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7일 목요일

한 일본인 히르리어 학자 이야기


일본의 한 양심적인 히브리어 학자의 고백과 삶입니다. 이런 분들이 물방이 되고, 물방울이 시내가 되고, 시내가 강이 되고, 강이 평화의 바다를 이루는 동아시아를 꿈꿔 봅니다. 동아시아 기독청년 대회가 지향하는 바도 그런 것입니다. (동아시아 기독청년대회 참고: http://threetogether.org  http://diachinese.blogspot.jp/2012/01/2.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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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와 형제가 되고 싶어 하는 일본인 학자 이야기

그리고 그와 더불어 형제애의 열매를 키워온 한국인 학자 이야기

인터뷰 김은홍 편집인   2012.7.25


우리를 늘 불편하게 하는 이웃, 일본. 주일 대사관 앞 소녀상 앞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도발을 당했다. 그 도발이 있기 한 달 전, 무라오까 교수는 그 소녀상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머리를 숙였다. 그는 우리와 그들이 형제가 되는 날을 소망하는 일본인이다.



네덜란드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일본인 교수 다까미추 무라오까, 그가 프랑스인 예수회 신부 폴 주옹(1871-1940)의 「성서 히브리어 문법」을 개정증보하고 영어로 번역하여 1991년 출판한 「주옹-무라오까 성서 히브리어 문법」은 성서 히브리어 학계의 권위 있는 문법서로 널리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무라오까는 2006년 한 번 더 영어개정판을 내게 되는데, 이 개정판을 출판하기도 전에 그는 김정우 교수에게 그 원고를 넘겼다. 거의 동시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이 과정을 통해, 2012년 마침내 가히 ‘주옹-무라오까-김정우’ 판이라 할 수 있을 「성서 히브리어 문법서」 한글판이 나왔다.



5월 26일 토요일, 무라오까 교수 부부와 김정우 교수, 우리는 그들과 특별한 하루를 보냈다. 이어지는 대화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을 거쳐 경기도 광주시 퇴촌 ‘나눔의 집’까지 가는 차 안에서 이뤄진 것이다. 



무라오까 제가 어릴 때 아버지는 입대하셨고, 저는 초등학교 시절 1년 반 동안 할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걱정하시며 손자를 잘 키워야한다는 생각을 하셨지요. 당시 규슈에 있던 저희 집 근처에는 강이 있었어요. 제가 수영을 못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절대 강 근처에 가지 말라고 아주 엄하게 명령하셨어요. 하루는 더워서 강변으로 갔어요. 제가 서있는 땅이 너무나 부드럽다고 느끼는 순간 가라앉으면서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어요. 강에 빠져 물을 먹으면서 허둥대고 있는데, 옆에 대나무 가지가 있는 거예요. 그걸 잡고 버둥거렸어요. 그 때 마침 강 저편에 있던 친구가 저를 보고 물에서 건져주었습니다. 집에 돌아갔더니 할머니가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네가 죽었으면 내가 어떻게 됐겠니?” 하시며 혼을 내셨습니다. 



고3 때 미국 침례교 선교사에게서 영어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게 됐습니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게 됐죠. 다시 들어갔을 때 그 물은 오래전 저를 죽음으로 몰았던 죽음의 물이 아니라, 침례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생명의 물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무라오까, 내가 너를 이 땅에 살려둔 것은 너에게 조그만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이제 그것을 위해서 살아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닿자 무라오까 교수는 차에서 내려 대사관 맞은편에 있는 소녀상으로 다가갔다. 한복 차림의 그 소녀는 맨발이었다. 선생은 그 소녀상 앞에 한참을 묵묵히 서있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또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무슨 기도를 했는지, 결국 묻지 않았다. 퇴촌 나눔의 집을 향했다.  



무라오까 2년 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위안부 할머니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 열렸는데, 우리 부부는 폐막 하루 전날 방문했습니다. 그쪽에서 총괄하는 한국 분이 우리 부부가 전시회에 온 첫 번째 일본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한 일본인 교수를 만났는데, 그는 전시회 마지막 날 갔다고 하더군요. 그는 전시회에 방문한 세 번째 일본인이라는 말을 들었답니다. 전시회 마지막 날까지 단 세 명의 일본인만이 방문한 것이지요. 헤이그에는 일본 대사관 직원들을 비롯해서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데, 세 사람만 방문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제가 편지 두 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무라야마 총리가 위안부 여성들에게 처음으로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1995년 8월 15일 당시 일본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편집자 주). 그러나 진심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일본 외무성이 홈페이지에 위안부 관련 글을 올렸습니다. 거기에 “전쟁이 점점 확대되면서 위안부가 필요했다”는 문안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일본 외무장관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그 문안을 삭제하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외무장관에게서 아무런 답변이 없었고, 또다시 서한을 보냈지만 아무 답변이 없었습니다.



김정우 무라오까 선생님이 2003년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 경주에 가고 싶다고 하셨어요. 일본인들이 경주를 좋아하니까 그런가보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의 방문지는 경주에 있는 일본 여성들이 거주하는 마을이었어요. 경주에는 일본 할머니들이 사는 집이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한국 남자와 결혼한 일본 여성들이 해방 후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남아 기거하는 집이지요. 선생님은 할머니들을 위로하시고, 헌금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그곳 할머니들과 그분들이 어린 시절에 불렀던 “나의 살던 고향은” 같은 일본 노래를 부르면서 함께 춤을 추셨습니다. 제게는 그 시간이 참 특별했어요. 그 모습이…. 



편집인 히브리어를 알면 성경을 더욱 재미있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신도들에게도 ‘히브리어 한번 배워볼 만하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히브리어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무라오까 일본에 가면 목회자 컨퍼런스를 개최하곤 합니다. 한번은 히브리어 분사에 대한 강의였는데, 사모들도 같이 왔습니다. 사모들은 히브리어를 모르잖아요. 사모들에겐 너무 전문적인 분야니 제목을 바꿔야만 했지요. 고심하다가 쿰란에서 발견된 시편 119편이 생각났습니다. 시편 119편은 일명 ‘알파벳 시편’이라고 합니다. 119편은 총 176절로 각 연이 8절씩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8절을 시작하는 단어가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되어있습니다. 히브리 알파벳순으로 알렙, 베트, 기멜, 달렛…그런데 이건 번역이 불가능합니다. 원본을 봐야지만 성경 원본이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저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얼마나 집중해서 만들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는 17음절로 끝나는 ‘하이쿠’라는 전통시가 있습니다. 제한된 음절에 시인의 모든 생각을 담아 전하는 겁니다. 시편의 이런 형식이 하이쿠 전통에 익숙한 일본 사람들에게는 매우 인상 깊은 것이지요. 우리 동양 사람들은 한시 같은 시를 쓸 때 그 형식미를 내용이나 이미지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히브리어 원전을 보면 그런 형식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편집인 출판기념회에서 무리오까 선생께서 강연 마지막에 한 소절 부르신 노래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정우 “형제가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133:1을 노랫말로 한 히브리 노래입니다. 제가 그때 통역하면서 순발력이 부족했어요. 그 노래를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줬어야 했는데. 함께 그 시편 133:1을 노래했으면 굉장히 좋았을 것 같아요. 



차 안에서 무라오까 교수 부부와 김정우 교수가 그 노래를 불렀다. 단음조의 쉬운 멜로디는 어딘지 우리의 정서와도 닮은 듯했다. 금세 합창이 됐다.    


히네 마 토브 우_마 나임
Hineih mah tov u-ma nayim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쉐베타 힘 감 야하드

shevet acim gam yachad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이



(* 이 노래는 유튜브에서 여러 버전으로 들을 수 있다. 축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히네 마 토브’는 유대인 출신 예배 사역자 폴 위버의 노래를 추천한다(‘Paul Wilbur-Hinei Ma Tov Umanaim’로 검색). 무라오까 교수가 출판기념회와 나눔의 집 가는 길에 부른 ‘히네 마 토브’와 같은 멜로디는 유튜브에서 ‘Hinei Ma Tov-Musica JUDIA’로 검색하면 들을 수 있다.)



김정우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가.” 무라오까 선생님은  한일 관계를 이 시편 하나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갈등을 풀어낸 것처럼 형제 나라로서 한일 관계를 풀고 싶은 것이지요. 



무라오까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마지막 수업 때는 꼭 이 노래를 같이 합니다. 이 노래에는 ‘야샤브’(yashab)의 분사형인 ‘쉐베트’(shevet)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함께 앉는다’,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이 관계는 가족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일본 그리스도인들도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노래를 하이킹이나 피크닉, 캠프파이어 할 때도 불러요. 시편 133편은 바빌론에서 귀환한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지은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나 남아있던 사람이나 다 함께 형제로서 연합하는 노래입니다. 오늘날에는 1800년 만에 약속의 땅(고국)으로 돌아온 기쁨을 표현하는 노래로도 부릅니다.



무라오까 2008년에 위안부 여성에 대한 책을 일본에서 출판했습니다. 베를린 파견 일본 기자와 공저한 책입니다. 2007년에 아베 총리가 굉장히 공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강요된 성은 없었다. 강요했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없다.” 이 발언에 한국이나 중국뿐만 아니라 필리핀 등 전 세계적으로 반발이 있었습니다. 미국 국회에서는 일본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당시 베를린 특파원이 저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는 역사적 수정주의자들의 시도를 멈춰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서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한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 구체적으로 2차 세계대전 2_3년 후에 인도네시아 반둥 지역의 성 노예 관련 재판 기록 중 네덜란드어로 된 문서를 번역해달라고 제게 요청했습니다. 일본군과 민간인들이 성 노예 문제에 책임이 있다는 판결로, 일부는 수년간 수감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문서였습니다. 그 일본 기자는 이 자료를 복사해서 일본어로 출판하고 싶었지만 네덜란드어를 몰라서 제게 협조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시 법원에서 재판 중에 증언했던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그 많은 자료를 다 번역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 일본 기자가 주석을 달아서, 2008년에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글이 일본의 진보적인 주간지에 발표됐습니다. 그 잡지는 광고를 내지 않았습니다. 광고를 내면 기업에 의존하게 되어 언론의 자유를 잃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책에는 중국인 위안부에 관한 내용도 있습니다. 80세가 된 중국 사람인데, 그녀는 일본 군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살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이제 60세 중반이 되었습니다. 이 일본 기자가 2008년에 지진이 일어났던 중국 서남부로 가서 그 여자와 아들을 인터뷰했습니다. 그해에 저는 상하이, 난징, 베이징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베이징에 있을 때 책이 출판되었는데, 그 책 한 권이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수업 마지막 날 학생들을 점심에 초대했는데 마침 제게 그 책이 있었습니다. 내 옆에 있던 중국인 여학생 한 명이 그 책을 보기 시작했고, 일본 기자가 인터뷰했던 중국인 위안부에 대한 부분을 보자 그 학생도 그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학생은 일본인 선생님에게 무료로 히브리어도 배우고 위안부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정우 무라오까 선생님은 자비량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강의를 하십니다. 어제 내가 선생님에게 은퇴하고 살림이 되냐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살림이 아주 어렵다고 하셨어요. 영국에서 10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0년, 네덜란드에서 10년, 이렇게 30년을 강의를 해서 네덜란드에서 나오는 연금은 적은가 봅니다. 그래도 이렇게 의미 있는 여행을 하는 보람으로 사시는 것이지요.  



무라오까 원어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세요.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초대받으셨을 때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당시 여인이 예수님께 했던 행동을 그리스어 네 단어로 표현합니다. 각각의 단어는 모두 미완료 시제입니다. 그 여인은 계속 울고, 계속 눈물을 떨어뜨리고, 계속 주님의 발을 머리카락으로 닦고, 계속 입을 맞췄습니다. 그런데 모든 언어에 미완료 시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독일어는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어는 그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계속’(Keep doing)이란 표현으로 여인의 행동을 묘사했습니다.  



‘계속’이란 표현이 반복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인이 그 행동을 ‘계속’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발에 한 번 입을 맞추고 끝난 게 아니라 여러 번 반복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지?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헌신을 보여줍니다. 이 본문으로 저는 ‘말없는 사랑’을 설교합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용서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용서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여인이 얼마나 오래 울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입을 맞추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 30분 정도일까요? 그 30분 동안 그 여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거나 감사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하던 행동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저는 설교에서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 자서전에 나온 이야기를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한 스코틀랜드 여성 선교사가 인도로 파송되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인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게 되었지요. 몇 년간 그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회심자는 매우 적었고, 그것이 그 선교사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울고 있는 한 인도 남자를 선교사에게 데려왔습니다. 그의 한쪽 다리에 큰 가시가 박혀있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인 그녀에게는 가시를 뺄 만한 적절한 의료기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하얀 이를 그 남자의 다리에 갖다 대고 가시를 빼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게 와서 예수님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보다 그녀가 보여준 행동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백인 여성이 자신의 입으로 인도 남성의 가장 더러운 부분을 치료한 모습 말입니다.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나눔의 집에서

무라오까 오래전부터 위안부 피해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2003년에 처음 이곳에 왔고, 2005년에도 방문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다가 2008년에는 강제로 위안부가 된 네덜란드 여성분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일본어로 출간했습니다. 이후에 중국, 필리핀, 대만 등 아시아 위안부 할머니들을 연구하면서 느낀 아픈 마음을 여러 지면에서 나눴습니다.

무라오까 선생은 오는 길에 들려주었던 일본 외무장관에 보냈다는 항의 서한 사본을 나눔의 집에 전달했다. 또 일본에서 간행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인도네시아 재판 기록에 대한 정보도 전해주었다.

무라오까제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한국인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한국인들이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내용을 모르는 것 같아서 한국 분들이 아시고 일본 정부에 삭제 요청을 해주기 바랍니다. 한국 외무부 장관이 일본 외무부 장관에게 외교 경로를 통해서 요청하거나, 시민운동 쪽에서도 해주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있는 내용은 피해자들에게 너무나 모욕적인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덮으면서 자기를 합리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삭제되어야 합니다. 피해자들에게 진정한 사과도 못하는 판에 그들을 모욕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화요일에 홈페이지를 봤는데 아직도 그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에 대한 모욕입니다. 남자들이 성적 욕구가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래도 좋다는 것을 무의식 속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라오까 여기에 할머니들이 몇 분 계시나요? 



나눔의 집 여덟 분입니다.



무라오까한국 정부에서 돌봐주고 있습니까?



나눔의 집 저희는 사회복지 법인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덟 분에 대한 법정 지원금을 정부에서 받고, 이사들과 후원자들이 기부를 합니다.



무라오까아주 적은 기부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 가지 활동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를 운영하시는 일도 하시고, 중국에서 아직 못 돌아오신 할머니들을 돌보는 일도 하시고….



나눔의 집 지금 중국에 거주하시는 할머니들은, 정확하지 않지만 2008년 전에는 한국 정부에서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지원을 했습니다. 지금은 조선 국적을 가지고 계신 중국 거주 할머니들도 한국인으로 간주하여 국가에서 지원을 합니다. 저희는 지금도 의료비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무라오까 7년 전에 여기 왔을때 중국에서 오신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나눔의 집 지금도 계세요. 중국에서 고국에 오시고 싶어 한 네 분이 현재 나눔의 집에 살고 계십니다.



무라오까 (눈물 지으심) 당시 그분이 일본어로 말씀하셨는데, 굉장히 어려워하셨어요. 



나눔의 집 예, 중국으로 끌려가셨다가 한국에 와 계시는 분, 지난번에 오셨을 때 다 보셨을 거예요. 김순옥 할머니 등. 



무라오까이 할머니들은 그래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천 명이 자신들의 과거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두려워서 숨어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파요.


나눔의 집 용기 있는 분들이죠.

무라오까  여기 계신 분 중 제일 어린 분이….

나눔의 집 85세입니다. 가장 나이가 많으신 분은 91세입니다.



무라오까 선생 부부는 위안부 관련 영상을 시청했다. 40분,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노구의 그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좌정하여 그 영상에 집중했다. 



역사의 상처가 아물 기미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처받은 할머니들이 역사가 바로 서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주옹-무라오까 성서 히브리어 문법」 한글 번역본 저자 서문에서 무라오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2001년 2월과 3월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때 나는 20세기 초반 일본이 한국의 국민들에게 끼친 엄청난 불의와 피해와 고통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참회하겠다는 뜻으로 자발적인 교육 봉사를 하고자 하였다. 이 문법책은 그 열매 중 하나이며 내가 수년간 김정우 교수와 함께 강도 높게 일한 결실이다.” 이 책은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다. 한국에 진 빚을 학자로서 갚아보겠다는 한 일본인 학자와 그의 진심을 이해하여 꾸준히 학문적 교류를 해온 한 한국인 학자가 10여 년간 나눈 형제애와 학문적 열정이 맺은 값진 열매다. 아래 글은 5월 24일 서울교회에서 열린 「주옹-무라오까 성서 히브리어 문법」 출판기념회에서 무라오까 교수가 청중에게 전한 마음이다.  

저는 학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다른 모국어와 국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시요 구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한 신앙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공유하는 기본 자세는 시편 85:10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갈보리의 십자가는 이 근본적인 진리를 생생하게 상징합니다. 두 가지 원리가 십자가에서 교차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악과 불의와 죄를 용납하거나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이러한 죄를 인류에게 물으셨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 빠져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십니다. 이사야 53:4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일본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지난 20세기의 중반까지 우리나라와 민족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조상에게 범한 역사적 과오와 잘못을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일본 왕실을 포함하여 대다수 일본 사람들이 이 역사적인 진실을 직면할 도덕적인 정직함과 신실함과 용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거움 마음을 안고 저는 지난 2003년에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여러분이 보여주신 기독교적인 우정과 관대함, 그리고 일본인으로서 저의 마음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에 힘입어 저는 여기에서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도 다시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저는 김정우 교수를 만났습니다. 저의 민족이 저지른 어두운 역사가 없었다면, 그리고 여러분에게 고통과 상처가 없었다면 <주옹-무라오까 성서 히브리어 문법>은 영어판으로만 남아있었을 것이며, 오늘 저녁에 이곳에서 이렇게 기쁜 행사를 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의 조국이 “과거를 잊지 말고 그것으로 미래의 길잡이로 만들라”는 원리를 마음 깊이 새길 때까지, 저는 저의 일본 여권을 네덜란드 여권으로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일본인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저는 일본인으로서 여러분과 다시 만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냥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 여러분과 가슴 깊은 곳에서 “보라 얼마나 좋은가! 형제가 동거함이”를 함께 노래 부를 수 있는 일본인이고 싶습니다.

출처: Christianity Today Korea 8월

성육신 선교에 대한 고찰


성육신적인 선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보완을 해주는 좋은 글이라 카피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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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적 선교’라는 오류

우리 사명은 다른 문화 속에서 ‘예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토드 빌링스  J. Todd Billings 2012.7.25 황혜숙 옮김

최근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책에서 ‘성육신적 선교’를 주장했다. 이들은 현지 실정과 동떨어진 선교에 머물지 말고, 지역 문화에 동화해 ‘성육신적’ 사역을 하라고 그리스도인을 독려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일부 서적과 웹사이트들은 타문화 선교에 나선 그리스도인이 적용할 만한 ‘성육신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해준다. 또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변 사람들을 섬기는 ‘예수가 됨’으로써 성육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런 자료들은 타문화권 선교를 관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하지만 ‘성육신적 선교’로 접근한 대다수 사례를 살펴보면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제 결과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발견된다.

나 자신도 ‘성육신적 선교’를 하다 이런 문제에 직면했다. 나는 신학교에서 하나님이 2000여 년 전 특정 문화권에 육신으로 오셨듯이 내 임무 역시 다른 문화권에 ‘성육신’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로부터 8개월 후 나는 문화인류학 분야의 훈련을 마치고, 우간다에서 그 나라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성육신적 방법에 대한 회의가 찾아왔다. 내가 우간다 문화에 동화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우간다 사람들이 꼭 ‘예수를 보게’ 될까? 예수의 임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영원한 ‘말씀’이 성육신한 사건이 정말로 적절한 사역 모델일까?

신학 공부를 할수록 질문은 늘어만 갔다. 여러 성경학자와 신학자를 통해 나는 성경과 정통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인에게 ‘성육신’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학교의 선교학과와 목회학과 교수들은 내가 품은 질문에 다음 같은 상당히 실용적 답변만 해주었다. “성육신적 사역이 아니면, 어떤 모델이 타문화 선교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지난 10년 동안 성육신적 선교가 신약성경에 나오는 ‘종 된 증인으로 수행하는 타문화 선교’라는 더 풍성한 신학, 결국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사역을 사실상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가지 왜곡
성육신을 선교의 한 모델로 보는 시각은 두 가지 면에서 위험한 불균형을 초래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성육신 교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말씀’이 성육신해서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유일무이한 신적 행위를 한낱 인간에 불과한 우리 삶에서 반복되는 ‘사역 방법’으로 바꿔버리는, 성육신의 진리를 왜곡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왜곡되는 사례 두 가지를 살펴보자. 하나는 주류 기독교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대개 보수 복음주의자 사이에서 나타난다.

먼저, 도시지역 선교에 관한 2시간짜리 워크숍에서 벌어진 일을 보자. 워크숍을 시작하면서 사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묘사한 요한복음 1:14을 유려하게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인용했다. “그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가 사는 곳에 오셨다.” 만약 이웃으로 함께 살면서 그들과 동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 전략이라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워크숍 내내,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법과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방법을 비롯해, 도시 지역 이웃에 동화되기 위한 수많은 방법을 소개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예수는 타문화에 동화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모델을 제공했을 뿐, 예수의 삶과 가르침, 그의 죽음과 부활이 주는 특별한 메시지는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 워크숍의 접근 방식은 교회의 다른 사역에서도 볼 수 있는데, ‘성육신적 선교’를 그 핵심 은유로만 축소해버린다. 그래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언보다는 다른 문화에 어떻게 동화될 것인지에 더 관심을 둔다. 사실 최근 개최된 한 주류 교파의 선교 컨퍼런스에서는 선교사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타문화에 ‘성육신’만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단체는 “복음을 설교하지 말고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물론 도움이 필요한 사람 곁에 머물러주는 ‘임재 사역’도 중요하다. 그러나 복음을 타인에 동화하는 것으로 축소해버리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유일무이한 사건은 부차적이 되고 복음은 개인 윤리가 되어버린다.

이와 대조적으로, 보수적 복음주의 진영의 ‘성육신적 선교’ 옹호자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청년 문화든 도시 문화든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동화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예수가 승천 직전에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새번역)라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면서 증언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복음주의권에서 성육신적 선교를 지지하는 이들 또한 ‘성육신’을 하나의 선교 모델로 사용하며, 그로 인해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내포된 의미를 놓쳐버렸다.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의미는, 제2의 성육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예수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한 요한복음 20:21을 자주 인용한다. 그들은 이 말씀을 성육신 행위를 모방하라는 뜻으로 본다. 하지만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바로 이어지는 다음 구절을 놓쳤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따라서 우리 자신이 ‘성육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내 안에, 그리고 나를 넘어 임재하는 것이다. 그 성령이 바로 우리 증언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성육신을 선교 ‘모델’로 받아들인 탓에, 성령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임재하게 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당신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만나게 될 유일한 예수일 수 있습니다”라는 구호가 그들 가운데서 종종 들린다. 청년 리더들은 젊은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에서 ‘예수가 되라’는 강권을 받는다. 교회 개척자들은 그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되라’는 조언을 듣는다. 성육신으로 예수를 드러내야 하는 부담이 각 개인의 어깨에 지워지는 셈이다. 이런 신학은 대개 개인의 에너지 소진과 피로로 이어진다. 동기 자체는 관계적이고 복음적이지만, 이런 접근은 그리스도의 성육신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최고 증언자인 성령의 역할(요 15:26)을 부인한다.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사람으로 설 수 없음을 잊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약성경에서 구원, 그리스도인의 삶, 선교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이미지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거나 멀찍이서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나뭇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듯 그리스도와 연합해있으며(요 15장), 예수의 죽음·부활·승천과 연합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롬 6:3-11; 엡 2:6). 우리는 죄에 대해 이미 죽었지만, 여전히 옛 사람을 죽여야 한다(롬 6:6; 8:13). 이 모든 일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롬 8:9).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는 죄 용서, 성령이 이끄시는 새로운 삶,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정체성, 다양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교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생활, 이웃 사랑, 성령과의 동행 등으로 연결된다. 내가 최근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회를 위한 신학과 사역의 재구성」(Union with Christ: Reframing Theology and Ministry for the Church)을 펴내면서 살펴보았듯, 이런 것들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여러 전통의 많은 성경 신학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그 중심임을 담대하게 선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토론토 위클리프대학의 리처드 롱에네커 명예 신약학 교수는 바울 서신의 주석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기독교 선포와 경험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육신적 선교’ 방식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신약성경의 핵심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약성경은 세상에 오신 성자와 성령의 ‘선교’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는 교회의 ‘보냄 받음’이 근본적으로 파생적이고 부차적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에 입양되었다. 우리에게는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지닌 신성한 본성이 없다. 그저 인간 본성이 있을 뿐이다. 그런 우리를 성령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유익을 누리도록 이끈다. 이렇게 교회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루는 대사로 보냄 받았다. 우리는 증인으로서 우리가 아닌 우리 너머를 항상 가리켜야 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거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계속’ 이루는 존재가 아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우리를 어떻게 세상에 보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요 20:21). 그런데 요한복음이 세상에 보냄 받은 성자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는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신약학자 안드레아스 코스텐버거가 지적했듯이 “‘세상에 오신’ 혹은 ‘내려오신’ 혹은 ‘올라가신’” 같은 용어들은 “오직 예수에게만 사용된다.” 코스텐버거는 우리가 세상에 보냄 받은 방식은 “예수가 세상에 오신 방식(즉, 성육신)이 아니라, 예수와 예수를 보내신 분과의 관계의 본질(즉, 복종과 전적인 의존)에 따라 보냄 받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또 다른 성육신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그의 통치를 증언할 제자로 보냄 받았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로 성육신한 하나님의 행위를 지극히 유일무이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성육신 이전의 신성한 ‘말씀’이 아닌, 하나님이자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말한다. 이는 빌립보서 2:5-7에 대한 매우 적절한 해석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우리도 성육신 행위를 모방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때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리스도가 ‘사람들과 같이’ 된 것처럼 우리도 성육신해야 한다는 의미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이 구절의 보다 넓은 문맥과 상충된다. 바로 앞의 빌립보서 2:1-4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들에게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주고, 아무 일에든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고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5절에서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믿는 사람의 태도와 성향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구속의 삶과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은 겸손함으로 서로 섬기기 원했다.

어떻게든 우리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라 높임을 받을만한, 지극히 고귀한 행동을 모방해, 우리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만들어야 하는가?(빌 2:9-10) 전혀 그렇지 않다. 경배의 대상으로 높아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만 허락된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같이’ 된 일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실현되었듯 말이다. 빌립보서 2:1-11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성육신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섬김과 복종과 화합의 삶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주요 성경학자가, 바울은 성육신 행위를 모방하라고 권면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한다.

바울은 오직 자기희생적 복종의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관점에서만, 자신의 선교 전략을 기술한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2). 성육신적 사역을 지지하는 이들은 바울이 권고한 문화적 동화가 성육신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 듀크대학의 신약학과 리처드 헤이스 교수 같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자기희생적 종으로서 성육신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신약성경의 어떤 구절도 우리가 성육신이라는 신성한 행위를 모방해야 한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육신적 선교’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는 구절들은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신약성경의 보편적 주제를 설명할 뿐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새 사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성경 가르침에 비춰 타문화 선교를 이해하고 접근하면 성령이 공동체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된다. 개인주의로 흐르기 쉬운 ‘성육신’ 모델과 달리,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이뤄지는 사역은 모든 타문화 선교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로 나아간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탄생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고, 그렇게 새로 태어난, 문화적으로 다양한 이들이 한데 모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

신약 시대 교회들은 타문화에 접근할 때 ‘성육신적 선교’ 신학에 의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만들어가는 성령의 사역에 반응했다. 이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내려와 하나님의 큰일을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능력을 주었을 때 시작됐다(행 2:4-12). 성령은 유대인 간의 언어 장벽만 극복한 것이 아니다. 동일한 성령이 베드로와 이교도인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어 서로 만나게 하고, 복음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는 선포를 하게 했다(행 10:1-33).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라고 강조하면서, 이는 하나님이 그 문제와 관련해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행 15:8-9). 예루살렘 회의는 이런 계시를 근거로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가 함께 지켜야 하는 중요한 문화 규범들을 도출했다(행 15:22-29). 초대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 성도의 문화를(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존중하라고 배웠는데, 이는 성령이 그들을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볼 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구속의 마지막 환상이, 다양한 문화권의 인류가 한데 모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장면인 것도 당연한 듯싶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그러나 이 환상은 미래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에베소서 2:13-18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현재 우리 모습이, 장차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은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 될 미래를 예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기”(새번역)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이 핵심 문맥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에베소서 2:14-1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이뤄지는 성령의 공동체적 사역은 이와 같다. 그리스도는 적대적인 집단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허물고, 십자가를 통해 그들을 한 몸으로 만들며, 모든 이들을 모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를 섬기게 하는 평화를 가져온다. 하나님은 사람 사이를 가르던 담을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고 그들을 택하여 새 가족, ‘새 사람’이 되게 하신다.

새 사람을 탄생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고 이를 발견해나가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보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복음 전도가 중요하지만, 멀리 떨어진 선교지에서 온 소식을 전하거나 교회에 청년 대상 신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정도로는 쉽게 이루어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 여러 문화권으로 보냄 받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문화권에 사는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그곳에 머물며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행동으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성육신적 선교’ 방식대로, 그 문화권에 ‘성육신’하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그 문화권에서 ‘예수가 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은 살아계신 주님을 우리 가운데 임재케 하는 성령의 사역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신학자 앤드류 퍼브스는 “예수를 육화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암시하는 모든 가르침에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일하는 살아있는 주님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우리 곁에 없는 신화적 주님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는 보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성령에 의해 모아졌다. 많은 ‘성육신적 선교’가 이 부분에서 약점을 드러낸다. 성육신적 선교를 하는 개인은 청년, 도시 거주자, 외국 문화권에 다가간다. 그러나 ‘성육신’ 메타포는 ‘보내는 것’과 관련이 깊어 ‘모이는 것’에는 거의 힘쓰지 않는다. 실제로 성육신적 선교를 통해 복음을 접한 많은 젊은이들이 다양한 세대가 함께 모이는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성육신적 선교를 옹호하는 이들 중 일부는 연합 예배가 진정한 선교를 방해한다고 여긴다. 진정한 선교란 각자가 처한 다양한 상황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식의 관계 강조도 나름 가치는 있지만, 분산된 교회(개인)에만 관심을 집중하면 개인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 또한 예수가 성령을 통해 연합 예배의 말씀과 성례에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을 평가절하 하는 결과를 낳는다.

요한계시록 5:9의 종말론적 이미지는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예배하는 장면이다. 성령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여러 종족의 사람을 연합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도록”(엡 2:18) 하기 위해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구별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한 몸임을 보여주려면, 모두가 함께하는 예배는 필수다(요 17:23).

성육신의 재발견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대담한 확신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은 육신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남을 위해 봉사하고, 일부는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했지만, 예수처럼 성육신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예수만이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이 유일무이한 신적 행위를 배제한다면 예수가 우리를 위해 한 행동은 구원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제 복음주의자들도 성육신이라는 놀라운 사건이 가져온 여러 가지 결과를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때로 육신과 물질세계에 대해 영지주의적 태도를 보이며, ‘영적인’ 사람이라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행동한다. 그러나 성육신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그 틀 안에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볼 수 있다. 성육신이라는 유일무이한 행위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감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는 성육신의 유일무이함을 인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역동적 신학으로 연결되는지 깨달아야 한다. 그 연합 속에서 성령은, 문화적 배경은 서로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 그리스도를 체화한 새 사람들을 한데 모아 하나님을 예배하게 할 것이다.

토드 빌링스(J. Todd Billings)는 웨스턴신학대학교 개혁신학과 부교수이자,「그리스도와의 연합: 교회를 위한 신학과 사역의 재구성」(Union with Christ: Reframing Theology and Ministry for the Church)의 저자다. 

출처: Christianity Today Korea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