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사란 누구인가? 에 대한 두번째 대답.
- 선교사란 누구인가? 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이곳에
(http://www.blogger.com/blogger.g?blogID=8449156411065876033#editor/target=post;postID=225045557210629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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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지금 이곳과 건너편 저곳을 연결해 준다. 다리가 없던 시절, 계곡, 강, 바다의 장애물이 있던 땅들은 서로 나눠져 있어야 했다.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저 계곡 건너, 저 강 건너, 저 바다 건너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갈 수 없었다.
다리는 이 곳과 저 곳의 단절을 연결한다. 이어주고 연결해 주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케 해주는데 있어서 다리처럼 유용한 도구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다리가 있다고 모든 사람이 건너가는 것도,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도 아니다. 다리가 있어도 건너려는 의지가 없다면 다리는 무용지물이다. 그렇지만 없던 다리가 존재하게 될 때, 최소한 건너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이들에게 다리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준다.
다리는 이 곳과 저 곳의 단절을 연결한다. 이어주고 연결해 주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케 해주는데 있어서 다리처럼 유용한 도구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다리가 있다고 모든 사람이 건너가는 것도,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도 아니다. 다리가 있어도 건너려는 의지가 없다면 다리는 무용지물이다. 그렇지만 없던 다리가 존재하게 될 때, 최소한 건너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이들에게 다리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준다.
선교사는 이런 다리와 같은 존재다. 현지인이 아직 보지 못한 곳, 가지 못한 곳, 갈 수 없는 곳에 이르는 다리가 되어 준다. 보고, 듣고, 경험케 해준다. 다리된 선교사는 현지인의 오늘의 이곳을, 내일의 저곳으로 연결해 주는 존재다.
선교사는 현지인과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살다가 현지에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가능성이 크다. 선교사가 이미 경험한 세계,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세계가 현지인에 유용한 세계, 그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주는 세계라면, 선교사는 현지인과 그것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는 하나님을 모르는 죽음 이편에 서 있는 이들을, 하나님을 아는 생명 저편의 세계로 연결한다. 더 풍성한 생명이 있는 저편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또한 현지인의 믿음이, 그들의 신앙이 이편의 세계에만 갇히지 않고, 저편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중간에 서있는 다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다리가 밑에 깔려줄 때, 사람들은 그 다리를 밟고, 저편의 세계로 전진할 수 있다.
다리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연결"에 있다. "이어줌"에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섬기는 재일중국인 디아스포라에게 어떤 "연결"이요, 어떤 "이어줌"의 다리여야 하는가?
나는 이 곳 사람들을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연결하는 다리다. 나의 모든 존재는 이 다리가 되고자 애쓴다.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한 사람 한 사람 권면하는 것은 이를 위해서다. 그들의 삶이 나를 밟고 지나가서 그 분에게 이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 곳 재일중국인들을 하나님 나라 사역의 세계로, 세계 선교로 이어주는 다리다. 이들이 다리 저편의 세계에 눈이 열리도록 접속하고, 넷 워킹하고, 코디하는 다리다.
선교사는 현지인과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살다가 현지에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가능성이 크다. 선교사가 이미 경험한 세계,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세계가 현지인에 유용한 세계, 그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주는 세계라면, 선교사는 현지인과 그것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는 하나님을 모르는 죽음 이편에 서 있는 이들을, 하나님을 아는 생명 저편의 세계로 연결한다. 더 풍성한 생명이 있는 저편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또한 현지인의 믿음이, 그들의 신앙이 이편의 세계에만 갇히지 않고, 저편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중간에 서있는 다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다리가 밑에 깔려줄 때, 사람들은 그 다리를 밟고, 저편의 세계로 전진할 수 있다.
다리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연결"에 있다. "이어줌"에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섬기는 재일중국인 디아스포라에게 어떤 "연결"이요, 어떤 "이어줌"의 다리여야 하는가?
나는 이 곳 사람들을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연결하는 다리다. 나의 모든 존재는 이 다리가 되고자 애쓴다.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한 사람 한 사람 권면하는 것은 이를 위해서다. 그들의 삶이 나를 밟고 지나가서 그 분에게 이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 곳 재일중국인들을 하나님 나라 사역의 세계로, 세계 선교로 이어주는 다리다. 이들이 다리 저편의 세계에 눈이 열리도록 접속하고, 넷 워킹하고, 코디하는 다리다.
모든 다리가 다 대교(大橋) 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작은 냇가를 가로 지르는 징검다리도 있고, 시골의 투박한 나무다리도 있다. 그 지역의 필요에 맞추어서 크기와 모양이 다듬어진 다리가 놓여진다. 크고 화려한 대교들과 비교하면, 작고 보잘 것 없는 다리도 "연결"과 "이어줌"에 있어서는 너무나 소중한 다리다.
다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외모도 규모도 아니다. 다리가 놓여져야 할 위치다. 다리가 이미 있는 곳에 또 하나의 다리를 놓을 필요가 없다. 선교사는 그 어떤 곳보다 다리가 필요하지만 아직 놓여지지 않은 곳에서 다리를 건설해야 한다. 그것이 부르심에 대한 더욱 합당한 응답이라고 믿는다.
다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외모도 규모도 아니다. 다리가 놓여져야 할 위치다. 다리가 이미 있는 곳에 또 하나의 다리를 놓을 필요가 없다. 선교사는 그 어떤 곳보다 다리가 필요하지만 아직 놓여지지 않은 곳에서 다리를 건설해야 한다. 그것이 부르심에 대한 더욱 합당한 응답이라고 믿는다.
그 부르심에 따라 살다보면 멋진 완성품으로서의 다리로 쓰임받기 보다 "징검다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우리의 인생은 짧고 하나님의 일은 장구하기에 징검다리 중간 어디에 놓인 돌 하나에 불과한 존재임을 깨닫곤 한다. 내 세대에 내 역할의 돌을 놓고 나면, 누군가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돌을 하나 더 놓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의 때에 이 곳 사람들을 저 곳에 이르게 해주는 다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징검다리가 뭐 자랑할 것이 있으며, 뭐 내놓을 것이 있겠는가? 선교사는 그저 물살에 부디끼고 삭아져서 민민해진 몸둥이 하나 가지고, 여전히 그 물살 한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그런 내 위를 밟고 지나가 이 물살 저편에 이르러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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