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21일 토요일

단기 선교팀의 방문과 사역

8/13-19까지 한국에서 온 단기 선교팀의 방문과 사역이 있었다. 이번 단기팀은 GP선교회(내가 속해 있는 선교회)의 이사님이신 김대영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서울우림교회 성도님들과 담임 목사님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이번 팀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단기 팀에 담임목사님이 함께 오셨다는 점, 둘째, 단기 팀 구성이 가족 단위이며, 연령대가 7세에서 60대까지 있는 다양한 연령대의 구성된 팀이라는 점, 셋째, 호스팅 교회가 하나가 아니라, GP Japan의 네개의 교회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준비단계에서부터 몇 가지 우려를 갖게 했다. 예를 들어, 호스팅 교회간의 연합이 과연 잘 될 것인가? 스타일, 사역방식,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른 교회와 그 지도자들간의 연합은 큰 과제였다. 또한, 다양한 연령의 멤버들이 이번 단기 팀 사역을 잘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우려가 있긴 했지만, 이번 서울 우림교회 단기 팀의 사역은 성공적이었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유익을 주었다.

어떤 점에서 성공적이었는가?
다른 무엇보다, 호스팅 교회간의 동역이 잘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물론 약간의 삐걱거림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잘 넘어가고, 그런 가운데 함께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던 일들이 이루어졌고, 그 가운데 함께 하는 은혜를 누렸다. 또 그런 가운데서 서로의 모습을 알게 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된 가족단위의 단기 팀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사역에 유익했다. 가족 단위이기에 선교사들도 남성 선교사님들만 단기팀에 동참하지 않고, 선교사님들 아이들까지도 함께 하면서 동참할 수 있었다. 청년중심의 사역 팀이 오면, 부인 선교사와 아이들은 집에서 늦게 들어올 남편 선교사를 기다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같이 다니니 그런 점이 없어졌다. 또한 아이들이 5명이나 되는 팀이라, 선교사들 자녀들도 그들과 함께 하면서 교제의 유익을 누렸다. 그래서 "가족 단위 팀의 매력이 적지 않구나!" 하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어떤 중요한 유익이 있었나?
첫째, 사역을 했던 세 곳의 교회 모두 자신들에게 맞는 유익을 누렸다. 예를들면, 시부야 교회의 경우, 45년만의 첫 외국 단기선교팀을 맞아들여서, 교회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전도와 말씀의 유익을 얻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담당하고 계신 선교사님이 큰 힘을 얻으셨다.

둘째, 단기팀에 동참해서 오신 김대영목사님의 강의는 선교사들의 영성을 새롭게 해 주었다. 목사님은 중국 선교사 6년, 성경 통독 1000번 이라는 이력이 말씀해주듯 말씀에 큰 도전을 주었다. 나 개인적으로도 말씀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 또한 중국인 사역에 적용할 수 있는 "통독"이라는 중요한 도구를 얻게 되었다.

셋째, 새로운 도전을 해보면서 지역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단기팀을 데리고, 처음으로 후지산 중턱까지 가복, 이런 저런 기도가 필요한 지역들을 방문했다. 그러면서 그 동안 동경에 1년을 살았지만, 잘 몰랐던 동경을 더 알게 되었다. 특히, 후지산 순복음 교회에서 숙박을 하면서 했던 집회와 후지산 기도회를 통해서, 앞으로 형제, 자매들을 데리고 가서 수양회를 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를 알게 되었다. 영적인 토대도 쌓여있고, 저렴하고, 편안한 장소를 알게 된 것이다.  

동경으로 사역지를 옮긴 뒤, 처음 받아서 동역했던 단기 팀 사역이 잘 마무리되어서 감사할 뿐이다. 그야말로 "감사! 감사! 감사"다.










 

2010년 8월 4일 수요일

사람을 사랑함-목양(1) 잠27:23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다.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이외에 인간 존재 근본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격려를 격발시키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롬5:5) 사랑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21:15-17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부활이 증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것, 그들을 목양하는 것이다.

왜 목양일까? 왜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섬겨야하는가?
거기에 삶의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인생의 진미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을 더욱 더 사랑하고, 더욱 더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목양를 하다보면, 가족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에 눈이 떠간다. 타인에게 관심 갖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애쓰게 되고, 결국에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 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그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부지부식간에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랑으로 범벅되어 살다가 사랑에 물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목양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절대 전임 사역자들에게만 떠 넘길 수 없는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특권인 것이다.

목양이란 무엇일까?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잠언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잠언27:23에 의한 목양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첫째: 내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내가 알게 되고, 관계 맺게 되고, 마음을 주신 그 양무리의 형편을 살펴야 한다. 양떼는 형편을 살펴 주어야만 잘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다. 목자의 도움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동물이다. 목자가 어떤 사람이냐? 가 양떼의 생명, 복지를 좌우한다. 그래서 선한목자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나는 선한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예수님은 목숨을 희생한 선한 목자였다. 양떼된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예수님은 목숨을 우리에게 주기로 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것 외에는 정말 방법이 없는 그런 양무리이기 때문이다. 중국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 구절을 번역했다. "你要详细知道你羊群的景况,留心料理你的牛群"。详细知道 상세하게, 자세하게 자기 양무리들의 처한 상황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상세히 알아야한다고 해서, 스토커처럼 의심, 불신, 강요로 알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기초한 긍휼이 넘치는 관심을 말한다. 그야말로 사랑으로 그 양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가 필요한 것, 힘들어하는 것, 기뻐하는 것, 살아가는 것...... 이런 것들을 알아 가는 것이다.  

양떼의 형편을 잘 살피려면, 관심이 그들에게 있어야 한다. 무관심이라는 장벽을 뚫어야 한다. 관심을 갖는 것이 버겨운 시대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관심하도록 교육 받았고, 자라났고, 훈련되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심을 갖지 않는 시대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무관심으로 일어나는 수 많은 사건과 사고를 볼 수 있다. 조금만 관심이 있었어도, 애정과 긍휼로 귀를 조금만 기울였어도 죽지 않을 생명들이 사라져 간다.

나에게 무관심 타파는 참으로 쉽지 않다. 타고난 무관심(?)의 본성을 가진 나로서는 남에게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버겹다. 관심을 가질 때, 오는 정신적 부담감, 심적 무게감, 긴장감이 너무 크다. 이 점은 아내와 매우 대조적이다. 아내는 타고난 관심의 본성을 가졌다. 사람들의 형편, 그들의 고통, 아픔에 자신을 자주 오버랩 시키기까지 한다. 반면,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삶을 나누는 것이 참 쉽지 않다. 그것이 내가 잘 해야할 목회자의 일임에도 그렇다. 심할때는 모임을 하려고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한 동안은 내가 목회가 아닌 다른 사역을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심각하게 고려했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주님을 알아가면서 이런 어려운 점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관심을 가지려면, 두가지를 해야하는 것 같다.

첫째는 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다. 한 식탁에서 밥을 먹으면서, 천천히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듣는 것이다. 그의 지금과 부딪친 일들과 사건, 사고, 문제들을 듣는 것이다. 삶의 희,노,애,락을 귀로 듣는 것이다. 얼굴을 보고 밥을 먹으며, 얘기를 들으면 관심이 생긴다. 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얘기하다보면, 그와 나의 개인적인 관계가 생긴다. 그가 내 밥을 같이 먹는 식구(食口)가 되는 것이다. 가족으로서의 관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두번째는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나눈 사람을 마음에 품고, 그의 삶의 얘기들을 떠 올리며 기도하면 그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전에 안보이던 것이 보인다. 그 전에 안 생기던 감정이 생긴다. 긍휼, 사랑, 연민 그런 것 말이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계신 영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그리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무관심"이라는 내 본성이 조금씩 변화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내게 절대 책임이 있는 가족이 생기고 나서 부터는 더욱 그렇다. 아내와 아이들, 늘 나의 무관심을 돌파해 주는 지원군들이다. 목회와 가정이 나를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모임에 대한 스트레스는 급속히 줄었다. 왜냐하면, 두 세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형제 자매들 안에 계신 영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대감과 신뢰감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목회와 가정의 두 날개를 가진 나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둘째, 네 소떼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목자는 양무리(소떼)에게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게 목자의 본분이다. 그 무엇보다, 그 어떤 일보다 거기에 마음의 우선순위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 마음을 두고 그들을 바라보고, 마음을 두고 그들과 대화하고, 마음을 두고 섬겨야 한다. 그것이 선한 목자의 자세다.

요즘 나는 "장기려 그 사람"이라는 책을 읽는다. 장기려 박사의 전기다. 그 어떤 환자든 예수님이 보내주신 양으로 보는 그의 삶이 은혜롭다. 예수님이 보내주신 양무리, 그들에게 내 마음을 두는 것이다. 마음을 뺏기는 것이다. 그것이 목양이다. 나는 어디에 마음을 잘 두는가? 참 한심하고, 가련하고, 부끄럽다. 마음 있는 곳에 보물이 있는데 말이다. 양무리로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는 오늘을 살기를 기도한다.

아래그림: 선한목자를 그린 카타쿰의 벽화, 그리고 그림들


2010년 8월 3일 화요일

103세 동포 할머님 심방

지난 7월20일에 올해 103세가 되신 재일동포 김00 할머님을 심방할 기회가 있었다. 우연치 않게 알게 된 한 권사님의 부탁으로 할머님이 머물고 계신 병원으로 심방을 갔다. 할머님은 오래전 길에서 넘어져 정신을 잃으신 뒤 기운을 못차리시고 병원에서 누워 지금까지 지내고 계셨다.

우리가 심방을 갔을 때, 할머님은 여전히 눈을 감고 누어계셨다. 옆에서 할머님의 손을 꼭 잡았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맞고 서 있던 나무처럼, 바짝 마른 손으로 온기가 느껴졌다. "참 거칠고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셨구나!"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시편 23편을 읽어드렸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리고 할머님의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시고 평안 가운데 있으실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리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돌아왔다. 할머님의 얼굴이 맘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때부터 매일 이 할머님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면서 권사님으로부터 김 할머님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들을 수 있었다. 한국, 중국을 거쳐 일본에 들어오셔 오래 사셨고, 그전에는 건강하셔서 교회에도 잘 오시고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호의를 베푸셨던 분이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다리에 기운이 없어지고, 혼자서 교회에 갈 수 없게 되었고, 그러면서 사람들사이에서 점점 잊혀진 존재가 되셨다는 것이다. 그런 분을 권사님이 특별한 긍휼함이 있어서 찾아가 뵙곤 했던 것이다. 그나마 길에서 쓰러지시기 전까지는 집에서 계시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조금 기운을 차리시곤 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시고는 그냥 그대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계셨던 것이다. 가족들이 있긴 하지만, 자녀들이 신앙이 없고, 일본사회의 특징이 가족 연대감이 약하니, 가족들이 가까운 이웃보다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권사님과의 얘기의 주제는 일본 땅에서 오랜 세월 살고 계신 재일동포 그리스도인 노인에 대한 얘기로 자연스럽게 확대되었다. 권사님에 의하면, 김 할머님 같은 연로하신 그리스인들이 많은데, 많은 분들이 이국 땅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노년들을 보내고 계시다는 것이다. 한번은 어떤 할머님을 찾아 뵙고 집에서 찬송가를 불러드렸는데, 그렇게 하염 없이 우셨다는 것이다. 할머님이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찬송이어서 크게 감동하셨다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 찬송도 부르고 싶고, 말씀도 듣고 싶은데, 혼자 힘으로 갈 수 없고, 데려다 줄 사람도 없고, 가까운데 교회도 없고, 그래서 그냥 집에 있게 되고, 그러다보니 사람들과의 교제도 사라지고, 성경 읽을 힘도, 찬양할 힘도 잃어가고, 결국에는 모두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어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가장 힘든 근세기의 역사를 살아오신 분들, 일제 식민지, 해방, 한국전쟁...... 그 험난한 세월을 견디어 오고, 예수님을 믿어 천국백성이 되었고, 장수의 축복도 누렸는데, 노년이 너무 외롭고 서글프다. 아무도 찾아 오는 이 없이 사라지고 잊혀지는 노년. 도대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쓸쓸한 노년의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먼저는 이분들이 살고 있는 땅이 한국이 아니어서 더욱 그런 것 같다. 한국같으면 가까운 교회에도 갈 수 있고, 교회 차량이 와서 모시고 갈 수 있고, 노인대학도 있고......그런데 일본에는 그런 것이 없다. 교회, 그것도 한인 교회를 찾아간다는 것은 도시에서도 산 넘고, 물 건너 가야하는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가난한 노인은 임대료가 싼 교회가 드문 지역으로 밀려나 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분들을 돌아보기에는 다들 너무 바쁘다. 교회든 개인이든 여유가 없다. 일본에서 다들 생존 자체를 위해서 바둥바둥 거려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다리에 힘이 없어져 교회에 못 오는 노인들을 모실 힘이 없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2세에 대한 신앙교육의 실패다. 이분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이 자녀들을 신앙으로 키우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신앙적으로 잘 키운 분들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그렇지 못했다. 자녀들이 신앙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한 교회에 갈 수 있는데, 그들이 신앙이 없으니 주일에 부모를 모시고 예배드릴 생각을 안한다. 그것이 가장 좋은 효도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노년은 온다. 장수한다는 것 자체는 축복이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오는 노년에 축복을 축복답게 누리려면, 쉽지 않은 숙제들이 놓여져 있는 것 같다.