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적인 선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보완을 해주는 좋은 글이라 카피해 올린다.
------------------------------------------------------------------------------------------------------------
‘성육신적 선교’라는 오류
우리 사명은 다른 문화 속에서 ‘예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토드 빌링스 J. Todd Billings 2012.7.25 황혜숙 옮김
최근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책에서 ‘성육신적 선교’를 주장했다. 이들은 현지 실정과 동떨어진 선교에 머물지 말고, 지역 문화에 동화해 ‘성육신적’ 사역을 하라고 그리스도인을 독려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일부 서적과 웹사이트들은 타문화 선교에 나선 그리스도인이 적용할 만한 ‘성육신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해준다. 또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변 사람들을 섬기는 ‘예수가 됨’으로써 성육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런 자료들은 타문화권 선교를 관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하지만 ‘성육신적 선교’로 접근한 대다수 사례를 살펴보면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제 결과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발견된다.
나 자신도 ‘성육신적 선교’를 하다 이런 문제에 직면했다. 나는 신학교에서 하나님이 2000여 년 전 특정 문화권에 육신으로 오셨듯이 내 임무 역시 다른 문화권에 ‘성육신’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로부터 8개월 후 나는 문화인류학 분야의 훈련을 마치고, 우간다에서 그 나라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성육신적 방법에 대한 회의가 찾아왔다. 내가 우간다 문화에 동화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우간다 사람들이 꼭 ‘예수를 보게’ 될까? 예수의 임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영원한 ‘말씀’이 성육신한 사건이 정말로 적절한 사역 모델일까?
신학 공부를 할수록 질문은 늘어만 갔다. 여러 성경학자와 신학자를 통해 나는 성경과 정통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인에게 ‘성육신’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학교의 선교학과와 목회학과 교수들은 내가 품은 질문에 다음 같은 상당히 실용적 답변만 해주었다. “성육신적 사역이 아니면, 어떤 모델이 타문화 선교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지난 10년 동안 성육신적 선교가 신약성경에 나오는 ‘종 된 증인으로 수행하는 타문화 선교’라는 더 풍성한 신학, 결국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사역을 사실상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가지 왜곡
성육신을 선교의 한 모델로 보는 시각은 두 가지 면에서 위험한 불균형을 초래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성육신 교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말씀’이 성육신해서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유일무이한 신적 행위를 한낱 인간에 불과한 우리 삶에서 반복되는 ‘사역 방법’으로 바꿔버리는, 성육신의 진리를 왜곡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왜곡되는 사례 두 가지를 살펴보자. 하나는 주류 기독교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대개 보수 복음주의자 사이에서 나타난다.
먼저, 도시지역 선교에 관한 2시간짜리 워크숍에서 벌어진 일을 보자. 워크숍을 시작하면서 사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묘사한 요한복음 1:14을 유려하게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인용했다. “그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가 사는 곳에 오셨다.” 만약 이웃으로 함께 살면서 그들과 동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 전략이라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워크숍 내내,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법과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방법을 비롯해, 도시 지역 이웃에 동화되기 위한 수많은 방법을 소개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예수는 타문화에 동화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모델을 제공했을 뿐, 예수의 삶과 가르침, 그의 죽음과 부활이 주는 특별한 메시지는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 워크숍의 접근 방식은 교회의 다른 사역에서도 볼 수 있는데, ‘성육신적 선교’를 그 핵심 은유로만 축소해버린다. 그래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언보다는 다른 문화에 어떻게 동화될 것인지에 더 관심을 둔다. 사실 최근 개최된 한 주류 교파의 선교 컨퍼런스에서는 선교사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타문화에 ‘성육신’만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단체는 “복음을 설교하지 말고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물론 도움이 필요한 사람 곁에 머물러주는 ‘임재 사역’도 중요하다. 그러나 복음을 타인에 동화하는 것으로 축소해버리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유일무이한 사건은 부차적이 되고 복음은 개인 윤리가 되어버린다.
이와 대조적으로, 보수적 복음주의 진영의 ‘성육신적 선교’ 옹호자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청년 문화든 도시 문화든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동화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예수가 승천 직전에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새번역)라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면서 증언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복음주의권에서 성육신적 선교를 지지하는 이들 또한 ‘성육신’을 하나의 선교 모델로 사용하며, 그로 인해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내포된 의미를 놓쳐버렸다.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의미는, 제2의 성육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예수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한 요한복음 20:21을 자주 인용한다. 그들은 이 말씀을 성육신 행위를 모방하라는 뜻으로 본다. 하지만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바로 이어지는 다음 구절을 놓쳤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따라서 우리 자신이 ‘성육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내 안에, 그리고 나를 넘어 임재하는 것이다. 그 성령이 바로 우리 증언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성육신을 선교 ‘모델’로 받아들인 탓에, 성령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임재하게 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당신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만나게 될 유일한 예수일 수 있습니다”라는 구호가 그들 가운데서 종종 들린다. 청년 리더들은 젊은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에서 ‘예수가 되라’는 강권을 받는다. 교회 개척자들은 그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되라’는 조언을 듣는다. 성육신으로 예수를 드러내야 하는 부담이 각 개인의 어깨에 지워지는 셈이다. 이런 신학은 대개 개인의 에너지 소진과 피로로 이어진다. 동기 자체는 관계적이고 복음적이지만, 이런 접근은 그리스도의 성육신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최고 증언자인 성령의 역할(요 15:26)을 부인한다.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사람으로 설 수 없음을 잊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약성경에서 구원, 그리스도인의 삶, 선교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이미지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거나 멀찍이서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나뭇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듯 그리스도와 연합해있으며(요 15장), 예수의 죽음·부활·승천과 연합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롬 6:3-11; 엡 2:6). 우리는 죄에 대해 이미 죽었지만, 여전히 옛 사람을 죽여야 한다(롬 6:6; 8:13). 이 모든 일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롬 8:9).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는 죄 용서, 성령이 이끄시는 새로운 삶,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정체성, 다양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교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생활, 이웃 사랑, 성령과의 동행 등으로 연결된다. 내가 최근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회를 위한 신학과 사역의 재구성」(Union with Christ: Reframing Theology and Ministry for the Church)을 펴내면서 살펴보았듯, 이런 것들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여러 전통의 많은 성경 신학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그 중심임을 담대하게 선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토론토 위클리프대학의 리처드 롱에네커 명예 신약학 교수는 바울 서신의 주석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기독교 선포와 경험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육신적 선교’ 방식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신약성경의 핵심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약성경은 세상에 오신 성자와 성령의 ‘선교’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는 교회의 ‘보냄 받음’이 근본적으로 파생적이고 부차적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에 입양되었다. 우리에게는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지닌 신성한 본성이 없다. 그저 인간 본성이 있을 뿐이다. 그런 우리를 성령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유익을 누리도록 이끈다. 이렇게 교회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루는 대사로 보냄 받았다. 우리는 증인으로서 우리가 아닌 우리 너머를 항상 가리켜야 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거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계속’ 이루는 존재가 아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우리를 어떻게 세상에 보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요 20:21). 그런데 요한복음이 세상에 보냄 받은 성자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는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신약학자 안드레아스 코스텐버거가 지적했듯이 “‘세상에 오신’ 혹은 ‘내려오신’ 혹은 ‘올라가신’” 같은 용어들은 “오직 예수에게만 사용된다.” 코스텐버거는 우리가 세상에 보냄 받은 방식은 “예수가 세상에 오신 방식(즉, 성육신)이 아니라, 예수와 예수를 보내신 분과의 관계의 본질(즉, 복종과 전적인 의존)에 따라 보냄 받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또 다른 성육신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그의 통치를 증언할 제자로 보냄 받았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로 성육신한 하나님의 행위를 지극히 유일무이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성육신 이전의 신성한 ‘말씀’이 아닌, 하나님이자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말한다. 이는 빌립보서 2:5-7에 대한 매우 적절한 해석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우리도 성육신 행위를 모방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때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리스도가 ‘사람들과 같이’ 된 것처럼 우리도 성육신해야 한다는 의미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이 구절의 보다 넓은 문맥과 상충된다. 바로 앞의 빌립보서 2:1-4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들에게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주고, 아무 일에든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고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5절에서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믿는 사람의 태도와 성향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구속의 삶과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은 겸손함으로 서로 섬기기 원했다.
어떻게든 우리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라 높임을 받을만한, 지극히 고귀한 행동을 모방해, 우리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만들어야 하는가?(빌 2:9-10) 전혀 그렇지 않다. 경배의 대상으로 높아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만 허락된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같이’ 된 일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실현되었듯 말이다. 빌립보서 2:1-11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성육신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섬김과 복종과 화합의 삶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주요 성경학자가, 바울은 성육신 행위를 모방하라고 권면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한다.
바울은 오직 자기희생적 복종의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관점에서만, 자신의 선교 전략을 기술한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2). 성육신적 사역을 지지하는 이들은 바울이 권고한 문화적 동화가 성육신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 듀크대학의 신약학과 리처드 헤이스 교수 같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자기희생적 종으로서 성육신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신약성경의 어떤 구절도 우리가 성육신이라는 신성한 행위를 모방해야 한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육신적 선교’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는 구절들은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신약성경의 보편적 주제를 설명할 뿐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새 사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성경 가르침에 비춰 타문화 선교를 이해하고 접근하면 성령이 공동체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된다. 개인주의로 흐르기 쉬운 ‘성육신’ 모델과 달리,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이뤄지는 사역은 모든 타문화 선교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로 나아간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탄생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고, 그렇게 새로 태어난, 문화적으로 다양한 이들이 한데 모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
신약 시대 교회들은 타문화에 접근할 때 ‘성육신적 선교’ 신학에 의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만들어가는 성령의 사역에 반응했다. 이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내려와 하나님의 큰일을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능력을 주었을 때 시작됐다(행 2:4-12). 성령은 유대인 간의 언어 장벽만 극복한 것이 아니다. 동일한 성령이 베드로와 이교도인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어 서로 만나게 하고, 복음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는 선포를 하게 했다(행 10:1-33).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라고 강조하면서, 이는 하나님이 그 문제와 관련해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행 15:8-9). 예루살렘 회의는 이런 계시를 근거로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가 함께 지켜야 하는 중요한 문화 규범들을 도출했다(행 15:22-29). 초대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 성도의 문화를(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존중하라고 배웠는데, 이는 성령이 그들을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볼 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구속의 마지막 환상이, 다양한 문화권의 인류가 한데 모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장면인 것도 당연한 듯싶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그러나 이 환상은 미래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에베소서 2:13-18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현재 우리 모습이, 장차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은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 될 미래를 예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기”(새번역)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이 핵심 문맥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에베소서 2:14-1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이뤄지는 성령의 공동체적 사역은 이와 같다. 그리스도는 적대적인 집단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허물고, 십자가를 통해 그들을 한 몸으로 만들며, 모든 이들을 모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를 섬기게 하는 평화를 가져온다. 하나님은 사람 사이를 가르던 담을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고 그들을 택하여 새 가족, ‘새 사람’이 되게 하신다.
새 사람을 탄생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고 이를 발견해나가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보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복음 전도가 중요하지만, 멀리 떨어진 선교지에서 온 소식을 전하거나 교회에 청년 대상 신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정도로는 쉽게 이루어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 여러 문화권으로 보냄 받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문화권에 사는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그곳에 머물며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행동으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성육신적 선교’ 방식대로, 그 문화권에 ‘성육신’하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그 문화권에서 ‘예수가 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은 살아계신 주님을 우리 가운데 임재케 하는 성령의 사역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신학자 앤드류 퍼브스는 “예수를 육화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암시하는 모든 가르침에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일하는 살아있는 주님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우리 곁에 없는 신화적 주님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는 보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성령에 의해 모아졌다. 많은 ‘성육신적 선교’가 이 부분에서 약점을 드러낸다. 성육신적 선교를 하는 개인은 청년, 도시 거주자, 외국 문화권에 다가간다. 그러나 ‘성육신’ 메타포는 ‘보내는 것’과 관련이 깊어 ‘모이는 것’에는 거의 힘쓰지 않는다. 실제로 성육신적 선교를 통해 복음을 접한 많은 젊은이들이 다양한 세대가 함께 모이는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성육신적 선교를 옹호하는 이들 중 일부는 연합 예배가 진정한 선교를 방해한다고 여긴다. 진정한 선교란 각자가 처한 다양한 상황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식의 관계 강조도 나름 가치는 있지만, 분산된 교회(개인)에만 관심을 집중하면 개인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 또한 예수가 성령을 통해 연합 예배의 말씀과 성례에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을 평가절하 하는 결과를 낳는다.
요한계시록 5:9의 종말론적 이미지는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예배하는 장면이다. 성령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여러 종족의 사람을 연합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도록”(엡 2:18) 하기 위해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구별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한 몸임을 보여주려면, 모두가 함께하는 예배는 필수다(요 17:23).
성육신의 재발견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대담한 확신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은 육신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남을 위해 봉사하고, 일부는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했지만, 예수처럼 성육신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예수만이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이 유일무이한 신적 행위를 배제한다면 예수가 우리를 위해 한 행동은 구원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제 복음주의자들도 성육신이라는 놀라운 사건이 가져온 여러 가지 결과를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때로 육신과 물질세계에 대해 영지주의적 태도를 보이며, ‘영적인’ 사람이라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행동한다. 그러나 성육신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그 틀 안에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볼 수 있다. 성육신이라는 유일무이한 행위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감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는 성육신의 유일무이함을 인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역동적 신학으로 연결되는지 깨달아야 한다. 그 연합 속에서 성령은, 문화적 배경은 서로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 그리스도를 체화한 새 사람들을 한데 모아 하나님을 예배하게 할 것이다.
토드 빌링스(J. Todd Billings)는 웨스턴신학대학교 개혁신학과 부교수이자,「그리스도와의 연합: 교회를 위한 신학과 사역의 재구성」(Union with Christ: Reframing Theology and Ministry for the Church)의 저자다.
출처: Christianity Today Korea 8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