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5일 화요일

<붉은 하나님 God is Red> 랴오이우


이 책에는 많은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 내용은 고난과 핍박 속의 중국교회와 신도들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를 작가가 인터뷰한 것이다. 그 동안 중국 교회와 신앙인들을 다룬 책들은 지속적으로 출판되어 왔다. "하늘 속한 사람(윈형제, 폴해터웨이, 홍성사. 2004.7)", "북경에 오신 예수님(데이비드 아이크만, 좋은씨앗, 2005.9)" 이 최근의 대표적인  책들이다. 
지금 "붉은 하나님(랴오이우, 새물결플러스,2014.1)"도 비슷한 흐름에 서 있는 책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삶으로 신앙을 지켜오고, 목숨으로 증명해 온 신앙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리고 중국 교회는 그 생명의 자산을 풍성하게 갖고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의 중국 교회의 진정한 가치요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2013년 10월13 일에 일본의 NHK 스페셜에서, "중국의 가정교회"에 대한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일본의 일반 방송도 중국 가정교회의 존재적 가치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중국교회의 폭발적 성장과 숫자에 가치를 부여한다. 수긍이 간다. 만일 중국의 기독교인이 1.000만명도 안되었다면 그 누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중국교회를 볼 때, 꼭 유념해야 할 것은 숫자나 성장이 아닌, 그들이 가진 고난을 이겨 온 신앙의 가치다. 목숨을 걸고 지켜 온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헌신이다.  이 책은 다시 한번 그것을 보여준다. 



이 책은 중국교회가 가진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약간 특이하다. 중국교회의 고난의 역사, 간증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책이지만, 정작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시종일관 기독교인과 같은 위치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신앙과 삶의 이야기들을 듣고 기록한다. 그의 인터뷰는 반체제 작가로 살아 온 작가의 삶과 궤적을 같이 한다. 수 많은 정부와 시대의 압력, 핍박, 고난에 시달리면서도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반체제 작가로 살아 온 랴오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중국의 정신"을 대신 이야기 해 주는지도 모른다.  


최근 연안의 경제발달 도시 온주(溫州)의 가정교회 예배당이 정부에 의해서 강제 철거 되고, 일부 교회들의 건물 외부 십자가가 강제로 제거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중국 정부의 종교에 대한 핍박으로 전세계에 알려졌다. 나는 얼마 전 중국의 일부 목회자들과 만나 며칠을 함께 보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마침 온주 교회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를 나누던 다수의 중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이 사건은 명백한 신앙에 대한 정부의 핍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도 던져졌다. 넓고 큰 예배당, 최신식 예배당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교회에 던지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없는가? 한 목회자가 이야기 했다. 최근 연안 지역의 가정교회들이 경쟁적으로 큰 예배당을 짓고, 내륙지역 교회들은 부러움에 이런 예배당을 투어까지 하며 배워 간다는 것이다. 그는 한 마디 더 했다. "연안지역의 교회들은 한국에가서 예배당 투어했다"고, 이어서 누가 한 마디 더 했다. "한국은 미국가서 배웠어!" 라고. 

중국교회가 가져 온 가장 중요한 가치와 자산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중국교회의 보물은 사이즈도 숫자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내적인 보물이 밖으로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의 빛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시선이 한  반체제 작가가 주목하는 것에 주목하고, 한 방송사(NHK)가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 했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한국교회를 탐방하는 중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사이즈와 숫자를 드러내고 자극하는 투어를 지양(止揚)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동감하고 고양시키는, 그리고 그 발전이 세계 교회를 향해서 기여할 수 있도록,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투어를 지향(志向)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도 예배당 투어를 넘어서는 가치있는 자산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붉은 하나님"! , 이 하나님은 지금 중국 공산당 치하에 있는 중국의 하나님이다. 과거 중국인들은 기독교인이 한 명 늘어 나는 것은, 중국인이 한 명 줄어드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기독교는 양교(洋教)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중국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양교가 아니다. 붉은 정권 아래서, 붉은 피를 흘려가며 얻은 보배로운 예수의 피를 바른 붉은 중국 기독교인 것이다. 이 한권의 책을 권한다. 붉은 하나님으로 당신도 붉게 물들 것이다.

2014년 7월 14일 월요일

동경 중국인,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지난 주 금요일에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한 청년을 심방했다. 우리 교회에 한 번 나온 적이 있던 어떤 자매가 급작스럽게 매우 어려워하면서 전화를 주었다. 다름이 아니라, 중국 고향의 아는 사람 아들이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는데, 몸이 안좋아 병원에 가서 검진을 했는데, 말기 암으로 판명되어 현재 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환자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렵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아들고, 바로 챙겨서 아내와 함께 요코하마의 한 병원에 있는 스무세살의 청년을 병 문안 했다. 

청년의 이름은 팡웨이민(方伟敏). 우리가 방문했을 때, 청년은 하루 종일 고통에 시달리다, 그 때야 겨우 진통제 맞고 잠들어 있었다. 같이 간 자매와 부모로부터 어떻게 된 사정인지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3월부터, 어깨와 다리에 심한 통증이 시작되었고, 참다 참다 인근 병원가서 검사하니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가서 정밀 검사를 했다. 검진 결과 대장암 말기였다. 확산 속도가 너무 빨라서 수술이 불가능했고,  뼈까지 전이되어 있었다. 의사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했다. 본인도, 가족도, 우리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비보를 전해듣고 중국에서 달려온 부모님이 옆에 계셨다. 부모님은 믿기지 않아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긴가민가한 상태로 일본까지 한 걸음에 달려왔지만, 멀쩡해 보이는 젊은 아들이 그런 심각한 병으로 누워있다는 것이 거짓말 같은 현실이었다. 너무 급작스럽고 절박한 현실은 당사자에게도, 그리고 그를 둘러싼 그 누구에게도 받아 현실로 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방문후 잠시 지나자 청년이 어렵게 눈을 떴다. 고통스러운 얼굴이다. 조금 대화를 나누었다. 스므세살의 꽃같은 나이의 말쑥하게 생긴 건장한 청년이었다. 예의도 바르고, 세심한 사람이다. 그에게 성경말씀을 읽어주었다. 요한복음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리고 부활의 생명을 이야기 했다. 부모님은 그리스도인이었다. 청년도 중국에 있을 때는 교회에 나가곤 했던 것 같다.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그 생명을 어떻게 얻게 되는지 설명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리고 청년에게 세례를 받겠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겠다고 이야기하고, 세례 받겠다고 했다. 그는 세례 받기 원했다. 나는 병실에서 바로 청년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리웨이민 형제에게 세례를 베푸노라".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은혜를 베푸소서! 하나님 도우소서! 치료하소서! 

청년의 병실 표지
올해는 청년이 일본에 온지 3년째다. 많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들은 이야기를 기초로 해 볼 때, 성실하게 지난 3년의 일본에서의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언어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대학에 진학해 2학년이었다. 지난 3년간 얼마나 숨가쁘게, 힘들게 지내 왔을까? 한 푼이라도 더 벌고, 한 푼이라도 씀씀이를 줄이며 살아왔겠지! 특별한 특기가 없는 외국인 유학생이니 가장 밑바닥의 일을 해 왔겠지! 그리고 그런 가운데 겪는 고통을 결코 집안의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그렇다. 아마도 지난 3년 동안 제대로 휴식을 취한 적도, 식사를 한 적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향에도 돌아가보지 못했을 것이다. 가난한 지역, 가난한 가정에서 온 유학생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말이다. 정말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아픈 상황이다. 아무도 이 젊은이의 브레이크 없이 달려온 삶을 옆에서 봐주거나 붙잡아 주지 못했다. 다들 그럴 여유도 그럴 공동체도 없다. 그저 "살아남기(survival mode)" 위해서 숨 가쁘게 달려가는 것이다.  옆으로 향하는 넓은 시야(視野)를 가리고 앞만 보며 주어진 트랙을 질주하는 경주마(競走馬)처럼 말이다.

청년은 오늘 비행기로, 가고 싶던 고향으로 간다. (긴급하게 함께 일하는 동역자에게 부탁을 해, 비행기표와 기타 병자들을 위한 비행서비스를 알아보고 작은 도움을 나누었다.) 형제는 병든 몸을 이끌고 돌아간다. 가족들의 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소망이었다. 고향에서 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그리고 최고의 방법으로 치료하고, 회복하고, 다시 이 곳에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청년은 대학에 자퇴서를 내지않고 휴학서를 냈다. 같은 마음으로 기도한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이곳 일본에서는, 일본의 중국인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난다. 긴급한 상황에 처한 중국인들이 많다. 급작스러운 병으로 쓰러진 사람들, 불치병의 발병으로 사면초가가 된 사람들, 불행한 사건 사고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하나 같이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다. 작년에는 중국에서 생면부지의 아주머니에게서 국제전화가 온적도 있다. 딸이 불법취업으로 붙잡혔는데, 찾아 줄 수 있는지? 걱정으로 가득한 한 어머니의 전화였다.  한달 전에는 교통사고로 죽은 딸을 찾아 일본에 왔지만 언어도, 법도, 방법도,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어, 거리에서 억울한 딸의 죽음을 호소하는 한 중국인 아버지의 모습이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많으나, 이곳에는 이들을 도울수 있는 단체나 개인이 없다. 이번에도 그랬다. 다급한 청년의 아버지는 영사관에 몇 번 전화를 하셨는데, 영사관은 이런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무정하고 행정적인 답변만 들었다. 그리고 어려움 당한 이들의 부모님들, 혹은 가족들도 일본어가 되지 않거나, 갑자기 온 일본의 상황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옆에서 겨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어려움 당한 이들의 친구들인데, 그들의 시간과 도움은 한계가 있다.

이런 가운데, 불충분한 언어, 불충분한 정보는 가족들의 바른 판단, 최선의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다. 긴급한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보 전달(통역포함), 따뜻한 관심과 도움을 주며, 힘과 평안, 지지를 보내줄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그룹이 필요하다. 이 청년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전받고 기도하게 된다. 함께 동역자들과 나누고 기도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자. 그리고 팀을 짜자! "위기 지원 팀" 어떻까? 이는 생명과 관련된 긴급사항이다.

2014년 7월 11일 금요일

<기독교의 역사> 폴 존슨

폴 존슨의 <기독교 역사>는 풍성하고 상세한 책이다. 오랜만에 이렇게 두터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 기록물을 제대로 보여준다. 예를 들면, 당시 그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이야기 했고, 어떻게 기록을 남겼는지 정확히 짚어 준다. 그래서 궁금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료적 접근이 조금이나마 가능하다.

나 개인적으로는 처음 부분(1부 예수 종파의 출현: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 사도행전의 역사적 부분)의 기록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2부 부터 시작되는  초대교회 교부의 시절부터 현대의 부분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재미있게, 그리고 많이 동의하며 읽었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독일 기독교에 대한 기록 부분은 너무 궁금해서 순서를 제치고 제일 먼저 읽어 볼 정도였다. 나치즘에 굴복한 기독교, 히틀러에게 버림 당한 기독교에 대한 부분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그는 이야기한다. "독일 기독교는 한 번도 국가에 반기를 든 적이 없다(p793)", 심지어 그들중 한 목사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리스도는 아돌프 히틀러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다". 역사는 반복해서 현재 진행중이다. 독일 기독교의 이야기는 초대 기독교가 제국화(크리스텐돔 Christendom)되어 갈 때, 초대 교부들과 지도자들 사이에 들려졌던 이야기 "그리스도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이야기의 반복, 즉 국가주의 기독교, 제국주의 기독교, 대중주의 기독교의 도래(到來)와 재래(再來)와 반래(反來)다.

이 책이 제공하는 다양한 기독교의 역사상의 이야기들은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기독교 자체가 가진 풍성한 생명력과 창조의 힘, 적응력과 자유의 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유용한 가능성이다.

이 책에서 선교적인 부분에서 눈여겨 볼 만한 내용들이 등장한다. p 814에서 부터 기독교의 아시아 선교를 언급한다. 제목 제체가 "아시아에서 기독교 토착화의 실패"다. 그는 아시아에서 토착적인 문화와 전통, 나름대로의 생명을 무시하고, 전파된 기독교를 실패로 본다. 그리고 성공적인 예로 아프리카를 본다. 아프리카의 기독교의 탄생은 독립적이고 전통적인 요소를 안고간 기독교다.

참 재미있다. 현재 전 세계 기독교 성장을 이끈 두 측을 아프리카와 중국으로 본 다면, 두 곳 다 토착화에서 가장 강력한 힘과 성장의 에너지를 가져 왔다. 아프리카의 기독교, 중국의 기독교가 된 것이다. 한 명의 선교사도 남아 있지 못했던 중국의 공산화 기간, 자신의 토속적인 요소를 마음 껏 끌어 안고  간 독립 아프리카 교단들, 오늘도 그들은 힘 있게 달려 나간다.

내게 아프리카와 중국인 재미 있고 기대되는 조합이다. ChinAfrica(China+Africa), 기독교의 미래가 그들에게 달려있다면 과장일까!

기독교의 현재는 암울함을 벗어 날 수 없다. 특히 무너져가는 한국 기독교의 초라한 현실은 우리를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 본연이 가진 스스로를 교정해 나가는 메카니즘, 본래의 아름다움, 2천년을 견뎌온 역동성은 한국 기독교의 초라한 현실이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야만성, 연약함, 가벼움, 탐욕이 역사를 견뎌오고 넘어 온 2,000년 기독교의 본질 아래 잠겨지리라!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며 얻은 교훈이다.

샬롬!


기독교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