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6일 수요일

사역자의 기쁨, 선교사의 기쁨


사역자의 기쁨, 선교사의 기쁨

  "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 (요한복음3:29,30 새번역)

두 주전에 어떤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선교사로서 나는 어떤 기쁨을 가져야하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든 까닭은 다음과 같다. 당일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일본사회에서 자리를 잘 잡은 중국인들이었다. 나만 한국인이었다. 늘 중국인 사이에 나만, 혹은 우리 가족만 외국인이었지만, 그날은 낯선사람들을 만나서 그런지 더욱 긴장되었다. 중국어 발음도 더 신경쓰이고 그랬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친철하고 예의바르고 세련되었다. 그리고 모두들 좋은 말을 내게 해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 사람들중에(중국인들이) 누군가 작정하고 내게 적대적으로 대한다면 내 마음은 어떻까?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 그 언젠가 내가 사역하는 중국인 사역현장에서 독한 중국인 한 명이 나와 내게 험하게 공격한다면 나는 감당해낼 수 있을까? 그로 인해서 내게 주신 중국인에 대한 애정이 사그러지고 무정(無情)해지면 어떻게 하지? 다행히 중국인 사역을 한지 근 10년이되는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며 잘 대처해 낼 수 있을까? 

자신을 왕따시키는 학교에 정이 떨어지고, 자신을 무시하는 직장을 관두고 싶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 곳을 사임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특히, 나는 마음이 약한 것이 약점이다. 상처를 쉽게 입는 편이다. 맞서 싸우지 못하고 뒤돌아가서 신음하는 스타일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약하다. 어떻게 이런 약한 기질을 극복하면서, 중국인 사역에 대한 부르심을 다하고 이 길을 끝까지 다 달려갈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있을 때, 읽고 있던 요한복음 3:29,30이 새롭게 와 닿았다. 

1. "신부를 차지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신랑이다." 

중국인들을 차지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신랑되신 주님이시다. 나는 이 신부된 양무리들을 신랑에게 소개하는 자이다. 요한처럼말이다. 내가 신부된 양무리들의 마음을 얻는 기쁨, 그들의 인정을 받는 기쁨, 사랑을 받는 기쁨도 내려 놓아야 한다. 이런 기쁨들은 내가 신부를 차지하는 신랑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갖게 한다. 이 착각이 비극의 시작이다. "신부를 차지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신랑이다". 신랑이 신부를 차지하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쁨이다. 행복이다. 

2.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
     뻐한다."

사역자 된 나, 선교사된 나는 무엇으로 기뻐해야하는가?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그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신랑의 소리다. 결코 신부나, 그 주변인이 아니다. 기타 사람들의 소리가 아니라, 신랑의 음성이다. 이게 사역자를 선교사를 크게 기뻐할 수 있게 한다. 신랑과의 인격적인 관계, 신뢰, 기대에서 오는 기쁨이다. 신랑을 만나는 기쁨이다. 신랑의 음성은 하늘의 소리요. 땅의 양식이다. 신랑의 음성만이 진정성 있는 기쁨이다. 사역도, 사역의 열매도 큰 기쁨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이런 일들이 기쁨과 보람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쁨을 사탕처럼 하나 하나 즐기다며 보면, 신랑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아니 신랑의 음성을 듣고 싶어지지 않는다. 듣고도 못들은 척 하는 수준에 이를수도 있다. 그리고 점점 자신이 신랑인듯이 착각하고는 신랑의 기쁨에 한다리 걸쳐놓고 신랑행세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거짓 기쁨이다. 불의한 기쁨이다. 

요한은 신랑의 음성으로 크게 기뻐했다.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요3:29). 나는 신랑의 음성을 듣는 기쁨을 맛보고, 맛보고, 또 맛보면서 여기에 인이 배기고 중독이 되어야 한다. 신랑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하는 기쁨으로 가득차야 한다. 이 기쁨이 내 안을 채워나가고, 내 삶을 채워가날 때, 나는 선교사로서의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기쁨이 동기가되고 수단이 되고 목적이 될 때, 그 어떠한 혹독한 공격앞에서도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랑이 있고, 신랑의 음성이 있는데 그 무엇이 더 필요하랴! 

며칠 전, 동경 기독 중국인 펠로우쉽을 섬기면서 아주 작지만 이 기쁨을 다시한번 맛 보았다. 거의 처음으로 오십여명의 사람들이 자기교회 사람들이 아닌 동료 크리스천들을 만나며,  서로 인사하고, 이름을 주고 받고, 교제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아무도 나를 안 찾아 준다할지라도 그 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기뻤다. 그들이 흥해가는 것이 얼마나 흐믓하든지!

3. "그는 흥하여야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선교사만큼 이 쇠하는 기쁨, 흥하는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기쁨을 누리는 소명으로서의 직업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직업적으로(?) 떠남이 전제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현지인이 흥해지면 차츰 쇠해져야하는 것이 외국인 전도자다. 이 점이 내 개인적으로는 지역교회 목회와 많이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도 흥하고 나도 흥하는 케이스가 있긴 하다. 그렇지만 선교지에 그런 케이스는 결국 건강하고 자립적인 현지인 공동체 건립을 지체시키는 주 원인이 된다. 내 존재의 필요성이 갈수록 작아질만큼 현지인의 자립성이 높아지는 것이 사역자로서의 성공이다. "그는 흥하여야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아멘!!

그들이 서로 친해지고 흥해가는 것이 내 기쁨이다
(5월13일, 동경 기독 중국인 연합 Fellowship)


댓글 1개:

  1.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저도 대만땅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떠나야하나 요즘 묵상하고 있는데, 이 글이 저에게도 큰 도전이 됩니다.
    하나씩 제가 맡았던 사역들을 정리하며 그 자리에 서 있을 사람을 이미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더욱 그 분의 이름을 높여드릴 수 밖에 없음을...
    그리고 저는 또 은혜를 입어 또다른 곳에서 놀랍게 일하고 계신 그 분의 역사하심을 보러 갈 기대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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