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2일 금요일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에 대한 정리와 미래적 전략

이 글은 작성한지 꽤 시간이 지난 글이며, 우리의 기도신문인 "수민아의 중국선교이야기"에도 실었던 내용이다. 이곳에 다시 올리는 것은 중국선교에 관심있는 분들이 이 글에 더욱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며, 동시에 지금도 이 글이 중국선교에 관련해서 유용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에 대한 정리와 미래적 전략 <복음과 상황 2004 7월>

본격적으로 한국교회가 중국선교를 시작한지 11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1] 중국의 변화 속도와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고려해 볼 때 이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오늘날 세계선교에 있어서 중국선교는 중요한 이슈다. 중국선교가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 될 것인가? 특히, 중국교회가 선교사를 받는 교회로만 머무르지 않고, 장차 중국인선교사를 전세계에 파송하는 교회로 발돋움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차세대 세계선교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07년이면 근대 중국선교가 시작 된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2008년이면 중국사회전체에 거대한 변화를 몰고 올 북경올림픽이 열리는 해이다. 짐작하건대 이 시기는 중국선교에 있어서 거대한 변화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런 시점을 목전에 둔 한국교회, 특히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중국인들을 돕기에 가장 적절한 위치에 있는 한국교회는 이 변화의 시기에 어떻게 중국선교를 해나갈 것인가? 이 시점에서, 잠시 우리의 호흡을 가다듬고 해온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중국선교의 우선순위와 전략을 손질하는 것은, 앞으로의 중국선교에 있어서 우리를 좀 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의 중국선교는 중국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1949년을 계기로 근30년간 자취를 감추었다. [2] 무신론의 공산주의 이념은 외국선교사들을 제국주의적 스파이로 인식했고 폐쇄적인 대외정책을 취했다. 이에 따라 당시 중국에서 사역하던 외국선교사들은 철수해야 했고 중국교회는 핍박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그로부터 30년간 중국교회는 홀로 외롭고 암울하지만 내적으로 단련되고 부흥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3] 그리고 떵샤오핑(鄧小平)의 개방정책에 따라 중국이 본격적으로 개방되기 시작한 1978년부터 조심스럽지만 점진적인 중국선교가 재개된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1993년 한중수교를 전후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중국과의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회복되면서 수 많은 한국인 유학생, 기업가, 관광객들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들 중 많은 기독교인들이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중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 수는 점차 늘어나, 지금은 한국교회가 파송하는 선교사 중 가장 많은 수의 선교사가 중국에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중국선교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투자를 해오고 있다.

지난 10년간 한국교회는 중국선교는 세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양지를 지향하는 사역들이다. 이들은 주로 진보적인 진영의 사역자들이거나, 보수적이지만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성격을 가진 공식기구들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역은 중국 공산당내의 종교국의 공식채널이나 삼자교회의 대표적인 기구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식적인 사역들이다. 상호초청과 방문, 중국 내 성경인쇄 등이 그 대표적인 사역이다. 이들의 사역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국 내 성경공급을 위한 삼자교회의 성경인쇄 사업에 대한 지원은 대표적인 성공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역은 중국 내 기독교인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정교회를 배제하고, 삼자교회만을 중국의 대표적인 교회로 간주하기 때문에 제한적이며 정치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사역의 약점을 안고 있다.
       둘째는 음지에서 일하는 사역이다. 철저한 보안 속에 가정교회를 돕거나, 지하 신학교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사람들을 돕고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이다. 중국정부가 법으로 선교자체를 금지하는 현 상황에서 이는 대부분의 한국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하고 있는 사역의 형태이다. 음지에서 일함으로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며 가정교회와의 연합사역, 개인프로젝트사역, 몇몇 선교사들의 연합사역 등이 있다.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사역의 형태이지만 신분적으로는 가장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셋째는 양지에서 일하지만 음지를 지향하는 사역이다. 이들은 주로 사업가, 교사, 학생, 의사, NGO의 직원 등의 신분을 가지고 일하면서 기독교적 영향력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사람들이다.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안정적인 신분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신분유지가 조금 안정된 반면에 사역에 대한 전력질주가 어렵다. 양지를 지향하긴 하지만 여전히 음지를 좋아하며 음지를 자주 드나들며 일한다.

이 세가지 모습으로 진행되어온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다음과 같은 전반적인 흐름과 공통된 특징을 보여왔다.
       첫째,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신학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역과 지도자 양육 사역에 집중했다. 중국의 현장은 뜨겁고 부흥하고 있으며, 말씀과 사역자에 갈급해 있었다. 그 필요는 긴급하고 절박한 정도였다. 양 무리는 넘쳐나지만 사역자가 없는 중국교회의 상황은 사역자 양육에 대한 강한 필요를 갖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역자들이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지하신학교를 세우거나 사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해왔다. 신학교사역, 순회강의사역, 사역자 훈련사역 등이 그런 사역들이다. 감사한 것은 이 필요가 한국교회가 중국교회에 나눌 수 있는 능력의 범위 내에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신학교육을 받은 사역자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신학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은 우리로 하여금 중국교회의 필요에 적절하면서도 발 빠른 대처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거기에 중국인과 비슷한 동양인의 외모를 지닌, 한국선교사들은 각 지역의 가정교회와 지하신학교에 깊이 스며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교육 중심의 사역은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패턴에 있어서 단순화를 가져왔다. 상당수의 선교사가 신학교육이나 지도자 양육에 집중했고, 그 외의 사역들은 별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역이 되어버렸다. 농장을 하든, 비즈니스를 하든, 무슨 신분으로 중국선교를 하든 결론은 신학교육과 사역자 양성이 되어버렸다. 특히, 이런 사역이 목사선교사들 중심으로만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평신도 선교사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살려가지 못했고, 오히려 신학교에서 신학 재교육을 받고, 목사안수를 받는 목사선교사로의 전향이 자주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중국에서 이루어진 신학교육과 사역자양성의 집중화는 현재까지는 적절했다고 평가한다. 중국선교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부분에 집중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급속히 다양화가 진행중인 중국사회를 생각할 때, 앞으로는 단순히 목회자그룹에 의한 목회자 양육만으로는 중국교회를 적절히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중국교회는 다양한 그룹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구조로 발전할 것이다. 특히, 사회 각 분야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평신도 전문인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사회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전문인들을 배출하는데도 역점을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교사들의 사역도 다양한 전문인들을 훈련할 수 있는 구조로 나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는 중국선교에 있어서 급속히 채워져야 할 부분이다.
       둘째, 중국선교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사역은 중복적이고 개인적이며 단회적이었다. 이점은 중국선교의 비밀주의와 맥을 같이한다. 중국선교는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 되는 것이 상례화되어 있다. 중국정부가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역자의 이름부터 시작해, 신분, 사역의 내용 등, 모든 것이 비밀로 취급되었다. 선교사의 재정수입과 지출, 사역비가 보안에 가려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사역의 보안유지가 사역의 막대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기본 틀을 유지하는 중국에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다. 보안유지가 안되면 선교사로서의 생존자체가 위협당하는 현실이 사역의 비공개에 대한 정당성을 준다. 그렇지만 문제는 비공개로 인한 피해도 한국교회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사역의 중복성과 단회성 문제다. 사역을 위한 보안을 철저히 하다 보니, 전체적인 상황이 파악이 안되고 정확한 정보가 없어 거시적인 밑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선교사 개인은 잘 하지만, 그 개인의 탁월함을 중국이라는 큰 판에 엮어가는 장기적이고 전체적인 전략의 부재가 초래되었다. 이는 곧 인원과 재정의 과다한 중복투자로 나타났다. 또한 전략과 사역이 지나치게 선교사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게 되다 보니 선교사의 신변변화가 사역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역의 단회성의 문제를 야기했다. 또한 대부분의 사역자가 자신의 사역의 노출을 꺼려해서 연합과 협력에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중국선교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사역은 각개 전투를 잘 하는 전투병은 많이 배출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꿰뚫고 맥을 짚어내며 전략을 가다듬을 참모진과 지휘자는 많이 만들지 못했다. 따라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투병들에게, 어떻게 거시적이고 깊은 통찰력의 사령관의 안목을 가지고 사역 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선교보안을 유지하면서도 사역의 개방성과 연합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하면 현장 선교사 개인의 역량과 승리를 중국선교전체의 역량과 승리로 상승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한국교회가 중국선교에 있어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숙제들이다.
    셋째,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눈에 보이는 사역에 강한 면을 보여왔다. 눈에 보이는 사역이라 함은, 현재적으로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사역, 가시적으로 결과물을 느낄 수 있는 사역들을 말한다. 예를 들면, 교회 건축, 신학교 설립, 선교베이스 구축을 위한 농장, 아파트 등의 건물 구입, 사역자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 각종 집회에서의 단회적 강의나 설교 등이다. 눈에 보이는 사역에 대한 편중된 투자는 부정적인 결과도 함께 가져왔다. 보이는 사역은 보장되지 않는 재정의 투자를 많이 요구했다. 또한 중국선교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여러 이미지 중에서, 재정의 공급처로써의 이미지만을 너무나 강하게 인식시켜 버렸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사역이란, 중국교회와 사회에 장기적이고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가시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사역을 말한다. 그것은 중국교회의 상황에 맞는 기독교적 세계관, 역사관, 철학 등을 세우는 사역을 말한다. 또한, 이를 위한 도서출판과 그 도서들을 저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사역을 말한다. 그리고 한국교회와 사회에 세계관, 토지공개념, 중보기도, 성령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대천덕 신부와 같은 보이지 않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선교사를 중국의 한국선교사 중에 배출하는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보이는 사역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사역에 강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미래의 중국교회는 보이는 사역보다 보이지 않는 사역을 더욱 필요로 할 것이고, 보이지 않는 사역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보이는 사역에 있어서는 중국교회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이 급속하게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은 보이지 않는 영역의 사역에 대한 선교사의 책임은 더욱 막중해질 것이다.
   넷째,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지역적 편중을 보여왔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초기에 동북삼성, 특히 조선족 자치지역에 지역적 편중했다. 이 점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언어적인 문제가 거의 없고, 민족적 친근감을 지닌 조선족 사역에 대한 부담감을 한국교회가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역적 편중은 선교자원의 비정상적인 집중과 경쟁, 물량주의를 가져왔다. 중국은 넓고 동북지역은 좁다. 할 일은 많고 일군은 적다. 굳이 좁고 일군이 많은 곳에 지나친 집중을 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중국교회의 다수는 한족이며, 사회적 리더십도 한족에게 있다. 따라서 한족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 더욱 긴급하다. 다행히 최근 몇 년간 한국교회의 중국선교가 중국 내 다른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장되고 있으며, 몇 몇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사역지가 내륙지역과 서부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러한 중국선교의 지역적 한계는, 이제 동북지역에서 중국의 전지역으로, 한 걸음 더 나가서 중국대륙에서 해외 중국인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현재 전세계에 중국인 유학생은 2001년 통계로 70만 명을 넘어섰고, 해외 중국인 노무자의 수는 유학생수의 10배를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대부분은 중국으로 돌아가거나, 돌아가지 않아도 평생 중국에 영향을 미치며 살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중국의 미래와 중국교회의 미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어떻게 영향력 있는 기독교적 리더십으로 만들어가는가? 가 장래 중국교회의 평신도 리더십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나름대로의 성과와 과오를 안고 10년을맞이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중국선교에 있어서 더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첫째, 선교사의 신변안전을 보장하면서도 사역의 개방성과 연합성을 혁신적으로 제고 시켜야 한다. 중국선교가 어떤 이유든 폐쇄적이고 개인적인 사역의 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수 많은 골목대장을 만들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걸출한 지도자를 기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개방, 창조적 시너지 창출을 위한 연합을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개방과 연합은 근200년간 중국선교의 사명을 감당했던 서구교회와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동질성을 지닌 동남아 화교교회로 확대시킬 수 있다. 외국교회의 중국선교에서의 장점이 우리를 업그레이드 시키고, 우리의 장점이 그들을 도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이질적이지만 강력하고 폭넓은 개방과 연합이 한국교회가 가진 한계를 극복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단기적으로는 선교사들이 안식년을 이용해 화교신학교에 연수를 하거나, 화교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선교후보들을 화교신학교에 입학시켜 공부하고 일정기간 전세계의 화교교회에서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국제적인 인맥을 형성하고 화교크리스천들과 함께 중국선교의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외에도 한인중국선교사대회 등을 외국중국인선교사들에게 개방한다거나, 국제단체에서 한국계 중국선교사들의 참여가 강화되는 것도 좋은 연합의 방법이다.
    둘째, 중국교회의 변화, 피선교 교회에서 선교주체의 교회로서의 변화에 주목하고 이에 동참할 방법을 준비해야 한다. 중국교회는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숨겨졌던 시기에서 개방의 시기로 가고 있고, 전도의 시기에서 양육의 시기로, 선교대상의 교회에서 선교주체의 교회로 나가고 있다. 중국교회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선교지이지만, 미래적으로는 가장 큰 선교사 파송국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교회는 이미 독립적으로 선교에 동참하고 있으며, 자체적인 역량으로 해외에 신학생을 유학시키고, 선교사를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교회의 변화와 성장은 장기적으로는 중국교회가 세계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중국교회가 이러한 자기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데 있어서 나눌 수 있는 우리의 좋은 경험들이 있다. 예를 들면, 왕성했던 캠퍼스 선교단체들의 활동, 학복협과 기연 등의 연합활동으로 표명되는 복음주의 학생운동, 선교한국과 각종 선교단체 등의 선교운동, KOSTA의 유학생 복음주의 운동, 창조과학회, 기독교사회, 누가회 등의 기독 전문인 활동, 기윤실, 경실련 등의 사회운동 등은 중국교회에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동양적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몇 가지 중요한 모델을 중국교회에 선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국교회의 검증되고 성공적이었던 몇 몇의 복음주의 운동의 모델을 정리하고, 중국어로 된 메뉴얼을 만들고, 가능하면 직접 이런 운동의 현장에 함께 동참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의 복음주의 운동은 태동 중에 있으며, 이러한 복음주의 운동은 중국교회가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로의 분열을 넘어서는 중요한 연합적 모델로 자리잡을 수 있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지리적, 문화적, 인종적 강점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런 강점을 바탕으로, 개방과 연합의 태도, 거시적 안목, 변화에 대한 능동적이며 창의적 접근을 익혀간다면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그 부르심에 합당한 역할을 다하리라 믿는다.


[1] 1912년 한국장로회 총회는 총회창립기념으로 선교사 파송을 결의하고, 1913년에 4명의 선교사를 중국 산동성에 파송했다. 이를 중국선교의 기점으로 한다면, 2003년에 한국교회는 이미 중국선교 90주년을 맞이했다.
[2] 최초의 중국선교는 당나라 태종때(AD635), 경교(네스토리안)가 전래된 것을, 근대적 의미의 중국선교의 출발은 1807년 모리슨 선교사의 광주도착 것을 기점으로 삼는다.
[3] 중국교회는 1949년 모든 선교사들의 철수와 함께 외국교회와 단절되었지만,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30여년의 세월 동안 고난을 이기고 오히려 부흥했다. 1949년 당시 100여 만명이었던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현재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8.0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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