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4일 수요일

우리의 삶

우리는 GT라는 책자를 저희 선교부에서 받아본다.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GT는 상당히 좋은 QT 책자이다. 지난 GT 본문에 삽입된 글 중에 아래의 글이 있었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 불분명 하지만, 목적이 있는 삶
       넉넉하지 않지만, 풍성한 삶
       안정적이지 않지만, 방향이 있는 삶"(GT 2010년1,2월호)

뭔가 알듯 모를 듯, 그렇지만 매우 심증이 많이 가는 공감된 문구다.
그래서 위의 짧은 문장을 나에게 풀어서 적용해본 글을 써본다.

1. 불분명 하지만, 목적이 있는 삶
그렇다. 우리의 삶은 불분명하다. 특히, 사명을 따라 가다 보면 분명한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미래, 사역, 아이들의 교육, 살아갈 집, 재정, 양 무리들.....등등, 그래서 답답할 때도 있고, 힘이 부칠 때도 있고, 벼랑 끝에 서기도 하고, 본이 아닌 모험을 하게도 된다.

그렇지만,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불분명함은 목적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분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불분명함이 안개처럼 존재하긴 하지만, 삶의 목적을 가릴 만큼 영원하지도, 두텁지도 못하다. 오히려 안개 속의 등대처럼, 불분명함은 삶의 목적을 더욱 또렷하고, 빛나게 만들어 준다. 이는 유명한 중국어 찬양에 나온 것처럼 "云上太阳(구름위의 태양)"과도 같은 것이다. 불분명함의 구름위로 아주 분명한 태양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다. 그것은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삼는 것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이 목적이 우리의 삶을 관통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불분명한 요소로 가득차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2. 넉넉하지 않지만, 풍성한 삶
우리의 삶이 넉넉하기는 쉽지 않다. 돌아보면 그렇다. 넉넉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넉넉할리가 없지! 나누어 주어야할 사람들이 주변에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넉넉할 수 있을까요? 사명위주의 삶을 살다보면, 넉넉하기는 어렵다. 넉넉하지 않음이 당연하다. 그런데 넉넉하지 못하면, 않좋은 것들이 생긴다. 사람의 마음이 좁아지기 쉽다. 그리고 무엇인가 결정해야 할 때, 선택의 폭이 줄어들기 쉽다.

그렇지만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넉넉하지 않은 삶이 풍성하지 못한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돌아보면, 늘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늘 풍성했다. 주님의 말씀대로다. 주님은 그의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하려고(요10:10) 오셨다. 주님이 우리의 삶에 오셔서 우리는 정말 풍성한 삶을 누리고 살아간다. 주님으로 인해, 내가 누렸던, 누리고 있는 풍성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오히려, 종종 세상에서 넉넉하지 않음이 주님의풍성함을 더욱 경험하게 해주었다.  

3. 안정적이지 않지만, 방향이 있는 삶
사명인의 삶은 안정적이지 않다. 사실 내일 일을 알수도 보장할 수도 없는 삶이다. 사명을 좇아 살아야 함으로 안정보다는 부르심을 좇아야한다. 나의 안정된 삶보다는 주님의 필요에 촛점을 마추어야 한다. 그래서 인가적인 눈으로 볼 때,불안한 삶이 되기 쉽다. 나그네처럼 말이다.

이동이 잦은 선교사의 삶을 살다보면,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언제 안정되나? 언제 한국에와서 안정되게 살 건가?". 그런데 사실 나와 우리 가족들은 정서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다. 사실 더 이상 안정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얘들이나 우리나 주변에서 듣는 칭찬에는 "참 안정되어 있다" 는 말이 많았다. 물론, 칭찬할 것을 찾다가 찾다가 그런 말을 생각해낸 분들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 누리는 안정감은 안정된 삶을 추구해서 얻은 것은 아니다.  

진정한 안정은 안정된 삶을 추구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안정된 삶을 추구하기 보다, 방향있는 삶을 추구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향방(방향)있는 달음질을 해나가는 삶에 진정한 안정이 있다.

   






2010년 4월 10일 토요일

2010. 4.1

선교사와 글쓰기

선교사가 글을 써야하는 몇 가지 생각되는 이유다.

먼저는 선교사이기 때문에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첫째, 선교사는 공공의 재화로 사역하는 공인임으로, 그 사역의 과정, 그 가운데 얻게된 것들을 글로 기록하여, 그 자신과 타인의 유익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른바, 공공의 재화로 획득된 경험과 지식에 대한 공유(Share in)다.

둘째, 선교사가 경험하게 되는 상황, 부딪치는 여러 상황들은, 특수한 것들이 많다. 살고 있는 곳, 접하는 사람들, 문화, 언어, 일상생활....등이 본국의 상황과 많이 다르다. 이런 일반적이지 않은 것들은 더욱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며, 글 쓰기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을 풍성케 해주어야 한다. 선교사 개인의 선교적 경험이 본국의 형제, 자매들의 생각, 생활, 신앙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또한 선교사의 독특한 환경은 독특한 관점과 통찰력을 배양시켜줄 수 있는 환경이다. 그래서 그런지 선교사출신중에 좋은 퉁찰력으로 걸출한 책들을 남긴 분들이 적지 않다. 강해설교로 유명한 데니스 레인,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의 레슬리 뉴비긴, 바울의 선교 그리고 우리의 선교의 롤런드 앨런 등은 모두 선교사 출신이다. 그래서 선교사는 글을 씀으로서 더욱 선교사다운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선교사는 글쓰기와 그 획득된 경험의 공유를 통해서, 고립된 섬의 상황을 탈피해야 한다. 선교사의 최대 약점 중의 하나는 지나친 독립이다. 독립을 넘어선 독선이다. 현장에 나온 선교사가 되기까지 뚝심으로, 믿음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라, 자기의 생각이 강한 편이다. 글과 그 글의 공유는 그 강한 독립심에 균형잡힌 다리를 달아 줄 수 있다. 특히, 생각을 담은 글은, 주변이들의 공유 과정을 거치면서, 너무 독선적인 되는 것을 방지하는 있는 조언을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다음은 글쓰기가 주는 일반적인 유익때문이다.
김기현 목사님의 '글쓰는 그리스도인'(성서유니온)이라는 책에서는 글쓰기의 유익을 이렇게 말한다. " 첫째,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한다. 둘째,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셋째, 글쓰기는 사고를 계발한다. 넷째, 글씨기는 관계를 소통한다. 다섯째, 글쓰기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나는 김목사님의 언급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이중에서, 나는 글쓰기가 주는 '사고의 계발'과 '관계의 소통'에 대해서 조금 더 언급하고 싶다. 글쓰기는 본국과 같은 연구환경이 없는 선교사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고 계발의 방법이 된다. 글을 쓰려면 독서해야하고, 경험해야하고, 연구해야하고, 좀더 정확해져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사고의 운동능력을 배양시킨다. 사고에 근력이 생겨나고, 지구력도 생겨나고, 훈련으로 다져진 사고가 된다. 따라서, 나는 글쓰기가 선교사에게 주어진 사고계발의 더없는 기회라고 믿는다.

글쓰기의 유익중에 '관계소통'면에서 기여도 적지 않다. 갈수록 소통의 도구는 발달하지만 소통의 부재를 호소하는 세상이다. 선교사는 늘 소통하는 사역이다. 하나님과 사람과 그리고 나 자신과 말이다. 이 세가지 소통의 영역중에서 선교사들의 소통이 취약한 부분이 사람과의 소통이 아닐까? 싶다. 말이 안통하는 선교사들이 많다. 본국의 언어 감각을 많이 잊어버려서도 그렇고, 고집이 강해져서도 그렇고, 다른 공기 마시며, 다른 말을 쓰고, 다른 땅에 살다보니 그렇기도 한 것 같다. 그래서 소통의 부재가 가져다 주는 폐해가 만만치 않다. 오해, 편견, 다툼, 포기.....좀 더 나은 소통을 위해서 글을 써보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좀 써보려고 한다.

글쓰려할 때, 시간에 쫓기는 어려움이 있고, 괜사리 일을 안하고 한량 같이 앉아서 글이나 쓰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것 같은 걱정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글쓰기도 선교사로서의 사역의 한 부분이라는 소신이 생겼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글쓰기를 통해서 조금 더 소통하고 조금 더 공유하고, 조금 더 다듬는 선교사가 되어야 겠다.

Lausanne 대회의 눈으로 본 세계

로잔대회는 우리가 굉장히 주목해야 할 대회이다. 로잔대회는 현대 기독교가 섬겨야할 세상에 관해서, 그리고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많은 이슈를 던져주는 대회이다. 로잔대회에 주목해야할 이유는, 우리는 여러모양으로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이 우리의 모든 몸부림은 사실 역사적, 세계적 흐름이라는 큰 물결속에서 아울러져 흘러가는 것이다. 본인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인도해나가시는 큰 경륜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로잔대회는 이런 큰 흐름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회다. 전세계의 복음주의권 대표자들이 참석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무엇으로 힘들어하며, 궁핍하며, 아퍼하는가? 우리가 받은 불변의 복음의 옷을 어떻게 그들에게 따뜻하게 입힐 것인가? 이 아프고 병든 세상을 어떻게 예수님처럼 섬길 것인가? 생각하고, 토의하고, 결의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모임이다.

제 1차대회가 스위스(1974년) 로잔에서 열린후, 2회대회가 1988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고, 3차대회가 금년에 10월17일에서 24일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린다. 참으로 오랜만(21년만)에 열리는 대회다. 그 동안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이 놀랍게 변화한 세상에 놀랍도록 불변하는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그들의 고민에 많은 관심이 간다. 왜냐하면, 그 고민이 곧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참석할 형편이되지 못하지만, 다행이도 이 대회에서 다루어질 이슈는 아래 링크에 자세히 나와있다. 관심있게 살펴보면,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지형 지물에 대해 잘 알게 되리라 믿는다. 또한, 우리가 도전해야할 세상을 좀 더 파악하게 되리라 생각된다.  http://www.lausanne.org/documents.html

그리고, 그 중에서 'At risk people'이라는 파일과 디아스포라에 관한 파일에 관심이 많이 가서 따로 첨부해 올린다. 잘 살펴보시면 성과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귀찮아하실 분들을 위해서, At risk people에 대한 리포트의 순서부분만 카피해 올린다.
At risk people에 대한 부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세상의 아픔의 외침에 대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CONTENTS
1. Introduction
2. Who are the ‘at risk’?
   Towards a definition of ‘at risk’ people
   The experience and causes of being ‘at risk’
3. How does god see ‘at risk’ people?
   ‘At risk’ people through the bible
   Going inside-out to the true centre
   Conclusion
4. Association - Jesus, the disciples and ‘at risk’ people
   Luke’s Gospel as a handbook of discipleship
   The risks and costs of association to Jesus
   The praxis of holistic mission
5. Our response of association
   A call to radical discipleship
   The cost of association
   Some practical principles of good association
6. Equipping churches to respond to ‘at risk’ people
   Issues for our understanding of church
   Issues for Christian leadership
   Discipling ‘at risk’ people – considerations
   The A B Challenges of reaching ‘at risk’ people
7. Resources
   Resource organisations and web sites
   Bibliography
8. Next Steps – questions to ask and actions to take
   Questions for reflection and discussion
   Actions you can take
   A final thought
   Appendix 1 The ‘But Why?’ method
   Appendix 2 Advocacy principles
   Appendix 3 Church and parachurch relationship
   Figure 1. A brief global survey of ‘at risk’ peoples
   Figure 2. Messages from Jesus’ life and teaching relevant to ‘at risk’ people



2010년 4월 7일 수요일

하나님이 만나게 하는 사람들-Paul

지난 3월에 디아스포라 사역 동역자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서양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가 동역하는 omf의 디아스포라 사역자로 중국 디아스포라 팀 팀장이다.

omf 전체 디아스포라 팀 리더쉽 미팅이 일본에서 있었는데, 회의를 위해 왔다.
마침 기회가 좋아서, 이곳 japan field 리더의 소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참으로 감사한 시간이었다. 전세계 흩어져서 흩어진 사람들을 위해서 실제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교제하는 것도 즐거웠다. 그들을 통해서 내가 지금 일본에서 하고 있는 사역이 고립된 사역이 아니라, 역사적, 시대적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이 단체는 벌써 15년전부터 이 사역에 관여했고, 3년전부터는 아예 디아스포라 팀을 하나의 field로 구성해 사역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디아스포라 사역을 향한 구체적인 비전과 전략을 가다듬고, 실제로 사역하는 이들을 돕고 있었다. 참 부럽네! 여하튼, 이들과 네트워킹하는 끈이 연결되어서 잘 되었다 싶다. 좀 더 객관적이고 실제적으로, 이곳의 중국인 디아스포라 사역을 조명할 수 있고, 그 끈을 통해서 세계적인 디아스포라 사역의 흐름의 소식을 듣고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Paul을 통해서, 중국인 디아스포라 사역하는 사역자들의 모임에도 초청받게 되었다. 기대가 되는 모임이다.  

특히 Paul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고, 그를 우리 주일 예배에 초청해서 좀 더 교제할 수어서 더욱 좋았다. 그의 중국어로 진행된 간증은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큰 도전과 은혜가 되었다. 다들 그와 교제함을 좋아하고 누렸다.

동경에서 누리는 좋은 점 중에 하나는, 사역을 위한 네트워킹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동경의 지리적, 교통적 편리가 필요한 사람들과의 사역적 네트워킹을 구성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네트워킹을 통한 사역적 시너지가 좀 더 풍성해지고 있다.



2010년 4월 4일 일요일

최근의 몇 가지 일들

둘째아이 희원이의 유치원 입학이 있었다.

지난 4월3일에 희원이 유치원 입학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모든 일들이 4월에 시작된다. 그래서 4월3일에 입학식이 있었다. 희원이는 만 네 살이 되는 바로 그 날 유치원에 입학했다. 그 동안 언니가 학교가는 것을 보며, 그렇게도 부러워하고 손꼽아서 학교 갈 날 기다리더니, 드디어 입학했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두 정장을 하고 참석했다. 아내와 희원이는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희주는 교복을 입고, 나는 양복을 입었다. 마침, 희원이 유치원이 희주 초등학교 부속이라 다 함께 할 수 있었다.


성금요일 특별 모임과 부활주일 예배가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리는 성금요일에 작고 심플하지만 특별한 모임이 우리 집(교회)에서 있었다. 형제, 자매들이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행적을 기리며 낭독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짧은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참 좋았다. 잔잔한 감동이 우리 가운데 있었다. 처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행적을 대하는 형제, 자매들이 마음으로 십자가 고난의 아픔과 의미를 느끼며 은혜를 누렸다.

주일에는 부활절 예배가 있었다. 오손도손 앉아서 찬양하는데, "다시 사신 구세주" 의 은혜가 임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말씀을 공부하고, 늦게 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말과 섬김을 통해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참으로 사랑할 수 있어서, 사랑 받아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을 때는 두명이 남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형제, 이 자매에게 나쁜일들이 생기며 안되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전에도 그런 걱정이 있긴했지만, 그렇게까지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통과 나의 그들의 고통에 대한 감각 사이에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거리감이 확 줄어들었다. 그들이 잘못되거나 아프거나 하면, 내가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뭔가 바뀌었다. 사랑이 생긴 것이다. 저녁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얼마나 이쁜지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희원 입학식

부활절 모임

동경에서, 새롭게 교회개척을 시작한 이유

우리는 삿포로에서 4년3개월간(2004년 5월부터-2008년 9월까지) 삿포로 국제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중국어 예배를 개척하고 섬겼다. 이 기간은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기간이었다. 전혀 모르는 일본이라는 땅에 적응하고, 일본교회를 알아가고, 처음으로 해보는 단독사역을 훈련하고...... 이런 저런 면에서 너무나 유익하고 복된 시간이었다. 만일 ,SIC(삿포로 국제교회, 이하 모두 SIC로 칭함)에서의 사역이 없었다면 우리는 일본에 적응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SIC에서의 사역에 관한 얘기는 '주인장 글 모음' 폴더 안의 '수민아의 중국선교 이야기3' 파일에 잘 정리되어 있음으로 그것을 읽어보면 많이 알 수 있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요지는 이것이다. 왜 한참 진행될 수 있는 SIC에서의 사역을 마감하고, 동경에서 새롭게 개척을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유다. 이 이유에 대한 설명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선교사역을 하는 '사역적 철학'이다. 또한, 이 점은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관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각설하고, 우리가 동경에서 새롭게 교회를 개척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사로의 선교원칙 때문이다.
처음 한국을 떠나 선교지로 나올 때의 이유는 분명하고 간단했다. 한국은 내가 아니어도 대신할 사역자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디아스포라 중국인들은 많은 경우, 아직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너무 없었다. 그야말로 듣지 못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중국인은 있으나 사역하는 이가 없는 일본의 삿포로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삿포로에서 동경으로 오게 되었다. 삿포로에는 이제 중국인 모임이 존재하게 되었다. 복음을 증거하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바로 그 시기에 나는 잠시 일본남쪽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듣지 못한 수 많은 중국인들이 일본남쪽에 있다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삿포로에서 일본남쪽으로 부르시는 부르심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둘째, 디아스포라 중국인들을 위한 새로운 교회(Emerging Church)에 대한 부르심 때문이다.
우리는 삿포로에서 전통적인 교회 모델을 중심으로 교회개척에 임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인모임이 교회의 한 지체로 속해 있었고, 교회의 전체 지향점이 있었다. 우리는 이를 존중했고, 그 안에서 배우고 섬겼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교회는 일본인 및 국제인을 대상으로 하는데, 그 지향점은 일본에 정주(定住)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역의 대상도, 미래도 지역(local)에 있었다.

그렇지만 디아스포라 사역은 정주하는 사람들을 넘어서, 귀국하는 사람(海归Haigui)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디아스포라 사역은 모이기도 하지만, 흩어짐(Diaspora)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흩어짐을 염두에 둔 훈련, 준비가 없으면, 안개와 같은 사역이 되기 싶다. 대략 디아스포라 교회 참석자들의 절반 이상이 5년내에 학업, 직장관계로 타지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주 이후가 준비 안된다면 그들의 신앙은 이주하면 사라지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일본을 떠나 일시적이긴 하지만, 중국으로 귀국했을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여러번 목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일본의 교회에 익숙해져 있었고, 중국내에서는 그런 교회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귀국후 많은 경우 침체된 신앙생활을 하거나 신앙을 접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기에 우리의 사역적 고민이 있다. 귀국한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살아 남도록 해야하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의 도움을 넘어서는 도움은 없는가?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복음은  '안개'가 아니라 '생명'이다. '생명'은 민들레 씨앗처럼 흩어지면, 그 떨어진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고, 토양을 바꾸고, 숲을 이루어 간다. 그게 우리가 받은 '복음적 신앙'이다. 귀국 이후의 사람들의 신앙이 안개가 아니라, 파송된 '빛'과 '소금'이 되도록 도울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도행전의 흩어진 사도들이 또 다른 디아스포라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듯이 말이다. 바로 그곳에 디아스포라 사역의 가치가 있다. 흩어져 돌아갔을 때, 생명의 씨앗이 고국의 땅에 떨어졌을 때, 바로 그곳에 뿌리를  박고, 자라나서, 때가되면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디아스포라 중국인 사역을 위해서 '새로운 모습의 교회(Emerging Church)'가 세워질 수 있도록 도전해야 한다. 지금 예수를 믿은 이곳과 귀국한 그곳이 연결되는 교회, 이곳에서 받아들인 생명의 씨앗이 그곳에서 심겨 자라나 열매 맺을 수 있도로 도울 수 있는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  

셋째, 중국교회를 위한 새로운 교회개척 모델제시를 위해서다.
앞으로 중국교회는 본의든 본의아니든 세계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중국교회가 더욱 더 성경적이고,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중국교회의 모습은 그렇게 낙관적인 기대만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신생아시아교회들이 겪고 있는 동일한 문제인, 세속주의, 물질주의에 중국교회도 급속히 노출되어가고 있다. 이제 조금만지나면 중국교회가 부딪칠 중요한 문제는 정부의 핍박과 압력이 아니라, 물질주의 거센 유혹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가운데, 어떻게 중국교회가 좀 좋은 방향으로 전진할수 있도록 섬길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좀 더 성경적인 교회, 건강한 교회, 선교적인 교회로 전진할 수 있도록 일조할 수 있을까? 여기에 나는 중국교회를 섬기는 한명의 선교사로서 피할 수 없는 고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민에 대한 나름대로의 응답이 '새로운 교회'에 대한 도전이다. 아마도 그 새로운 교회는 이런 특징을 갖게 될 것이다. 첫째 지나친 선교사(목회자) 의존을 넘어설 것이다. 모든 성도들이 교회 개척자요 사역자일 것이다. 둘째, 예배당 중심적 사역의 틀을 넘어설 것이다. 마이클 프로스트가 '새로운 교회가 온다'에서 언급했듯이 건물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건물이 이 새로운 교회개척자들(성도들)에게 쓸데없는 메시지를 주지 않토록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를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있는 가정에서 말이다. 사실, 중국교회는 이미 가정교회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역사적 이유로 평신도 사역자들이 교회를 개척하고 섬겼다. 따라서 이러한 도전은 사실 중국교회에게 새로울 것도 없다. 그렇지만 중국교회가 역사적 상활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가정교회와 평신도 중심이라는 틀이, 이제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 과거의 핍박을 견뎌내는 가정교회, 평신도 사역자 중심의 옛날의 옷에서, 세속주의, 물질주의, 지나친 교권주의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중국과 세계를 섬길 수 있는  중국교회가 되기위한, 새로운 옷으로써의 가정교회, 평심도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있다고 해서 뭔가 거창한 것을 우리가 할 수 있거나 하고 있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아주 작고, 평범한 개척교회를 일본 동경의 닛포리에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죤스토트가 그의 책 "살아 있는 교회"에서 언급한 로버트 벨라의 말처럼 "......한 문화의 질은 그 구성원의 2%가 새로운 비전을 가질 때 변화될 수 있다"라는 말을 신뢰한다. 우리는 중국교회의 미래 모델에 새로운 비전을 가진 2%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도 하고 글도 쓰고, 몸 부림을 쳐보는 것이다. 그렇게 안하면, 우리는 그 새로운 비전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중국교회의 미래에 있게 수 많은 교회모델중에서 하나쯤은 우리의 사역의 부대낌 속에서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그 모델이 미래의 중국교회가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2010년 3월

2010년 4월 3일 토요일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묵상하면서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시간을 글을 쓰면서 잘 정리해보려고 한다. 늘 궁금했던 성경구절들도 있고, 매우 인상적이었던 성경구절들도 있고, 좀 더 확실하게 붙들고 싶은 성경구절들도 있어서, 이런 구절들을 좀 더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되새김의 유익을 누리고, 푸른 나무의 영양분들을 공급받는 바램으로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다"를 해보고자 한다.

이 칼럼은 말씀구절을 좀 더 연구하고, 내게 적용하고, 경험하는 장이 될 텐데, 매우 주관적인 해석이 장이 될 소지가 높다. 왜냐하면,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탐구하는 여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글을 씀으로써, 나 자신이 정리의 유익을 누리고, 나눔의 유익을 누리기 원하기에 이곳에 기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게되는 분들이, 그런 주관성을 주의해서 읽어주시고, 이를 통해서 좀 더 성경말씀에 대해 고민하고, 묵상하고, 되새김질해보는 유익을 누리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