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합니다! 欢迎光临! ようこそ! 일본에 있는 디아스포라 중국인들을 위해 사역하는 박수민,송수아 선교사의 블로그입니다. 이 공간은 디아스포라 중국인 사역을 위한 네트워킹과 커뮤니케이션 공간입니다.
2012년 8월 28일 화요일
2012년 8월 23일 목요일
2012년 8월 2일 목요일
선교사는 등대(燈臺)다.
선교사는 등대(燈臺)다.
- 선교사란 누구인가? 에 대한 첫 번째 대답
- 선교사란 누구인가? 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은 이곳에(http://www.blogger.com/blogger.g?blogID=8449156411065876033#editor/target=post;postID=4941769777601447219;onPublishedMenu=posts;onClosedMenu=posts;postNum=1;src=postname)
내가 생각하는 선교사는 이런 사람이다.
- 선교사란 누구인가? 에 대한 첫 번째 대답
- 선교사란 누구인가? 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은 이곳에(http://www.blogger.com/blogger.g?blogID=8449156411065876033#editor/target=post;postID=4941769777601447219;onPublishedMenu=posts;onClosedMenu=posts;postNum=1;src=postname)
내가 생각하는 선교사는 이런 사람이다.
선교사는 존재가 메시지(Message)가 되는 사람이다.
그가 그곳에 존재함으로 존재가 드러내는(보여지게 되는) 메시지가 있다.
이 메시지는 입술의 말로, 주장의 논리로 드러나는 그런 메시지가 아니다.
그가 그 자리에 서 있음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런 파장과 같은 메시지다.
공간적 존재로서의 메시지
이는 마치 등대와 같다.
등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등대가 자리잡은 위치와 환히 빛나는 빛이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상의 빛나는 등대의 빛은 바다의 길을 보여주고, 수 많은 배들의 무사 운항과귀환을 지켜준다. 등대는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상에 위치한다. 육지의 끝이나 육지에 가까운 암초같은 섬들 위에 존재한다. 외롭고 고독한 곳이지만 그런 곳에 있어야 등대로서의 가치가 있다. 등대가 거기 그렇게 서 있음으로, 존재함으로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등대의 크기, 설비, 기술 능력.....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중요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본질이 아니다. 등대는 지리적 위치가 가지는 중대한 메시지가 있다. 등대가 자리잡은 그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 그 자체가 등대 존재의 메시지다.
선교사는 선교주체 세력이라는 육지와 피선교 세력이라는 바다의 경계선상에 서 있는 등대다. 이 경계선을 넘어 바다로 나가면, 바다가 알아서 할 일이고, 한 발 뒤로 물러나 육지로 들어가면 육지가 알아서 할 일이다. 등대같은 선교사는 절묘한 그 경계선상에 있기에 위치로서의 메시지를 지니는 것이다. 육지(선교주체 세력)의 설비, 자원, 인력을 지원 받지만, 그것으로 바다(피선교 세력)를 비추는 것이다. 등대처럼 선교사는 바다의 길을 보여주고, 바다와 육지 사이를 오가는 수 많은 선교라는 배들의 안전 운항과 귀환을 돕는다.
그래서 선교사는 존재의 메시지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교사가 지니는 존재의 메시지는 선각자적인 메시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육지의 맨 앞에 서 있어야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선교사에게는 그 무엇보다 선지자적인 역할, 선각자적인 역할이 비중있게 주어지는 것이다. 현지인보다 더 잘 하고, 더 많이 하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직 못 본 것을 보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느끼고, 내일 저 너머의 것들을 향해 빛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자기의 눈으로 직접 넓고 환하게 볼 수 있도록 등대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피선교지 세력의 배들이 그 넓은 바다를 항해해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모진 풍파를 견디어 내며, 그 자리를 지켜내는 등대처럼, 자리를 지켜낼 뿐 아니라, 빛을 비추는 등대처럼 빛(Message)으로 바다를 비추어 내야한다.
왜 그래야 하나? 우리는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 서 있는 등대니까. 바다를 비추어 주어야 하니까! 그래서 등대를 거기에 세운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선교사들을 거기에 두셨음을 믿는다. 등대를 폼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어찌 등대가 눈 앞이 길만 비추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같을 수 있겠는가? 어찌 등대가 화려한 한 여름밤의 불꽃놀이 불꽃 같을 수 있겠는가? 화려함이 없어도, 태양처럼 강력하지 못해도, 오늘도 내일도 모래도, 밤 마다 성실하게 불을 밝히고 육지와 바라의 경계를 비추어야 한다.
바다를 해쳐나가는 것은 배들의 몫이다. 등대는 그들의 등 뒤에서 말없이 그러나 신실하게 선각자적(先覺者的)인 시야(視野)를 가지고 힘차게 비추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험한 바다를 향하는 배들에 대한 예의요 배려이며 응원이다.
나는 한국선교, 일본선교, 서양선교, 그리고 세계선교와 중국선교가 교차하는 지대에 서 있는 작은등대다. 서양선교가 석양처럼 저물어 가는 이 시점에, 동양선교가 어떻게 "함께"라는 "선단(船團)"을 만들어 "세계선교"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대양(大洋)"을 잘 항해해 나갈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 나갈 것인가? 그것이 내게 주어진 지금 여기서의 "공간적 존재로서의 메시지"다. 이제 대양(大洋)을 향해 나가는 이들에게, 나는 어떻게 좀 더 예의로우며 사려 깊고 힘찬 응원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주님 긍휼을 베푸소서!
삶의 존재로서의 메시지
등대는 빛을 비추어야 한다. 불꺼진 등대는 더 이상 등대가 아니다. 선교사라는 등대는 어떤 빛을 비추어야 할까? 삶의 존재로서의 메시지라는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냥 그가 거기서 살아감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긴 장마 끝에 해가 나면, 해 자체가 뭐라 설명안해도 강력하게 부어주는 축복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구름으로 가득찬 날과 다른 것들이다. 삶의 존재로서의 메시지를 지닌 분들이 딱 그렇다. 그가 존재함이 현지인에게는 따스하고 환한 햇빛 같다. 긴 항해가운데, 반갑게 육지의 존재를 알려주는 등대처럼 든든하고 반갑고 고맙다. 등대처럼 그냥 그 자리에 있기만 해도 말이다.
삶의 존재로서의 메시지는, 그가 지닌 능력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현지어를 무지무지 잘 하는 선교사도 만나봤고, 정말 현지어를 못하는 선교사도 만나봤다. 그런데 현지어를 잘 못하는 분들 가운데도, 현지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선하고 강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는 분들을 보았다. 그분들 안에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수 없는 존재로서의 메시지가 있었다. 인격이라고 할까? 예수님을 닮음이라고 할까?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고 할까? 예수의 흔적이라 할까? 그런 것이다.
더욱 더 내가 무슨 메시지에 집중해야 하는가? 명확해진다. 삶의 존재로서의 메시지, 공간적 존재로서의 메시지를 지닌 등대같은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긍휼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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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일 수요일
중국과 한국 출장을 다녀와서
지난 몇 주간 중국과 한국에 출장을 다녀왔다. 나간 김에 이곳 저곳을 들러보고 와야 하는 상황이라, 조금은 많은 일정(두 번의 컨퍼런스와 한 번의 집회인도)을 소화해 내야하는 출장이었다. 바쁘긴 했지만 적지 않은 소득이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번 출장에 있었던 일들을 큰 덩어리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내가 속한 GP선교회의 제1권역 대회 참석했다. 3년에 한번 있는 전체 권역(일본,C국,N)의 선교사들이 함께 모이는 대회였다.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고, 함께 일하는 분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좋은 강의로 도전받는 시간이었다.
둘째는, 내가 중국에서 유학할 때 몸 담았던 북경에 있는 한 교회 출신 사역자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이 모임은 내게 소중하고 의미가 큰 모임이다. 청년시절 함께 유학을 하다가 헌신했던 친구들이 이제는 사역자가 되어서 이곳 저곳에서 흩어져 중국인들을 섬기고 있다. 숫자만도 30 여명에 이른다. 이런 이들이 함께 모여 사역현장의 희,노,애,락을 나누며 배우는 시간이었다. 만나고 싶던 얼굴들을 봐서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친밀감과 깊은 유대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첫 날 북경 공항에 도착하니, 세 분의 남자 집사님들이 마중 나와계셨는데, 그 중 두 분은 나와 유학시절 같은 집에 살았던 형제들이었다. 중국의 아파트 방구석에서 함께 먹고, 자고, 공부하면서, 형 동생하던 친구들이, 이제 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고, 회사의 중간 간부들이 되어 중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간단한 자필 프랭카드까지 들고 나와서 대대적으로 환영해주는 그들을 만나니 꿈만 같았다. 오래된 친구들, 교회 어른들, 청년 간사들, 이런 저런 지인들을 만났다.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했다. 우리는 선교를 지향하는 하나의 커다란 영적인 가족 공동체(Missional Family)였다. 풀타임으로 사역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전 받았다. 그야말로 이 시대는 "그 누구나 선교사이며, 그 어디나 선교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는, 북해도에서 사역했을때 헌신하고 지금은 중국으로 돌아간 한 가정을 심방했다. 우리는 그 부부만을 만나기 위해서 북경에서 또 비행기를 타고 그곳까지 날아갔다. 그리고 하루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우리에게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그것 이상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소중한 사람들인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작년부터 우리를 기다렸던 형제의 어머니의 바램에 응답하고 싶었다.
이들은 신실한 가정이다. 일본에 유학와서 예수님을 만났고, 헌신해서 지금은 중국에서 주님을 섬긴다. 그들과 주변의 가족들, 친척들을 만나면서 하나님이 신실하게 이들을 인도하고 계심에 감사했다. 삶 자체가 증인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 하나님은 정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넷째는, 모처의 사역지를 방문해서 강의를 하는 것이었다. 사실 강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지금 중국내 사역지들은 극도의 긴장상태에 있는 것 같다. 그 곳도 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로인해서 비록 계획된 일들은 못했지만 굉장히 의미있는 시간은 가질 수 있었다. 내 눈으로 한 헌신된 부부를 통해서 빚어진 젊은 중국 일꾼들이, 힘 차게 뻗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중국의 각 처에서 심지어 해외에까지 나아가, 증인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선교에 있어서도 도래하고 있는 중국시대를 새삼 목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사는 존재의 메시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겸손하게 현지인을 섬기는 노선교사 부부의 존재, 그 존재가 가지는 메시지는 반향이 컸다. 사람들의 삶의 변화되었고, 그들을 통해 곳곳에서 주님 나라가 세워지고 있었다. 그 분들의 존재는 그 자체가 생명의 메시지였다.
이번 출장을 통해서 얻게 된 좀 더 생각해보고 연구할만한 중요한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것은 선교적 가족 공동체(Missional family)에 대한 것이다. 친구들과의 모임도 그렇고, 중국인들 사이에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선교사 파송단체의 구성도 그렇고, 좀 더 창의적이고 대안적인 방향의 선교단체들이 중국인들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심플한 행정과 재정 시스템을 유지하지만(심지어 함께 묶여있지 않지만), 강력한 친밀과 유대를 통해, 케어하고, 공동체적으로 창의적 사역을 펼쳐나갈 수 있는 모임 혹은 단체들에 대해서 연구를 좀 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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