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 양심적인 히브리어 학자의 고백과 삶입니다. 이런 분들이 물방이 되고, 물방울이 시내가 되고, 시내가 강이 되고, 강이 평화의 바다를 이루는 동아시아를 꿈꿔 봅니다. 동아시아 기독청년 대회가 지향하는 바도 그런 것입니다. (동아시아 기독청년대회 참고: http://threetogether.org http://diachinese.blogspot.jp/2012/01/2.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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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형제가 되고 싶어 하는 일본인 학자 이야기
그리고 그와 더불어 형제애의 열매를 키워온 한국인 학자 이야기
인터뷰 김은홍 편집인 2012.7.25
우리를 늘 불편하게 하는 이웃, 일본. 주일 대사관 앞 소녀상 앞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도발을 당했다. 그 도발이 있기 한 달 전, 무라오까 교수는 그 소녀상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머리를 숙였다. 그는 우리와 그들이 형제가 되는 날을 소망하는 일본인이다.
네덜란드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일본인 교수 다까미추 무라오까, 그가 프랑스인 예수회 신부 폴 주옹(1871-1940)의 「성서 히브리어 문법」을 개정증보하고 영어로 번역하여 1991년 출판한 「주옹-무라오까 성서 히브리어 문법」은 성서 히브리어 학계의 권위 있는 문법서로 널리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무라오까는 2006년 한 번 더 영어개정판을 내게 되는데, 이 개정판을 출판하기도 전에 그는 김정우 교수에게 그 원고를 넘겼다. 거의 동시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이 과정을 통해, 2012년 마침내 가히 ‘주옹-무라오까-김정우’ 판이라 할 수 있을 「성서 히브리어 문법서」 한글판이 나왔다.
5월 26일 토요일, 무라오까 교수 부부와 김정우 교수, 우리는 그들과 특별한 하루를 보냈다. 이어지는 대화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을 거쳐 경기도 광주시 퇴촌 ‘나눔의 집’까지 가는 차 안에서 이뤄진 것이다.
무라오까 제가 어릴 때 아버지는 입대하셨고, 저는 초등학교 시절 1년 반 동안 할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걱정하시며 손자를 잘 키워야한다는 생각을 하셨지요. 당시 규슈에 있던 저희 집 근처에는 강이 있었어요. 제가 수영을 못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절대 강 근처에 가지 말라고 아주 엄하게 명령하셨어요. 하루는 더워서 강변으로 갔어요. 제가 서있는 땅이 너무나 부드럽다고 느끼는 순간 가라앉으면서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어요. 강에 빠져 물을 먹으면서 허둥대고 있는데, 옆에 대나무 가지가 있는 거예요. 그걸 잡고 버둥거렸어요. 그 때 마침 강 저편에 있던 친구가 저를 보고 물에서 건져주었습니다. 집에 돌아갔더니 할머니가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네가 죽었으면 내가 어떻게 됐겠니?” 하시며 혼을 내셨습니다.
고3 때 미국 침례교 선교사에게서 영어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게 됐습니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게 됐죠. 다시 들어갔을 때 그 물은 오래전 저를 죽음으로 몰았던 죽음의 물이 아니라, 침례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생명의 물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무라오까, 내가 너를 이 땅에 살려둔 것은 너에게 조그만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이제 그것을 위해서 살아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닿자 무라오까 교수는 차에서 내려 대사관 맞은편에 있는 소녀상으로 다가갔다. 한복 차림의 그 소녀는 맨발이었다. 선생은 그 소녀상 앞에 한참을 묵묵히 서있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또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무슨 기도를 했는지, 결국 묻지 않았다. 퇴촌 나눔의 집을 향했다.
무라오까 2년 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위안부 할머니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 열렸는데, 우리 부부는 폐막 하루 전날 방문했습니다. 그쪽에서 총괄하는 한국 분이 우리 부부가 전시회에 온 첫 번째 일본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한 일본인 교수를 만났는데, 그는 전시회 마지막 날 갔다고 하더군요. 그는 전시회에 방문한 세 번째 일본인이라는 말을 들었답니다. 전시회 마지막 날까지 단 세 명의 일본인만이 방문한 것이지요. 헤이그에는 일본 대사관 직원들을 비롯해서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데, 세 사람만 방문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제가 편지 두 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무라야마 총리가 위안부 여성들에게 처음으로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1995년 8월 15일 당시 일본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편집자 주). 그러나 진심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일본 외무성이 홈페이지에 위안부 관련 글을 올렸습니다. 거기에 “전쟁이 점점 확대되면서 위안부가 필요했다”는 문안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일본 외무장관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그 문안을 삭제하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외무장관에게서 아무런 답변이 없었고, 또다시 서한을 보냈지만 아무 답변이 없었습니다.
김정우 무라오까 선생님이 2003년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 경주에 가고 싶다고 하셨어요. 일본인들이 경주를 좋아하니까 그런가보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의 방문지는 경주에 있는 일본 여성들이 거주하는 마을이었어요. 경주에는 일본 할머니들이 사는 집이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한국 남자와 결혼한 일본 여성들이 해방 후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남아 기거하는 집이지요. 선생님은 할머니들을 위로하시고, 헌금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그곳 할머니들과 그분들이 어린 시절에 불렀던 “나의 살던 고향은” 같은 일본 노래를 부르면서 함께 춤을 추셨습니다. 제게는 그 시간이 참 특별했어요. 그 모습이….
편집인 히브리어를 알면 성경을 더욱 재미있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신도들에게도 ‘히브리어 한번 배워볼 만하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히브리어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무라오까 일본에 가면 목회자 컨퍼런스를 개최하곤 합니다. 한번은 히브리어 분사에 대한 강의였는데, 사모들도 같이 왔습니다. 사모들은 히브리어를 모르잖아요. 사모들에겐 너무 전문적인 분야니 제목을 바꿔야만 했지요. 고심하다가 쿰란에서 발견된 시편 119편이 생각났습니다. 시편 119편은 일명 ‘알파벳 시편’이라고 합니다. 119편은 총 176절로 각 연이 8절씩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8절을 시작하는 단어가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되어있습니다. 히브리 알파벳순으로 알렙, 베트, 기멜, 달렛…그런데 이건 번역이 불가능합니다. 원본을 봐야지만 성경 원본이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저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얼마나 집중해서 만들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는 17음절로 끝나는 ‘하이쿠’라는 전통시가 있습니다. 제한된 음절에 시인의 모든 생각을 담아 전하는 겁니다. 시편의 이런 형식이 하이쿠 전통에 익숙한 일본 사람들에게는 매우 인상 깊은 것이지요. 우리 동양 사람들은 한시 같은 시를 쓸 때 그 형식미를 내용이나 이미지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히브리어 원전을 보면 그런 형식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편집인 출판기념회에서 무리오까 선생께서 강연 마지막에 한 소절 부르신 노래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정우 “형제가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133:1을 노랫말로 한 히브리 노래입니다. 제가 그때 통역하면서 순발력이 부족했어요. 그 노래를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줬어야 했는데. 함께 그 시편 133:1을 노래했으면 굉장히 좋았을 것 같아요.
차 안에서 무라오까 교수 부부와 김정우 교수가 그 노래를 불렀다. 단음조의 쉬운 멜로디는 어딘지 우리의 정서와도 닮은 듯했다. 금세 합창이 됐다.
히네 마 토브 우_마 나임
Hineih mah tov u-ma nayim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쉐베타 힘 감 야하드
shevet acim gam yachad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이
(* 이 노래는 유튜브에서 여러 버전으로 들을 수 있다. 축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히네 마 토브’는 유대인 출신 예배 사역자 폴 위버의 노래를 추천한다(‘Paul Wilbur-Hinei Ma Tov Umanaim’로 검색). 무라오까 교수가 출판기념회와 나눔의 집 가는 길에 부른 ‘히네 마 토브’와 같은 멜로디는 유튜브에서 ‘Hinei Ma Tov-Musica JUDIA’로 검색하면 들을 수 있다.)
김정우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가.” 무라오까 선생님은 한일 관계를 이 시편 하나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갈등을 풀어낸 것처럼 형제 나라로서 한일 관계를 풀고 싶은 것이지요.
무라오까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마지막 수업 때는 꼭 이 노래를 같이 합니다. 이 노래에는 ‘야샤브’(yashab)의 분사형인 ‘쉐베트’(shevet)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함께 앉는다’,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이 관계는 가족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일본 그리스도인들도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노래를 하이킹이나 피크닉, 캠프파이어 할 때도 불러요. 시편 133편은 바빌론에서 귀환한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지은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나 남아있던 사람이나 다 함께 형제로서 연합하는 노래입니다. 오늘날에는 1800년 만에 약속의 땅(고국)으로 돌아온 기쁨을 표현하는 노래로도 부릅니다.
무라오까 2008년에 위안부 여성에 대한 책을 일본에서 출판했습니다. 베를린 파견 일본 기자와 공저한 책입니다. 2007년에 아베 총리가 굉장히 공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강요된 성은 없었다. 강요했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없다.” 이 발언에 한국이나 중국뿐만 아니라 필리핀 등 전 세계적으로 반발이 있었습니다. 미국 국회에서는 일본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당시 베를린 특파원이 저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는 역사적 수정주의자들의 시도를 멈춰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서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한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 구체적으로 2차 세계대전 2_3년 후에 인도네시아 반둥 지역의 성 노예 관련 재판 기록 중 네덜란드어로 된 문서를 번역해달라고 제게 요청했습니다. 일본군과 민간인들이 성 노예 문제에 책임이 있다는 판결로, 일부는 수년간 수감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문서였습니다. 그 일본 기자는 이 자료를 복사해서 일본어로 출판하고 싶었지만 네덜란드어를 몰라서 제게 협조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시 법원에서 재판 중에 증언했던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그 많은 자료를 다 번역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 일본 기자가 주석을 달아서, 2008년에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글이 일본의 진보적인 주간지에 발표됐습니다. 그 잡지는 광고를 내지 않았습니다. 광고를 내면 기업에 의존하게 되어 언론의 자유를 잃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책에는 중국인 위안부에 관한 내용도 있습니다. 80세가 된 중국 사람인데, 그녀는 일본 군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살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이제 60세 중반이 되었습니다. 이 일본 기자가 2008년에 지진이 일어났던 중국 서남부로 가서 그 여자와 아들을 인터뷰했습니다. 그해에 저는 상하이, 난징, 베이징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베이징에 있을 때 책이 출판되었는데, 그 책 한 권이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수업 마지막 날 학생들을 점심에 초대했는데 마침 제게 그 책이 있었습니다. 내 옆에 있던 중국인 여학생 한 명이 그 책을 보기 시작했고, 일본 기자가 인터뷰했던 중국인 위안부에 대한 부분을 보자 그 학생도 그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학생은 일본인 선생님에게 무료로 히브리어도 배우고 위안부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정우 무라오까 선생님은 자비량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강의를 하십니다. 어제 내가 선생님에게 은퇴하고 살림이 되냐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살림이 아주 어렵다고 하셨어요. 영국에서 10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0년, 네덜란드에서 10년, 이렇게 30년을 강의를 해서 네덜란드에서 나오는 연금은 적은가 봅니다. 그래도 이렇게 의미 있는 여행을 하는 보람으로 사시는 것이지요.
무라오까 원어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세요.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초대받으셨을 때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당시 여인이 예수님께 했던 행동을 그리스어 네 단어로 표현합니다. 각각의 단어는 모두 미완료 시제입니다. 그 여인은 계속 울고, 계속 눈물을 떨어뜨리고, 계속 주님의 발을 머리카락으로 닦고, 계속 입을 맞췄습니다. 그런데 모든 언어에 미완료 시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독일어는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어는 그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계속’(Keep doing)이란 표현으로 여인의 행동을 묘사했습니다.
‘계속’이란 표현이 반복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인이 그 행동을 ‘계속’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발에 한 번 입을 맞추고 끝난 게 아니라 여러 번 반복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지?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헌신을 보여줍니다. 이 본문으로 저는 ‘말없는 사랑’을 설교합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용서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용서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여인이 얼마나 오래 울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입을 맞추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 30분 정도일까요? 그 30분 동안 그 여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거나 감사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하던 행동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저는 설교에서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 자서전에 나온 이야기를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한 스코틀랜드 여성 선교사가 인도로 파송되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인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게 되었지요. 몇 년간 그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회심자는 매우 적었고, 그것이 그 선교사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울고 있는 한 인도 남자를 선교사에게 데려왔습니다. 그의 한쪽 다리에 큰 가시가 박혀있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인 그녀에게는 가시를 뺄 만한 적절한 의료기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하얀 이를 그 남자의 다리에 갖다 대고 가시를 빼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게 와서 예수님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보다 그녀가 보여준 행동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백인 여성이 자신의 입으로 인도 남성의 가장 더러운 부분을 치료한 모습 말입니다.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나눔의 집에서
무라오까 오래전부터 위안부 피해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2003년에 처음 이곳에 왔고, 2005년에도 방문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다가 2008년에는 강제로 위안부가 된 네덜란드 여성분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일본어로 출간했습니다. 이후에 중국, 필리핀, 대만 등 아시아 위안부 할머니들을 연구하면서 느낀 아픈 마음을 여러 지면에서 나눴습니다.
무라오까 선생은 오는 길에 들려주었던 일본 외무장관에 보냈다는 항의 서한 사본을 나눔의 집에 전달했다. 또 일본에서 간행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인도네시아 재판 기록에 대한 정보도 전해주었다.
무라오까제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한국인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한국인들이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내용을 모르는 것 같아서 한국 분들이 아시고 일본 정부에 삭제 요청을 해주기 바랍니다. 한국 외무부 장관이 일본 외무부 장관에게 외교 경로를 통해서 요청하거나, 시민운동 쪽에서도 해주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있는 내용은 피해자들에게 너무나 모욕적인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덮으면서 자기를 합리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삭제되어야 합니다. 피해자들에게 진정한 사과도 못하는 판에 그들을 모욕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화요일에 홈페이지를 봤는데 아직도 그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에 대한 모욕입니다. 남자들이 성적 욕구가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래도 좋다는 것을 무의식 속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라오까 여기에 할머니들이 몇 분 계시나요?
나눔의 집 여덟 분입니다.
무라오까한국 정부에서 돌봐주고 있습니까?
나눔의 집 저희는 사회복지 법인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덟 분에 대한 법정 지원금을 정부에서 받고, 이사들과 후원자들이 기부를 합니다.
무라오까아주 적은 기부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 가지 활동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를 운영하시는 일도 하시고, 중국에서 아직 못 돌아오신 할머니들을 돌보는 일도 하시고….
나눔의 집 지금 중국에 거주하시는 할머니들은, 정확하지 않지만 2008년 전에는 한국 정부에서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지원을 했습니다. 지금은 조선 국적을 가지고 계신 중국 거주 할머니들도 한국인으로 간주하여 국가에서 지원을 합니다. 저희는 지금도 의료비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무라오까 7년 전에 여기 왔을때 중국에서 오신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나눔의 집 지금도 계세요. 중국에서 고국에 오시고 싶어 한 네 분이 현재 나눔의 집에 살고 계십니다.
무라오까 (눈물 지으심) 당시 그분이 일본어로 말씀하셨는데, 굉장히 어려워하셨어요.
나눔의 집 예, 중국으로 끌려가셨다가 한국에 와 계시는 분, 지난번에 오셨을 때 다 보셨을 거예요. 김순옥 할머니 등.
무라오까이 할머니들은 그래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천 명이 자신들의 과거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두려워서 숨어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파요.
나눔의 집 용기 있는 분들이죠.
무라오까 여기 계신 분 중 제일 어린 분이….
나눔의 집 85세입니다. 가장 나이가 많으신 분은 91세입니다.
무라오까 선생 부부는 위안부 관련 영상을 시청했다. 40분,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노구의 그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좌정하여 그 영상에 집중했다.
역사의 상처가 아물 기미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처받은 할머니들이 역사가 바로 서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주옹-무라오까 성서 히브리어 문법」 한글 번역본 저자 서문에서 무라오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2001년 2월과 3월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때 나는 20세기 초반 일본이 한국의 국민들에게 끼친 엄청난 불의와 피해와 고통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참회하겠다는 뜻으로 자발적인 교육 봉사를 하고자 하였다. 이 문법책은 그 열매 중 하나이며 내가 수년간 김정우 교수와 함께 강도 높게 일한 결실이다.” 이 책은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다. 한국에 진 빚을 학자로서 갚아보겠다는 한 일본인 학자와 그의 진심을 이해하여 꾸준히 학문적 교류를 해온 한 한국인 학자가 10여 년간 나눈 형제애와 학문적 열정이 맺은 값진 열매다. 아래 글은 5월 24일 서울교회에서 열린 「주옹-무라오까 성서 히브리어 문법」 출판기념회에서 무라오까 교수가 청중에게 전한 마음이다.
저는 학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다른 모국어와 국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시요 구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한 신앙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공유하는 기본 자세는 시편 85:10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갈보리의 십자가는 이 근본적인 진리를 생생하게 상징합니다. 두 가지 원리가 십자가에서 교차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악과 불의와 죄를 용납하거나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이러한 죄를 인류에게 물으셨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 빠져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십니다. 이사야 53:4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일본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지난 20세기의 중반까지 우리나라와 민족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조상에게 범한 역사적 과오와 잘못을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일본 왕실을 포함하여 대다수 일본 사람들이 이 역사적인 진실을 직면할 도덕적인 정직함과 신실함과 용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거움 마음을 안고 저는 지난 2003년에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여러분이 보여주신 기독교적인 우정과 관대함, 그리고 일본인으로서 저의 마음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에 힘입어 저는 여기에서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도 다시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저는 김정우 교수를 만났습니다. 저의 민족이 저지른 어두운 역사가 없었다면, 그리고 여러분에게 고통과 상처가 없었다면 <주옹-무라오까 성서 히브리어 문법>은 영어판으로만 남아있었을 것이며, 오늘 저녁에 이곳에서 이렇게 기쁜 행사를 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의 조국이 “과거를 잊지 말고 그것으로 미래의 길잡이로 만들라”는 원리를 마음 깊이 새길 때까지, 저는 저의 일본 여권을 네덜란드 여권으로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일본인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저는 일본인으로서 여러분과 다시 만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냥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 여러분과 가슴 깊은 곳에서 “보라 얼마나 좋은가! 형제가 동거함이”를 함께 노래 부를 수 있는 일본인이고 싶습니다.
출처: Christianity Today Korea 8월
출처: Christianity Today Korea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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