 말했다(롬 8:18-27). 내가 보기에 우리는 사명 성취를 이해하면서 이러한 좌절까지를 포함시켜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교회가 그들의 일꾼들에게 성취를 잘못 이해시키면 교회는 병들고 말 것이다. 이야말로 교회가 그토록 피상적이고 천박해지는 이유일 수 있다. 우리는 세상 기준으로 성공을 측정했고, 완전히 다른 성경적 방식으로 성취를 이루면서 세상에 도전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는 우리 교회와 기독교 기관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족은 아주 비효율적인 기관이다. 건강한 가족이라면, 한 사람에게 커다란 필요가 생길 때 모든 것을 중단한다. 우리는 이러한 헌신을 그리스도의 몸 된 생활에까지 기꺼이 확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공동체 생활에 관한 성경적 모델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근거한다. 즉 한 지체가 다른 지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그러한 모델이다(요 15:12-13). 기독교 리더십의 모델은 선한 목자의 모델로, 그 선한 목자는 위험한 상황에서 양떼를 버리고 달아나지 않고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을 섬기게 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섬기는 자들을 위해 와서 죽으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고 그들이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에라도 우리는 그들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섬기고 그들이 자기 문제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사람들이 우리를 거스를 때에라도, 당신들을 섬겨줄 다른 장소를 찾아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의견 일치를 보거나 의견 차이를 서로 인정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수고한다.
사람들이 교회 프로그램이 자기한테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를 떠나면 그것은 아주 치명적인 메시지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일에 헌신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리스도와 복음이 아니라 주로 일에 근거해 만나고 한 몸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결과 슬프게도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기댈 수 있었던 공동체와 안정감을 잃는다. 그들은 얄팍한 개인으로 남아, 참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이 모임 저 모임을 전전한다. 프로그램에 헌신한 교회는 수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성경적 그리스도인을 양육하지 못한다.
몇 년 전, 서구를 여행하면서 헌신에 관한 메시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자신이나 가까운 지인이 어떤 문제 때문에 모임이나 사람과 결별했다는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셋이나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은 불행한 결혼생활을 접었다. 다른 사람은 교회를, 또 다른 사람은 단체를 떠났다. 각 사람은 그런 결별 과정을 고난에서 벗어나 은혜 가운데 놓여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우에도 끝까지 남아 고난을 견디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가 아니었을까 하고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필요할 때마다 내가 기도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 그들에게 극심한 피로를 호소하기도 한다. 내가 그런 내용으로 편지를 보내면, 하나님이 나를 강건하게 해주시고 내 일정 가운데 나를 인도해주시도록 기도하겠다는 답장을 많이 받는다.그런데 서양 친구들과 동양 친구들이 반응하는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많은 서양 친구들로부터는, 과로로 인한 피곤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증거로 생각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물론, 외부의 압박과 불안정감으로 인한 과로로 아팠다면 그러한 판단은 잘못이다. 그러나 바울처럼 우리가 사람들을 섬길 때는 피곤을 견뎌야 할 때도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그 일 때문에 고난당할 것을 분명히 밝힌다. 피곤, 스트레스, 긴장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십자가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으로 인한 신체적 어려움에 관해 말했는데, 그것은 감정적 긴장(갈 4:19; 고후 11:28), 고뇌(고후 11:29), 불면증과 배고픔(고후 6:5), 심신의 고통과 혼란(고후 4:8), 진을 빼도록 일하는 수고(골 1:29)를 포함했다. 바울은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라고 말하는데, 오늘날처럼 ‘몸을 돌보는’ 사회에서는 철저히 반문화적인 내용이다. 또한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1-12)라고 말한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본문들에 접근하면서 어떻게 이 구절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묻기보다는 그저 학문적인 관심에 그치는 것이 안타깝다.
시간의 횡포 아래 고군분투하는 서양 사람들은 휴식의 필요성에 대해 동양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것이 많다. 동양 사람들은 사람에 헌신할 때 발생하는 신체적 문제들을 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서양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다. 사역 때문에 신체적으로 고난을 겪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고난이 결실과 성취를 향한 통로로 들어서기 위한 피할 수 없는 발걸음임을 믿는 사람들보다 그 문제로부터 더 많은 고난을 겪을 것이다. 십자가가 제자도의 기초적 측면이기 때문에, 교회는 교회 지도자들이 고통과 곤경을 예상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이러한 관점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 때, 고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쁨과 만족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고난과 기쁨은 열여덟 군데 다양한 신약성경 구절에서 함께 나타난다. 사실상 고난은 종종 기쁨의 원인이기도 하다(롬 5:3-5; 골 1:24; 약 1:2-3).
건강과 외모, 편리함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곤경을 견디는 가운데 기쁘고 만족하게 살아감으로써 복음의 영광을 분명하게 드러내라고 그들을 부르고 계신다. 만족하지 못할 일들을 추구하고 나서 별 성취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삼가면서도 즐거워하고 만족해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놀랄 것이다. 이것은 쾌락주의 문화를 향하여 복음의 영광을 확증하는 새로운 방식일 것이다.
나는 교회가 많이 염려스럽다. 서양은 급속하게, 복음이 닿지 않는 지역이 되어가고 있다. 성경과 역사는 고난이야말로 복음이 닿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본질적인 요소임을 보여준다. 서구교회가 고난의 신학을 상실하면서 비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을까? 동양의 교회는 성장하고 있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이 고난을 겪는다. 서양은 막대한 자금과 교육을 동양에 제공한다. 그러한 자금과 교육을 통해 영향도 함께 미친다. 만약 지금 고난을 겪고 있다면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메시지를 서구인들이 동양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면서 십자가를 내려놓도록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건강하고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동서양을 불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확고히 고난의 신학을 견지해야 한다.
아지스 페르난도(Ajith Fernando)는 1976년부터 스리랑카 ‘십대선교회’ 총무로 사역했다. 또한 아내와 함께, 주로 가난한 도심 1세대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콜롬보 지역의 한 교회에서 섬기고 있다. 「고난과 기쁨, 그 역설의 믿음」(디모데 역간), 「예수님이 이끄시는 사역」(생명의말씀사)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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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7일 목요일
성육신 선교에 대한 고찰
성육신적인 선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보완을 해주는 좋은 글이라 카피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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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적 선교’라는 오류
우리 사명은 다른 문화 속에서 ‘예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토드 빌링스 J. Todd Billings 2012.7.25 황혜숙 옮김

최근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책에서 ‘성육신적 선교’를 주장했다. 이들은 현지 실정과 동떨어진 선교에 머물지 말고, 지역 문화에 동화해 ‘성육신적’ 사역을 하라고 그리스도인을 독려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일부 서적과 웹사이트들은 타문화 선교에 나선 그리스도인이 적용할 만한 ‘성육신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해준다. 또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변 사람들을 섬기는 ‘예수가 됨’으로써 성육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런 자료들은 타문화권 선교를 관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하지만 ‘성육신적 선교’로 접근한 대다수 사례를 살펴보면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제 결과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발견된다.
나 자신도 ‘성육신적 선교’를 하다 이런 문제에 직면했다. 나는 신학교에서 하나님이 2000여 년 전 특정 문화권에 육신으로 오셨듯이 내 임무 역시 다른 문화권에 ‘성육신’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로부터 8개월 후 나는 문화인류학 분야의 훈련을 마치고, 우간다에서 그 나라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성육신적 방법에 대한 회의가 찾아왔다. 내가 우간다 문화에 동화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우간다 사람들이 꼭 ‘예수를 보게’ 될까? 예수의 임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영원한 ‘말씀’이 성육신한 사건이 정말로 적절한 사역 모델일까?
신학 공부를 할수록 질문은 늘어만 갔다. 여러 성경학자와 신학자를 통해 나는 성경과 정통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인에게 ‘성육신’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학교의 선교학과와 목회학과 교수들은 내가 품은 질문에 다음 같은 상당히 실용적 답변만 해주었다. “성육신적 사역이 아니면, 어떤 모델이 타문화 선교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지난 10년 동안 성육신적 선교가 신약성경에 나오는 ‘종 된 증인으로 수행하는 타문화 선교’라는 더 풍성한 신학, 결국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사역을 사실상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가지 왜곡
성육신을 선교의 한 모델로 보는 시각은 두 가지 면에서 위험한 불균형을 초래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성육신 교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말씀’이 성육신해서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유일무이한 신적 행위를 한낱 인간에 불과한 우리 삶에서 반복되는 ‘사역 방법’으로 바꿔버리는, 성육신의 진리를 왜곡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왜곡되는 사례 두 가지를 살펴보자. 하나는 주류 기독교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대개 보수 복음주의자 사이에서 나타난다.
먼저, 도시지역 선교에 관한 2시간짜리 워크숍에서 벌어진 일을 보자. 워크숍을 시작하면서 사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묘사한 요한복음 1:14을 유려하게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인용했다. “그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가 사는 곳에 오셨다.” 만약 이웃으로 함께 살면서 그들과 동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 전략이라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워크숍 내내,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법과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방법을 비롯해, 도시 지역 이웃에 동화되기 위한 수많은 방법을 소개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예수는 타문화에 동화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모델을 제공했을 뿐, 예수의 삶과 가르침, 그의 죽음과 부활이 주는 특별한 메시지는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 워크숍의 접근 방식은 교회의 다른 사역에서도 볼 수 있는데, ‘성육신적 선교’를 그 핵심 은유로만 축소해버린다. 그래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언보다는 다른 문화에 어떻게 동화될 것인지에 더 관심을 둔다. 사실 최근 개최된 한 주류 교파의 선교 컨퍼런스에서는 선교사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타문화에 ‘성육신’만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단체는 “복음을 설교하지 말고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물론 도움이 필요한 사람 곁에 머물러주는 ‘임재 사역’도 중요하다. 그러나 복음을 타인에 동화하는 것으로 축소해버리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유일무이한 사건은 부차적이 되고 복음은 개인 윤리가 되어버린다.
이와 대조적으로, 보수적 복음주의 진영의 ‘성육신적 선교’ 옹호자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청년 문화든 도시 문화든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동화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예수가 승천 직전에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새번역)라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면서 증언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복음주의권에서 성육신적 선교를 지지하는 이들 또한 ‘성육신’을 하나의 선교 모델로 사용하며, 그로 인해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내포된 의미를 놓쳐버렸다.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의미는, 제2의 성육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예수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한 요한복음 20:21을 자주 인용한다. 그들은 이 말씀을 성육신 행위를 모방하라는 뜻으로 본다. 하지만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바로 이어지는 다음 구절을 놓쳤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따라서 우리 자신이 ‘성육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내 안에, 그리고 나를 넘어 임재하는 것이다. 그 성령이 바로 우리 증언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성육신을 선교 ‘모델’로 받아들인 탓에, 성령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임재하게 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당신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만나게 될 유일한 예수일 수 있습니다”라는 구호가 그들 가운데서 종종 들린다. 청년 리더들은 젊은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에서 ‘예수가 되라’는 강권을 받는다. 교회 개척자들은 그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되라’는 조언을 듣는다. 성육신으로 예수를 드러내야 하는 부담이 각 개인의 어깨에 지워지는 셈이다. 이런 신학은 대개 개인의 에너지 소진과 피로로 이어진다. 동기 자체는 관계적이고 복음적이지만, 이런 접근은 그리스도의 성육신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최고 증언자인 성령의 역할(요 15:26)을 부인한다.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사람으로 설 수 없음을 잊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약성경에서 구원, 그리스도인의 삶, 선교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이미지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거나 멀찍이서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나뭇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듯 그리스도와 연합해있으며(요 15장), 예수의 죽음·부활·승천과 연합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롬 6:3-11; 엡 2:6). 우리는 죄에 대해 이미 죽었지만, 여전히 옛 사람을 죽여야 한다(롬 6:6; 8:13). 이 모든 일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롬 8:9).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는 죄 용서, 성령이 이끄시는 새로운 삶,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정체성, 다양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교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생활, 이웃 사랑, 성령과의 동행 등으로 연결된다. 내가 최근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회를 위한 신학과 사역의 재구성」(Union with Christ: Reframing Theology and Ministry for the Church)을 펴내면서 살펴보았듯, 이런 것들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여러 전통의 많은 성경 신학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그 중심임을 담대하게 선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토론토 위클리프대학의 리처드 롱에네커 명예 신약학 교수는 바울 서신의 주석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기독교 선포와 경험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육신적 선교’ 방식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신약성경의 핵심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약성경은 세상에 오신 성자와 성령의 ‘선교’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는 교회의 ‘보냄 받음’이 근본적으로 파생적이고 부차적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에 입양되었다. 우리에게는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지닌 신성한 본성이 없다. 그저 인간 본성이 있을 뿐이다. 그런 우리를 성령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유익을 누리도록 이끈다. 이렇게 교회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루는 대사로 보냄 받았다. 우리는 증인으로서 우리가 아닌 우리 너머를 항상 가리켜야 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거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계속’ 이루는 존재가 아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우리를 어떻게 세상에 보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요 20:21). 그런데 요한복음이 세상에 보냄 받은 성자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는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신약학자 안드레아스 코스텐버거가 지적했듯이 “‘세상에 오신’ 혹은 ‘내려오신’ 혹은 ‘올라가신’” 같은 용어들은 “오직 예수에게만 사용된다.” 코스텐버거는 우리가 세상에 보냄 받은 방식은 “예수가 세상에 오신 방식(즉, 성육신)이 아니라, 예수와 예수를 보내신 분과의 관계의 본질(즉, 복종과 전적인 의존)에 따라 보냄 받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또 다른 성육신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그의 통치를 증언할 제자로 보냄 받았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로 성육신한 하나님의 행위를 지극히 유일무이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성육신 이전의 신성한 ‘말씀’이 아닌, 하나님이자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말한다. 이는 빌립보서 2:5-7에 대한 매우 적절한 해석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우리도 성육신 행위를 모방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때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리스도가 ‘사람들과 같이’ 된 것처럼 우리도 성육신해야 한다는 의미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이 구절의 보다 넓은 문맥과 상충된다. 바로 앞의 빌립보서 2:1-4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들에게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주고, 아무 일에든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고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5절에서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믿는 사람의 태도와 성향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구속의 삶과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은 겸손함으로 서로 섬기기 원했다.
어떻게든 우리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라 높임을 받을만한, 지극히 고귀한 행동을 모방해, 우리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만들어야 하는가?(빌 2:9-10) 전혀 그렇지 않다. 경배의 대상으로 높아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만 허락된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같이’ 된 일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실현되었듯 말이다. 빌립보서 2:1-11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성육신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섬김과 복종과 화합의 삶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주요 성경학자가, 바울은 성육신 행위를 모방하라고 권면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한다.
바울은 오직 자기희생적 복종의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관점에서만, 자신의 선교 전략을 기술한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2). 성육신적 사역을 지지하는 이들은 바울이 권고한 문화적 동화가 성육신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 듀크대학의 신약학과 리처드 헤이스 교수 같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자기희생적 종으로서 성육신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신약성경의 어떤 구절도 우리가 성육신이라는 신성한 행위를 모방해야 한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육신적 선교’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는 구절들은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신약성경의 보편적 주제를 설명할 뿐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새 사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성경 가르침에 비춰 타문화 선교를 이해하고 접근하면 성령이 공동체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된다. 개인주의로 흐르기 쉬운 ‘성육신’ 모델과 달리,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이뤄지는 사역은 모든 타문화 선교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로 나아간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탄생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고, 그렇게 새로 태어난, 문화적으로 다양한 이들이 한데 모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
신약 시대 교회들은 타문화에 접근할 때 ‘성육신적 선교’ 신학에 의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만들어가는 성령의 사역에 반응했다. 이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내려와 하나님의 큰일을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능력을 주었을 때 시작됐다(행 2:4-12). 성령은 유대인 간의 언어 장벽만 극복한 것이 아니다. 동일한 성령이 베드로와 이교도인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어 서로 만나게 하고, 복음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는 선포를 하게 했다(행 10:1-33).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라고 강조하면서, 이는 하나님이 그 문제와 관련해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행 15:8-9). 예루살렘 회의는 이런 계시를 근거로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가 함께 지켜야 하는 중요한 문화 규범들을 도출했다(행 15:22-29). 초대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 성도의 문화를(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존중하라고 배웠는데, 이는 성령이 그들을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볼 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구속의 마지막 환상이, 다양한 문화권의 인류가 한데 모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장면인 것도 당연한 듯싶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그러나 이 환상은 미래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에베소서 2:13-18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현재 우리 모습이, 장차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은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 될 미래를 예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기”(새번역)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이 핵심 문맥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에베소서 2:14-1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이뤄지는 성령의 공동체적 사역은 이와 같다. 그리스도는 적대적인 집단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허물고, 십자가를 통해 그들을 한 몸으로 만들며, 모든 이들을 모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를 섬기게 하는 평화를 가져온다. 하나님은 사람 사이를 가르던 담을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고 그들을 택하여 새 가족, ‘새 사람’이 되게 하신다.
새 사람을 탄생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고 이를 발견해나가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보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복음 전도가 중요하지만, 멀리 떨어진 선교지에서 온 소식을 전하거나 교회에 청년 대상 신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정도로는 쉽게 이루어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 여러 문화권으로 보냄 받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문화권에 사는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그곳에 머물며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행동으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성육신적 선교’ 방식대로, 그 문화권에 ‘성육신’하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그 문화권에서 ‘예수가 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은 살아계신 주님을 우리 가운데 임재케 하는 성령의 사역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신학자 앤드류 퍼브스는 “예수를 육화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암시하는 모든 가르침에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일하는 살아있는 주님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우리 곁에 없는 신화적 주님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는 보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성령에 의해 모아졌다. 많은 ‘성육신적 선교’가 이 부분에서 약점을 드러낸다. 성육신적 선교를 하는 개인은 청년, 도시 거주자, 외국 문화권에 다가간다. 그러나 ‘성육신’ 메타포는 ‘보내는 것’과 관련이 깊어 ‘모이는 것’에는 거의 힘쓰지 않는다. 실제로 성육신적 선교를 통해 복음을 접한 많은 젊은이들이 다양한 세대가 함께 모이는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성육신적 선교를 옹호하는 이들 중 일부는 연합 예배가 진정한 선교를 방해한다고 여긴다. 진정한 선교란 각자가 처한 다양한 상황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식의 관계 강조도 나름 가치는 있지만, 분산된 교회(개인)에만 관심을 집중하면 개인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 또한 예수가 성령을 통해 연합 예배의 말씀과 성례에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을 평가절하 하는 결과를 낳는다.
요한계시록 5:9의 종말론적 이미지는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예배하는 장면이다. 성령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여러 종족의 사람을 연합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도록”(엡 2:18) 하기 위해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구별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한 몸임을 보여주려면, 모두가 함께하는 예배는 필수다(요 17:23).
성육신의 재발견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대담한 확신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은 육신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남을 위해 봉사하고, 일부는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했지만, 예수처럼 성육신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예수만이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이 유일무이한 신적 행위를 배제한다면 예수가 우리를 위해 한 행동은 구원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제 복음주의자들도 성육신이라는 놀라운 사건이 가져온 여러 가지 결과를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때로 육신과 물질세계에 대해 영지주의적 태도를 보이며, ‘영적인’ 사람이라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행동한다. 그러나 성육신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그 틀 안에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볼 수 있다. 성육신이라는 유일무이한 행위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감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는 성육신의 유일무이함을 인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역동적 신학으로 연결되는지 깨달아야 한다. 그 연합 속에서 성령은, 문화적 배경은 서로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 그리스도를 체화한 새 사람들을 한데 모아 하나님을 예배하게 할 것이다.
토드 빌링스(J. Todd Billings)는 웨스턴신학대학교 개혁신학과 부교수이자,「그리스도와의 연합: 교회를 위한 신학과 사역의 재구성」(Union with Christ: Reframing Theology and Ministry for the Church)의 저자다.
출처: Christianity Today Korea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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