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5일 목요일

동경에서 살아남기 - 이발은 집에서!

동경은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하다. 전세계 톱을 달리는 물가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어를 배울때, 이런 예문이 항상 나온다. "東京は 便利ですが 高いです".(동경은 편리하지만 비쌉니다.) 삿포로에서 동경으로 사역지를 이동하면서, 주위의 많은 분들이 이 비싼 동경의 물가를 걱정해주었다.

이제, 동경에서 거주한지 6개월이 다 되어간다. 그럭저럭 동경에 정착했고, 삿포로와는 또 다른 패턴으로 동경에 맞게 살아가고 있다. 동경에 맞게 살려보니,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삿포로에서 생활할 때보다, 엔화가 강세여서 후원으로 생활하는 우리로서는 환차이로 인한 수입감소가 발생했다. 동경의 집 렌트비는 거의 삿포로의 두배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수입감소에 맞게 지출을 감소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 지출감소의 방법중 하나가 "이발은 집에서다". 일본의 이발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국친구들이 일본에 와서 가장 놀라는 것 중 하나는 이발비다. 이발비가 중국의 100배를 넘는다면 믿어지겠는가? 보통 일본돈으로 3000엔-4000엔, 다행히 요즘은 스피드 컷이라고 해서, 1000에 10분에 깍아내는 체인점도 생겼다. 이발비를 줄여보려고, 중국학생들은 보통 친구들끼리 머리를 깍는다.

우리도 삿포로에서 이발을 집에서 해보려고 했는데, 아이들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아내에게 머리를 맡기지 못했다. 우선은, 매주 공식적인 일정이 있고, 다수의 사람들 앞에 서다보니, 머리를 잘못 깍으면 꽤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 아내가 아이들을 능숙하게 깍아내는 것을 보고도 아내에게 맡기지 못했다. 그런데 동경에 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교인들도 적어졌고, 공식적인 일정도 거의 없다. 좀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리고 동경의 물가에서 생활을 유지하려면, 조금이라도 협조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내에게 이발을 맡겼다. 단 한번(그 주에는 모 한인교회에 설교하러 가는 공식일정이 있었다)을 빼고는 집에서 아내가 이발을 다해주었다. 이런 저런 과정을 다 거쳤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이다. 특히, 지난주 아내가 손을 댄 내 머리는 왠만한 이발소보다, 지난번에 갔던 1600엔짜리 이발소 보다 훨씬 더 나았다. 사실 6개월간 이발비를 다 합쳐보아도, 큰 돈을 절약했다고 할 수 는 없다. 그렇지만, 일종의 연대감이라고 할까? 현지 적응이라고 할까? 아내에게 머리를 깍는 기쁨이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것들이 생겨났다. 아내도 내심 자기 손에 머리를 맡기는 남편이 좋은가 보다.

 

2010년 2월 24일 수요일

닛포리 중국인 교회 첫 헌금, 아이티 지진피해자들을 위해

지난 주일(2월21일) 오랜만에 우리 닛포리 화인(중국인)교회 거의 전 성도가 예배에 참석했다. 새로 구정 만두파티를 계기로 예배에까지 참석한 한 형제까지 합하면 여섯명, 우리 가족까지 더하면 아홉명이 예배를 드렸다. 함께 예배드린 것도 기쁨이었지만, 한 3 주간 모았던 아이티 헌금을 함께 계수하고, 이 헌금을 어떤 방법으로 아이티 지진 피해난 이들을 위해서 전달할지 의논하고 결정할 수 있어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아직 교회 온지 얼마 안되고,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유학생들의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 닛포리 화인 교회의 첫 헌금을 일본의 국제 기아 대책 본부를 통해 아이티 지진 현장으로 보내는 것은 작지만 의미 있는 시작이다.

헌금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에게 어떻게 헌금을 가르칠 것인가? 여러가지로 고민중에 있다. 그 고민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경적인 원칙을 알고 실천하는 헌금, 그리고 그 헌금이 성경의 원칙에 맞게, 지금 우리의 현장에서 어떻게 쓰여져야하는가? 고민하고 기도하고, 신중하면서도 헌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할수 있으면, 이들 스스로 생각해보고, 결정하고, 직접 송금도 하고, 보고도 하고, 영수증 처리도 하도록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래서 일부로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해보도록 권면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정보도 주고, 옆에서 돕고 있는 중이다. 아직 교회 생활을 시작한지 두 달 정도 밖에 안되었지만,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작은 돈이지만, 공적인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투명하고 관리하는지 처음부터 해보면서 경험적으로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이번 아이티를 위한 특별헌금은 작지만 의미가 있는 닛포리 화인 교회의 헌금사역의 시작이었다.  

2010년 2월 15일 월요일

희주의 한마디



어제는 주일이었다. 주일인데, 주일예배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보통 많으면 10 여명, 적으면 5명 정도 예배를 드리는데, 대부분이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고, 교회온지 한달 정도 밖에 안된 사람들이라, 주일예배 참석이 일정하지 않다.  

어제는 급기야 단 한명의 형제가 참석했다. 갑자기 아르바이트가 생겨서 못 온 사람, 아픈 사람, 이런 저런 연유로 사람들이 못 왔다. 형제 혼자 왔지만, 늘 하던대로 예배, 말씀공부, sharing, 예수영화 보기, 저녁까지 먹고 어두워져서 형제가 돌아갔다.

형제를 보내고, 집안을 정리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데, 희주가 갑자기 한마디 했다.

"아빠! 오늘 그 삼촌 참 고맙다!  예배도 오고, 오늘 그 삼촌 안왔으면 우리 교회 망할뻔했는데!"

아내와 내가 흐하하하! 웃으며 희주의 짧은 코멘트에 하루의 피로를 다 날려 버렸다.
피로와 함께, 약간의 답답함도 날려 버렸다.    

희주도 그 삼촌이 고마운가 보다. 우리처럼 말이다. 그리고 사람 없으면 망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데, 여하튼 아이들이 안 보는 것 같으면서도 다 보고 나름대로 다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로인해서, 부모된 우리가 가끔 놀라기도 하고 당황도 하고, 기쁘기도하고, 힘도난다.




2010년 2월 12일 금요일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에 대한 정리와 미래적 전략

이 글은 작성한지 꽤 시간이 지난 글이며, 우리의 기도신문인 "수민아의 중국선교이야기"에도 실었던 내용이다. 이곳에 다시 올리는 것은 중국선교에 관심있는 분들이 이 글에 더욱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며, 동시에 지금도 이 글이 중국선교에 관련해서 유용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에 대한 정리와 미래적 전략 <복음과 상황 2004 7월>

본격적으로 한국교회가 중국선교를 시작한지 11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1] 중국의 변화 속도와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고려해 볼 때 이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오늘날 세계선교에 있어서 중국선교는 중요한 이슈다. 중국선교가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 될 것인가? 특히, 중국교회가 선교사를 받는 교회로만 머무르지 않고, 장차 중국인선교사를 전세계에 파송하는 교회로 발돋움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차세대 세계선교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07년이면 근대 중국선교가 시작 된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2008년이면 중국사회전체에 거대한 변화를 몰고 올 북경올림픽이 열리는 해이다. 짐작하건대 이 시기는 중국선교에 있어서 거대한 변화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런 시점을 목전에 둔 한국교회, 특히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중국인들을 돕기에 가장 적절한 위치에 있는 한국교회는 이 변화의 시기에 어떻게 중국선교를 해나갈 것인가? 이 시점에서, 잠시 우리의 호흡을 가다듬고 해온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중국선교의 우선순위와 전략을 손질하는 것은, 앞으로의 중국선교에 있어서 우리를 좀 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의 중국선교는 중국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1949년을 계기로 근30년간 자취를 감추었다. [2] 무신론의 공산주의 이념은 외국선교사들을 제국주의적 스파이로 인식했고 폐쇄적인 대외정책을 취했다. 이에 따라 당시 중국에서 사역하던 외국선교사들은 철수해야 했고 중국교회는 핍박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그로부터 30년간 중국교회는 홀로 외롭고 암울하지만 내적으로 단련되고 부흥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3] 그리고 떵샤오핑(鄧小平)의 개방정책에 따라 중국이 본격적으로 개방되기 시작한 1978년부터 조심스럽지만 점진적인 중국선교가 재개된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1993년 한중수교를 전후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중국과의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회복되면서 수 많은 한국인 유학생, 기업가, 관광객들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들 중 많은 기독교인들이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중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 수는 점차 늘어나, 지금은 한국교회가 파송하는 선교사 중 가장 많은 수의 선교사가 중국에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중국선교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투자를 해오고 있다.

지난 10년간 한국교회는 중국선교는 세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양지를 지향하는 사역들이다. 이들은 주로 진보적인 진영의 사역자들이거나, 보수적이지만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성격을 가진 공식기구들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역은 중국 공산당내의 종교국의 공식채널이나 삼자교회의 대표적인 기구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식적인 사역들이다. 상호초청과 방문, 중국 내 성경인쇄 등이 그 대표적인 사역이다. 이들의 사역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국 내 성경공급을 위한 삼자교회의 성경인쇄 사업에 대한 지원은 대표적인 성공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역은 중국 내 기독교인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정교회를 배제하고, 삼자교회만을 중국의 대표적인 교회로 간주하기 때문에 제한적이며 정치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사역의 약점을 안고 있다.
       둘째는 음지에서 일하는 사역이다. 철저한 보안 속에 가정교회를 돕거나, 지하 신학교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사람들을 돕고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이다. 중국정부가 법으로 선교자체를 금지하는 현 상황에서 이는 대부분의 한국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하고 있는 사역의 형태이다. 음지에서 일함으로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며 가정교회와의 연합사역, 개인프로젝트사역, 몇몇 선교사들의 연합사역 등이 있다.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사역의 형태이지만 신분적으로는 가장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셋째는 양지에서 일하지만 음지를 지향하는 사역이다. 이들은 주로 사업가, 교사, 학생, 의사, NGO의 직원 등의 신분을 가지고 일하면서 기독교적 영향력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사람들이다.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안정적인 신분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신분유지가 조금 안정된 반면에 사역에 대한 전력질주가 어렵다. 양지를 지향하긴 하지만 여전히 음지를 좋아하며 음지를 자주 드나들며 일한다.

이 세가지 모습으로 진행되어온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다음과 같은 전반적인 흐름과 공통된 특징을 보여왔다.
       첫째,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신학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역과 지도자 양육 사역에 집중했다. 중국의 현장은 뜨겁고 부흥하고 있으며, 말씀과 사역자에 갈급해 있었다. 그 필요는 긴급하고 절박한 정도였다. 양 무리는 넘쳐나지만 사역자가 없는 중국교회의 상황은 사역자 양육에 대한 강한 필요를 갖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역자들이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지하신학교를 세우거나 사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해왔다. 신학교사역, 순회강의사역, 사역자 훈련사역 등이 그런 사역들이다. 감사한 것은 이 필요가 한국교회가 중국교회에 나눌 수 있는 능력의 범위 내에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신학교육을 받은 사역자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신학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은 우리로 하여금 중국교회의 필요에 적절하면서도 발 빠른 대처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거기에 중국인과 비슷한 동양인의 외모를 지닌, 한국선교사들은 각 지역의 가정교회와 지하신학교에 깊이 스며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교육 중심의 사역은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패턴에 있어서 단순화를 가져왔다. 상당수의 선교사가 신학교육이나 지도자 양육에 집중했고, 그 외의 사역들은 별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역이 되어버렸다. 농장을 하든, 비즈니스를 하든, 무슨 신분으로 중국선교를 하든 결론은 신학교육과 사역자 양성이 되어버렸다. 특히, 이런 사역이 목사선교사들 중심으로만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평신도 선교사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살려가지 못했고, 오히려 신학교에서 신학 재교육을 받고, 목사안수를 받는 목사선교사로의 전향이 자주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중국에서 이루어진 신학교육과 사역자양성의 집중화는 현재까지는 적절했다고 평가한다. 중국선교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부분에 집중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급속히 다양화가 진행중인 중국사회를 생각할 때, 앞으로는 단순히 목회자그룹에 의한 목회자 양육만으로는 중국교회를 적절히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중국교회는 다양한 그룹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구조로 발전할 것이다. 특히, 사회 각 분야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평신도 전문인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사회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전문인들을 배출하는데도 역점을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교사들의 사역도 다양한 전문인들을 훈련할 수 있는 구조로 나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는 중국선교에 있어서 급속히 채워져야 할 부분이다.
       둘째, 중국선교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사역은 중복적이고 개인적이며 단회적이었다. 이점은 중국선교의 비밀주의와 맥을 같이한다. 중국선교는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 되는 것이 상례화되어 있다. 중국정부가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역자의 이름부터 시작해, 신분, 사역의 내용 등, 모든 것이 비밀로 취급되었다. 선교사의 재정수입과 지출, 사역비가 보안에 가려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사역의 보안유지가 사역의 막대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기본 틀을 유지하는 중국에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다. 보안유지가 안되면 선교사로서의 생존자체가 위협당하는 현실이 사역의 비공개에 대한 정당성을 준다. 그렇지만 문제는 비공개로 인한 피해도 한국교회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사역의 중복성과 단회성 문제다. 사역을 위한 보안을 철저히 하다 보니, 전체적인 상황이 파악이 안되고 정확한 정보가 없어 거시적인 밑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선교사 개인은 잘 하지만, 그 개인의 탁월함을 중국이라는 큰 판에 엮어가는 장기적이고 전체적인 전략의 부재가 초래되었다. 이는 곧 인원과 재정의 과다한 중복투자로 나타났다. 또한 전략과 사역이 지나치게 선교사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게 되다 보니 선교사의 신변변화가 사역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역의 단회성의 문제를 야기했다. 또한 대부분의 사역자가 자신의 사역의 노출을 꺼려해서 연합과 협력에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중국선교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사역은 각개 전투를 잘 하는 전투병은 많이 배출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꿰뚫고 맥을 짚어내며 전략을 가다듬을 참모진과 지휘자는 많이 만들지 못했다. 따라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투병들에게, 어떻게 거시적이고 깊은 통찰력의 사령관의 안목을 가지고 사역 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선교보안을 유지하면서도 사역의 개방성과 연합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하면 현장 선교사 개인의 역량과 승리를 중국선교전체의 역량과 승리로 상승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한국교회가 중국선교에 있어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숙제들이다.
    셋째,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눈에 보이는 사역에 강한 면을 보여왔다. 눈에 보이는 사역이라 함은, 현재적으로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사역, 가시적으로 결과물을 느낄 수 있는 사역들을 말한다. 예를 들면, 교회 건축, 신학교 설립, 선교베이스 구축을 위한 농장, 아파트 등의 건물 구입, 사역자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 각종 집회에서의 단회적 강의나 설교 등이다. 눈에 보이는 사역에 대한 편중된 투자는 부정적인 결과도 함께 가져왔다. 보이는 사역은 보장되지 않는 재정의 투자를 많이 요구했다. 또한 중국선교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여러 이미지 중에서, 재정의 공급처로써의 이미지만을 너무나 강하게 인식시켜 버렸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사역이란, 중국교회와 사회에 장기적이고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가시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사역을 말한다. 그것은 중국교회의 상황에 맞는 기독교적 세계관, 역사관, 철학 등을 세우는 사역을 말한다. 또한, 이를 위한 도서출판과 그 도서들을 저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사역을 말한다. 그리고 한국교회와 사회에 세계관, 토지공개념, 중보기도, 성령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대천덕 신부와 같은 보이지 않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선교사를 중국의 한국선교사 중에 배출하는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보이는 사역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사역에 강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미래의 중국교회는 보이는 사역보다 보이지 않는 사역을 더욱 필요로 할 것이고, 보이지 않는 사역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보이는 사역에 있어서는 중국교회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이 급속하게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은 보이지 않는 영역의 사역에 대한 선교사의 책임은 더욱 막중해질 것이다.
   넷째,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지역적 편중을 보여왔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초기에 동북삼성, 특히 조선족 자치지역에 지역적 편중했다. 이 점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언어적인 문제가 거의 없고, 민족적 친근감을 지닌 조선족 사역에 대한 부담감을 한국교회가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역적 편중은 선교자원의 비정상적인 집중과 경쟁, 물량주의를 가져왔다. 중국은 넓고 동북지역은 좁다. 할 일은 많고 일군은 적다. 굳이 좁고 일군이 많은 곳에 지나친 집중을 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중국교회의 다수는 한족이며, 사회적 리더십도 한족에게 있다. 따라서 한족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 더욱 긴급하다. 다행히 최근 몇 년간 한국교회의 중국선교가 중국 내 다른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장되고 있으며, 몇 몇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사역지가 내륙지역과 서부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러한 중국선교의 지역적 한계는, 이제 동북지역에서 중국의 전지역으로, 한 걸음 더 나가서 중국대륙에서 해외 중국인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현재 전세계에 중국인 유학생은 2001년 통계로 70만 명을 넘어섰고, 해외 중국인 노무자의 수는 유학생수의 10배를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대부분은 중국으로 돌아가거나, 돌아가지 않아도 평생 중국에 영향을 미치며 살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중국의 미래와 중국교회의 미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어떻게 영향력 있는 기독교적 리더십으로 만들어가는가? 가 장래 중국교회의 평신도 리더십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나름대로의 성과와 과오를 안고 10년을맞이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중국선교에 있어서 더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첫째, 선교사의 신변안전을 보장하면서도 사역의 개방성과 연합성을 혁신적으로 제고 시켜야 한다. 중국선교가 어떤 이유든 폐쇄적이고 개인적인 사역의 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수 많은 골목대장을 만들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걸출한 지도자를 기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개방, 창조적 시너지 창출을 위한 연합을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개방과 연합은 근200년간 중국선교의 사명을 감당했던 서구교회와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동질성을 지닌 동남아 화교교회로 확대시킬 수 있다. 외국교회의 중국선교에서의 장점이 우리를 업그레이드 시키고, 우리의 장점이 그들을 도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이질적이지만 강력하고 폭넓은 개방과 연합이 한국교회가 가진 한계를 극복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단기적으로는 선교사들이 안식년을 이용해 화교신학교에 연수를 하거나, 화교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선교후보들을 화교신학교에 입학시켜 공부하고 일정기간 전세계의 화교교회에서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국제적인 인맥을 형성하고 화교크리스천들과 함께 중국선교의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외에도 한인중국선교사대회 등을 외국중국인선교사들에게 개방한다거나, 국제단체에서 한국계 중국선교사들의 참여가 강화되는 것도 좋은 연합의 방법이다.
    둘째, 중국교회의 변화, 피선교 교회에서 선교주체의 교회로서의 변화에 주목하고 이에 동참할 방법을 준비해야 한다. 중국교회는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숨겨졌던 시기에서 개방의 시기로 가고 있고, 전도의 시기에서 양육의 시기로, 선교대상의 교회에서 선교주체의 교회로 나가고 있다. 중국교회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선교지이지만, 미래적으로는 가장 큰 선교사 파송국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교회는 이미 독립적으로 선교에 동참하고 있으며, 자체적인 역량으로 해외에 신학생을 유학시키고, 선교사를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교회의 변화와 성장은 장기적으로는 중국교회가 세계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중국교회가 이러한 자기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데 있어서 나눌 수 있는 우리의 좋은 경험들이 있다. 예를 들면, 왕성했던 캠퍼스 선교단체들의 활동, 학복협과 기연 등의 연합활동으로 표명되는 복음주의 학생운동, 선교한국과 각종 선교단체 등의 선교운동, KOSTA의 유학생 복음주의 운동, 창조과학회, 기독교사회, 누가회 등의 기독 전문인 활동, 기윤실, 경실련 등의 사회운동 등은 중국교회에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동양적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몇 가지 중요한 모델을 중국교회에 선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국교회의 검증되고 성공적이었던 몇 몇의 복음주의 운동의 모델을 정리하고, 중국어로 된 메뉴얼을 만들고, 가능하면 직접 이런 운동의 현장에 함께 동참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의 복음주의 운동은 태동 중에 있으며, 이러한 복음주의 운동은 중국교회가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로의 분열을 넘어서는 중요한 연합적 모델로 자리잡을 수 있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지리적, 문화적, 인종적 강점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런 강점을 바탕으로, 개방과 연합의 태도, 거시적 안목, 변화에 대한 능동적이며 창의적 접근을 익혀간다면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그 부르심에 합당한 역할을 다하리라 믿는다.


[1] 1912년 한국장로회 총회는 총회창립기념으로 선교사 파송을 결의하고, 1913년에 4명의 선교사를 중국 산동성에 파송했다. 이를 중국선교의 기점으로 한다면, 2003년에 한국교회는 이미 중국선교 90주년을 맞이했다.
[2] 최초의 중국선교는 당나라 태종때(AD635), 경교(네스토리안)가 전래된 것을, 근대적 의미의 중국선교의 출발은 1807년 모리슨 선교사의 광주도착 것을 기점으로 삼는다.
[3] 중국교회는 1949년 모든 선교사들의 철수와 함께 외국교회와 단절되었지만,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30여년의 세월 동안 고난을 이기고 오히려 부흥했다. 1949년 당시 100여 만명이었던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현재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8.0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바울의 선교, 우리의 선교(Roland Allan)

Allen의 "바울의 선교, 우리의 선교"를 새롭게 읽었다. 안식년(2009년 9월)에 한국에 들어갔을때, 파송교회인 예수마을교회의 목사님이 추천해주신 것이 계기가 되어서 읽게 되었다.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영국에서는(영국에서 장기간 계셨다) 선교에 관심이 있거나,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은 필수적으로 이 책을 읽는다고 한다. 마침 책에 굶주려 있던 터이고, 선교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았는데, 이 책은 매우 유익했다. 책이 내용이 좋아서, 두번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틈틈히 볼 생각이다.

저자 알렌은 성공회 선교사로, 1895년-1903년까지 두 차례 중국 북부 지방에서 사역을 했고, 건강상의 이유로 영국으로 귀국해 목회를 하면서, 계속해서 선교에 대한 저술을 했다. 그는 바울의 선교에 대해서 깊이 있는 성경묵상을 하였고, 이를 기초로해서 우리가 행하는 선교에 대해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의 이런 강연과 저술은 예언자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말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본인이 말했듯이 그의 저서들은 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고 명성도 얻었다.

이 책을 저술할 당시, 알렌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혹은 중국, 말라이지아, 브라질, 필리핀 같은 나라들에서 또 다른 세계로 타문화권 선교사들이 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서구권선교사들의 출현과 세계화의 급속한 진행으로 이제 선교는 모든 지역에서 모든 지역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알렌의 지적들은 매우 유용하다. 그리고 그는 서구선교가 범했던 동일한 잘못의 범주로 들어가고 있는 우리 비서구권선교사들의 잘못에 보다 성경적인 경고를 해주고 있다.

알렌은 이 책에서, 먼저 바울의 선교적 원칙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기술한다. 그리고 과연 바울의 선교가 그러했는가? 살펴보면서, 진정한 바울의 선교원칙을 설명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선교가 얼마나 바울의 선교적 원칙과 거리가 먼가를 보여준다. 이런 대비적 설명은 우리가 어떠한 원칙과 자세로 선교에 임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대로된 그림을 보여준다.

나는 이 책에서, 알렌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한가지 점에 주목했다. 그는 우리가 해야할 중요한 한 가지는 "피선교지의 형제, 자매들과 그들 가운데 운행하고 계신 성령님을 깊이 신뢰하는 것"이다. 나는 그의 이 반복적인 강조가 매우 적절하다고 믿는다.

선교대상자이며 동시의 선교의 열매인 그들을 어떠한 마음과 태도로 대하는가? 그들을 계속해서 어린아이로 대하고, 믿어 의심하고, 맡기지 않고, 체크하고, 평가하고, 지시 감독하고 하는 것은 그들을 진정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며, 이는 곧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행치 않는 것이다. 사랑은 믿는 것이다. 상대방을 깊이 신뢰하는 것이다.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 성령님이 곧 내 안에서 역사하셨던 성령님임을 믿는 것이다. 피선교 대상자들을 믿어주지 않고, 맡기지 않고, 위임하지 않는 것은, 그들 가운데 계신 성령님이 곧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임을 믿지 않는 불신의 문제인 것이다.

선교지의 형제, 자매들이 우리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어린아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의 유아시절을 도왔기 때문에, 그들을 장성한 어른으로서 대하기가 쉽지 않은 면도 있다. 또 그렇게 하다가 선교지에서 이런 저런 사고가 난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야할 선교는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서 우리에게 행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죽기까지 우리를(제자들을) 믿어주시고, 그 믿음(신뢰)때문에 죽으시고, 사랑이 무엇인가 보여주셨다. 그 사랑이 나를 감동하고 움직여서 여기까지 오게 했고, 그 일련의 거듭남, 헌신, 현실의 삶을 성령님이 인도하시고 역사해주셨다. 바울의 선교적 원칙도 동일했다. 현지 사람들을 어떤 틀이나, 법, 규칙에 매여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믿음, 소망, 사랑의 원칙 가운데 그들을 사랑하기에 신뢰(믿음)했고, 성령님을 믿기에 소망가운데 위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에 기초한 신뢰(믿음), 소망이 주의 몸된 교회를 선교지에 든든하게 서게하며, 사람들을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한다.

예수님이 나같은 자를 믿어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소망으로 바라보셨음을 늘 기억할때, 아무리 어리고 연약해 보이는 이들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 현장을 경험하면서, 갈수록 느끼는 것은 결국은 믿음, 소망, 사랑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결국 선교는 믿음, 소망, 사랑으로 향한 끝없는 몸부림인 것이다.

알렌의 책을 내 나름대로 정리, 묵상한 결론은 "선교는 믿음, 소망, 사랑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랑을 가지면, 믿음과 소망이 생겨난다. 하나님이 내 안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롬5:5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그들을 깊이 신뢰하고, 그 사랑과 믿음 가운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김진수 형제의 방문과 동역

오늘까지 지난 5주간 한국의 파송교회인 예수마을교회의 청년 한 명이 동경에 단기언어문화체험으로 와 있었다. 김진수형제인데, 참 감사한 것은 김형제가 동경에 있는 동안, 저희 닛포리 중국인교회 첫 예배부터 꾸준히 참석하며 함께 예배와 삶을 나누었다.

김진수형제는 현재, 서울대 중문과 대학원생이고, 북경에서도 중국어 공부를 해서, 저희 중국형제, 자매랑 즐거운 교제를 즐길 수 있었다. 우리도 형제의 존재가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정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이곳 형제, 자매들도 진수형제를 환영하고 좋았했다. 그리고 진수형제가 가진 여러가지 좋은 점들(예를 들면, 순수한 마음, 겸손한 자세, 환한웃음, 배려하는 마음, 주려는 마음......)이 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하였다.

이제 짧은 5주의 동경생활을 마치고, 오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헤어짐이 섭섭하지만, 꼭 헤어진다기보다는 오히려, 장기적인 만남을 위해 잠시 휴식을 갖는 느낌이었다. 왠지, 여러면에서 동역을 하게 될 좋은 동역자로 느껴졌다.

특히, 진수형제는 중국, 일본, 한국을 중심으로 중문학을 공부한다. 왜 일본어를 배우냐는 질문에, 중국문학에 관한 탁월한 논문들은 대부분 일본어로 되어있어, 일본어로 직접 읽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어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대학에서 영문학과 중문학을 복수 전공하고, 진지하고 넓은 범위에서 중국문학에 접근하는 그에게 기대가 간다. 그리고, 우리도 일본에서 중국인을 섬기는 이유로, 일본, 중국, 한국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데, 그런면에서도 공통분모를 찾았다. 여기 저기서 공통분모가 발견되는 것은 우리의 여기 일본에 있음과 하고 있는 일들을 더욱 든든하게 해준다. 동북아 시대, 특히 선교적 관점에서 열어가는 동북아 시대를 신앙안에서 만들어가는 동역자로서 기대가 된다.

진수형제로 말마암아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다. 새로이 형제의 이름을 기도수첩에 올리고 기도하며 동역해야 겠다.
 

2010년 2월 3일 수요일

선배 선교사님의 방문

       지난주 저희 단체의 선배 선교사님께서 저희 있는 지역에 방문하셨습니다. 짧은 3박4일의 시간이었지만 매우 의미 있고 저희에게는 격려와 힘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속한 선교단체의 조직개편으로 일본, 중국 지역을 총괄하는 새로운 지역리더가 선출되었는데, 그분이 오신 것입니다. 중국에서 오래일하셨던 분이신데, 15년의 선교사역 경력이 있으십니다.

       이번에 오신 목적은 저희 일본지역에 새롭게 늘어난 식구들과 인사하고, 기존의 멤버들을 더 잘 알고 격려하며, 일본지역에 지부를 결성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전에 삿포로에 있을 때는 워낙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어서 한국본부 대표를 맡고 계신 이선교사님 부부가 한번 오시는 것 외에는 저희 단체 손님은 전혀 없었는데, 금번에 동경으로 옮기면서 단체와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습니다.

       같은 단체의 선배님을 만나면서 몇 가지 큰 유익을 누렸습니다. 먼저는, 저희가 큰 형님, 아니면 아버지처럼 저희의 얘기에 귀기울여 주시고, 조언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홀로 이 길을 가지 않는구나! 그리고 상의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갈 사람이 있구나! 물론 이분 외에도 그런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뭐라고 할까? 같은 단체, 같은 사역 등에서 오는 깊은 공감의 울림이 있었다고 할까요.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역, 아이들 양육, 장기 비전, 일본에 대한 생각들....... 을 나누면서는 저희 생각, 계획들이 더욱 정리되고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감사하게도 이곳 일본의 단체 지부도 무사히 결성되고, 새롭게 구성된 멤버들이 마음을 터 놓고 얘기하고 기도하면서 선교공동체를 향한 첫 발을 내딛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만일, 우리들만 만났더라면, 이렇게 자연스럽고 속도감 있게 진행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연배과 경륜있는 한 사람의 존재가 모임을 더욱 충실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 나이를 들어가면서, 어떤 선교사가 될 것인가? 어떤 선배가 될 것인가? 함께 일하는 선교단체란 어떤 곳인가? 에 대해서 생각이 더욱 다듬해지고 온전해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